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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ㅣ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 사람 왜 저렇게 딱딱해
미디어에 노출된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의 대부분이 그랬다. 질문자가 무안해 할 정도로 대답을 단답형으로 하고 절대로 미사여구를 말 위에 얹지 않았다. JTBC의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와 나눈 인터뷰는 보는 내내 내가 긴장이 다 될 정도였다. 새 정부, 새 도지사가 들어선 후 이곳저곳에서 중증외상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많아져서 좋겠다는 덕담 정도였는데, 이 교수는 한겨울 메마른 장작 같았다. 그 어떤 표정이나 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대답도 부정적이었다.
사실 나는 이국종 교수를 그 이전에 알고 있었다. 유튜브를 통해 MBC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를 봤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 영상을 통해 중증외상, 소방헬기를 이용한 중증환자 수송, 이국종 교수 등을 처음 알게 되었다. 40분이 넘는 분량이었는데, 단 한 순간도 지루함 없이 몰입하여 봤었다. 마치 슈퍼맨 같았다. 태풍으로 인해 출동을 주저하는 소방 관계자에게 짜증을 내거나 환자의 보호자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손을 잡거나 하루 종일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담배 피우러 가는 뒷모습 등. 인간적인 모습을 미리 봐서인지 요즘 미디어에 나오는 이국종 교수의 모습이 내게는 더 낯설다.
왜 그런가 했는데 해답은 이 책에 있었다.
이국종 교수와 그의 팀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
“조직에서 나를 내치지 않는 한, 스스로를 깎아먹고 갉아먹으며 버티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가장 좋은 것은 ‘타의에 의해 잘려나가는 것뿐’이라고 수술 방에 들어서며 나는 생각했다.” (p.71, 1권)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보았다. 물러설 곳이 없이 하루를 버텨나갈 때였으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p.102, 1권)
책에는 이런 표현이 많다.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고 차라리 숨어버리는 이국종 교수의 모습. 국정감사장이나 대통령과의 만찬자리, CNN앵커와의 인터뷰 같은 곳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이교수의 모습이다. 저런 표현이 정말 많다. 중복되는 표현과 문장이 여러 군데 있지만 이교수도 출판사에서도 일부러 편집하지 않은 것 같다. 아덴만 여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군사작전의 또 다른 영웅 석해균 선장을 살린 이도 이국종 교수다. 차를 끌고 우리 땅으로 넘어오다 총상을 입은 북한군을 살린 이도 이국종 교수다. 두 사건 이후 이국종 교수는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여러 번 TV에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와 시청자들은 TV에 나온 이교수의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두 사건의 중간 과정과 이후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공격, 비난과 비판을 받아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책에서 담담히 드러내는 이교수의 말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조차 이교수를 공격하고 비난하기 바빴다. 처음 중증외상외과를 정착시키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비로소 이 교수가 왜 그렇게 표정이 없고 감정이 없이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감정을 차단해 버리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아 온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체념해 왔다.
“봄이 싫었다. 추위가 누그러지면 노동 현장에는 활기가 돋고 활기는 사고를 불러,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이 병원으로 실려 왔다.” (p.17)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응이 없었다. 대답이 없었다.
“여러 번 소견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p.304, 1권)
“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위험을 무릅쓴다고 별도 수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처우 또한 개선되는 바가 없다. 무엇으로든 보상이 필요한데,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p.395, 1권)
이교수의 말대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너무 많았다. 미국·영국·일본의 외상센터에서는 자연스레 되는 일들이 한국에서는 전혀 되지 않았다. 이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석해균 선장을 살려 내고 귀순한 북한군을 살려 내 전국민적은 관심을 받아도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헬기 파일럿과 교신도 안 되는 무전기를 들고 있어 카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하는 현실이다. 목숨을 걸고 헬기로 환자를 실어와 살려 내도 쌓이는 건 병원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다.
"그런 민원은 막아주셔야 합니다."
라고 피를 토하듯 국정감사장에서 흥분하던 이국종 교수를 100%이해하게 되었다.
