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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아빠, 남자애들이 아빠 무섭대.
바라던 바다. 남자아이들이 너무 거칠었다. 내 눈엔 그랬다. 딸아이와 여자아이들 노는 곳에 계속 얼쩡거리며 방해하고 장난을 걸었다.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목소리를 깔고 나무랐다. 2학년인 남자아이 중 몇은 겁을 먹고 또 몇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무서워한다니 다행이다.
아빠, 근데 이제 그러지 마.
왜? 아빠는 널 지켜 주려고, 좀 더 편안하게 놀라고 그런 건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p.197)
최고의 배구 선수 김연경 선수가 하늘을 뚫듯 높이 점프해서 내리꽂는 강스파이크를 뒤통수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단지 내 딸과 딸의 친구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고작 2학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아이들이기에 전혀 내게 위협이 되지 않기에 그렇게 한 것인가. 어린이들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몸만 큰 어른의 오지랖인가. 돌이켜보면, 그날 내게 혼난 아이들의 부모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몸만 큰 어른이었다면, 어른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책 「어린이라는 세게」를 읽으며 나는 계속 회개를 하게 된다. 신을 믿지만, 교회는 잘 가지도 않으면서, 성경도 아닌 에세이를 읽고 회개를 하고 있다. 너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말투도 움직임도 조심스러운 어린이였다. 나는 이 어린이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꾹 참았다. 어린이가 무서워하는 것도 싫고, 안심하는 것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침묵이 최선이었다. 나는 어린이의 보폭을 모르니 천천히 걸었고, 어린이도 비슷하나 생각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p.140)
우연히 비를 맞고 있는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도 어린이를 향한 존중과 배려로 가득하다. 이 책의 저자 김소영은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는 초기 어린이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했다. 물론, 실제로 만난 아이들에게는 크게 적용되지 않고, 부단히 몸으로 부대끼고 경험하며 노하우를 터득했다.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아이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도 싫고, 안심하는 것도 걱정스럽다.’라는 어린이라는 대상을 향한 무한한 존중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그날, 몸만 큰 남자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2학년 남자 어린이들을 윽박지른 나를 떠올린다. 나였다면, 빗방울도 튀고 우산이 작으니까 어린이에게 묻지도 않고 훌쩍 안아 올렸을 것이다.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무조건 보호해야 하고, 이끌어야 하는 약자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 (p.211)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도 어린이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을 싫어했다. 카페나 식당에서 보채거나 떼를 쓰면, 일부러 보라고 인상을 써댔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면 작은 목소리로‘저리 가. 오지 마.’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그때는 노키즈존을 환영했다. 아주 잘하고 있는 처사라 여겼다. 그런데, 내 아이를 낳고 보니 노키즈존이 너무 많았다. 좋은 곳,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한 곳에는 더했다. 가까운 곳에 좋은 카페와 식당을 두고도 노키즈존이라 들어가지 못하기 일쑤였다. 성을 내며 차별이니, 혐오니 해댔었다. 정말 몸만 큰 어른이다. 또 회개를 한다.
차별과 혐오를 하는 쪽은 잘 모른다. 당하는 쪽은 명확히 안다. 단지 불편한 것으로 여기며 자기 위로를 하고 상황을 합리화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강철같은 혐오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은 위험한 도구다. 언제든, 혐오와 차별을 드높게 쌓아 올릴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니까.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p.7)
어린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저자의 발견에 움츠러든다. 비록, 아이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내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누구보다 아이와 어린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아이에게만’이었다. 생각해보니, 부지불식간에 어린이들로부터 받은 환대가 많았다. 유독 내가 아파트 지하 1층 출입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엘리베이터가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몸만 큰 어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출입문 센서 밑에서 춤추듯 문을 열어주던 어린이가 있었다. 그날따라 준법정신이 투철했던지, 뒤차가 빵빵 경적을 울려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를 기다려주었는데, 얼른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배꼽 인사를 건네던 어린이도 있었다.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두 명의 어린이가 위험해 보이는 곡예 수준의 그네를 타고 있는 걸 보고 위험하다고 제지하려 다가서니, 아저씨 재밌어 보이죠? 가르쳐 줄까요? 하던 어린이도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나를 ‘환대’하고 있었다.
내 눈엔 그저 내 딸아이와 여자아이들에게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아이들이었는데, 내가 그때 인상을 쓰지 않고 위압적으로 다가서지 않았다면 그 남자 어린 이들은 내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또 회개를 한다. 끝도 없다.
내가 어린이들은 보호하고 교육하는 것인지, 어린이들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쉽게 결론이 나서 일부러 더 생각해본다.
“어른들은 지역의 모든 어린이가 공연을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보호자가 관심이 없거나 정보를 모르더라도 어린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공무원과 통반장이 나서야 한다. 지역 어린이들을 챙기는 것은 선생님만의 몫이 아니다. 지역 사회 전체가 어린이를 찾아 나서고, 어린이를 알아보고, 어린이를 챙기면 좋겠다.” (p.243)
물론, 지역 사회와 교육기관이 해야 할 몫은 분명하다. 언제까지 출생률만 가지고 암담한 미래를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명의 어린이는 지역 사회 전체가 양육하고 책임지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할 텐데, 개선의 여지는 요원하다. 당장, 물가와 환율, 경제적 위험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있다. 정치는 언제나처럼 불안하고 힘겹다. 지난 2년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코로나라는 혼란도 있었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니 방향설정도 어렵다. 그저 ‘각자도생’할 뿐이다. 그래도 우리의 눈과 귀, 팔다리와 마음은 어린이들을 향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한 명’이어서다. ‘반 명’이 아닌 ‘한 명’.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가정에서의 아동학대와 아동폭력이 급증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뉴스에서는 그 수치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뉴스도 봤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내 집, 내 아이의 일이 아니라고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불행은 반복된다. 아동과 어린이 구호단체나 KBS에서 방영하는 ‘동행’이라는 TV 프로그램에 후원이라도 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이 어린이를 ‘한 명’으로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p.45)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p.192)
우리의 마음가짐도 바뀌어야 하겠다. 먼저, 나부터.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라는 표현이 멋있다. 단지 어린이보다 나이 많고 몸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존댓말을 듣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다짐한다. 저자처럼 모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하기까지는 아직 어렵지만, 이것도 시도해 보려 한다. 내가 건넨 ‘품위’가 나의 ‘품위’로 돌아올 테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어린이들의 ‘환대’를 겨우 기억해 낸 것처럼, 일부러 의식하지 않고 해보려 한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는 어린이들, 딸아이 학원과 학교에서 만나는 어린이들,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하나씩 해보려 한다. 학원과 학교, 교회에서 가장 활발(‘별난’을 에둘러)하고 장난기(‘말썽꾸러기’를 에둘러) 많고, 자유로운(‘어른들 말을 잘 안 듣는’을 에둘러) 아이에게
“아저씨, 근데, 아저씨는 품위가 있어요.”
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일단, 회개부터 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