네 주제에
책에 간간이 등장하는 이국종 교수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보면 그가 어머니를 닮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밥 벌어먹고 살게 되었으면 돈 욕심은 더 내지 마라. 얼마만큼이면 충분합니까? 시장기를 스스로 없앨 정도면 된다. (p.425, 1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면서 고생하는 아들을 향해 오히려 어머니가 너무 마음 아파하거나 눈물을 흘리셨다면 이교수도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교수의 어머니는 담담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MBC스페셜에서는 이교수의 어머니가 "별 볼일 없는 수많은 의사들 중에서도 네가 참 하바리인데"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며 이교수가 웃는다. 어머니의 그런 태도와 반응이 깜깜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리라 짐작한다.
"오른쪽 어깨가 부서져나갔고, 왼쪽 다리도 성하지 않은데 이제는 한쪽 눈도 멀고 있구나... 돌보지 못한 몸이 깎여 나가고 있었다." (p.154)
“나와 정경원, 장정문, 김지영은 모두 한 달 넘도록 병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p.263, 1권)
이교수를 비롯한 외상센터의 직원들 모두는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노동시간에 짓눌려 있다. 간호사들은 유산을 반복적으로 하고, 마음과 몸의 스트레스는 경악할 지경이다.
“큰 수술은 성취감이 컸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외상외과를 선택했다.” (p.45, 1권)
이 교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외상외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대단한 소명의식이나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아무렇지 않게 표현되는 그들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다. 난기류와 폭풍우를 친구삼아 사선을 넘나드는 소방헬기를 탄다고 해서 수당이 더 나오거나 명예를 더해주지 않는다. 오버하고 쇼한다고 욕을 먹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맡겨진 일, 하고 싶은 일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시스템이 없는 곳
"선박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 했다. 욕조에서 장난감 배가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p.62)
"무슨 일입니까? 왜 강하하지 않습니까?"
"상황실과 관제탑에서 계속 경고가 들어오고 있어요!" (p.67)
당연히 이국종 교수와 그의 팀도 팽목항으로 날아갔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첫 날, 그는 기이하고 괴기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도 구조에 나서지 않던 장면. 배는 가라앉고 있는데, TV에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구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국종 교수가 직접 날아가 본 팽목항과 세월호는 시스템이 없는 비현실이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외상외과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일하며 겪는 허무와 무의미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p.107, 1권)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p.53, 1권)
미국과 영국의 선진 시스템을 이야기하면 잘난 체하면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쇼맨으로 치부되었다. 스스로가 점차 삭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다. 내가 손을 놓으면 팀원 모두에게 부담이 돌아가니까. 그들은 그렇게 10년을 버티었다. 다시금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도지사가 소방헬기를 위한 많은 금액의 지원금을 약속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다. 쏟아져 들어오는 죽기 직전의 중증외상 환자의 숨을 붙여놓아야 하고 밀려드는 행정업무와 비난을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내일 당장 이국종 교수를 상대로 인터뷰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담담하고 메마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버티고 있는 저들이 살얼음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장경원에게" (p.5 1권)
“집에 자주 가지 못하는 정경원을 위해 때마다 부인이 병원에 들어 세탁할 옷을 가져가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가끔 그의 어린아이들이 동행했다. 내가 쓰고 있던 수술용 모자를 벗어 정경원의 아들에게 씌워주었다. 아이가 신기한 듯 재미있어 하며 복도를 뛰어 다녔다.” (p.437, 1권)
정경원 교수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외상센터는 물론, 미비한 중증외상체계를 보완·발전 시켜줄 것을 기대하는 이국종 교수의 바람이 이뤄질까?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이국종 교수의 가족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다. 궁금하다.
"나는 우리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것이 허상일 뿐이어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p.312)
허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래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발이었기 때문에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여러 번 고백한다. 부유하는 말들만 많을 뿐 시스템의 중심으로는 전혀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 잔인한 바람일까?
모쪼록 그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