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전면개정판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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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선수가 귀국 했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이 그것도 한국인이 투수로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두들 박찬호를 좋아했고 그의 경기를 챙겨 봤다. 나도 강의를 빠지면서까지 구내식당 앞자리를 3시간 동안 지키며 그를 응원했었다.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엄~ 엄~” 박찬호 선수의 다른 인터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엄~ 엄~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감탄사(?) 조사(?)만 이후의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익숙지 않은 영어를 마이너리그에서부터 고생고생 하며 배운 터라 이제는 한국어를 할 때도 마치 영어 발음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응이 된 것이다. 이후 코미디언들이 우스개로 흉내 내기도 하고 일반인들도 따라 하며 웃기도 했다.

서울로 유학을 가거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나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면 꼭 서울말을 쓴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들어도 어색한 서울말 말이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어색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바로 “저렇게 어색하게 사투리를 쓸 바에야 아예 쓰지 말지~”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사람들이 내 친구의 어색한 서울말을 듣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을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새로 귀향한 신참 흑인이 그가 태어난 고장 사람들과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의 공간적 일탈의지와 튀고 싶어 하는 차별의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p.31)

 

프란츠 파농의 탈식민주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어려운 책이었다.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던 제도(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의 흑인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사실 파농은 식민지배 이후 흑인이 백인에 대해 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신체적 굴종과 찬양을 정신분석학적·탈식민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데 내가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것과는 사실 좀 달랐다.

박찬호 선수가 오랜 미국 생활로 발음구조가 한국어보다는 영어에 맞춰진 것과 내 친구가 서울로 가면서 익힌 서울말을 대구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사용하는 것에서 ‘공간적 일탈의지, 튀고 싶어 하는 차별의식의 반영’을 굳이 찾아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좀 더 새롭고 발전된 것에 의지하게 되는 것 또한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프랑스어를 구하하기 위해 일부러 튀고 싶어 식민국가의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을 압제하던 백인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된 것 또한 일반적인 경향이라 볼 수 있을까? 여기에는 다른 정치적·경제적 요인이 참견하게 된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한국도 일본에 의해 3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후에도 실제적 식민 통치는 아니지만 자주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인은 영어에 목숨을 건다. 영어만 제대로 하면, 아니 영어 유학을 1년만 다녀와도 영어학원에서 받는 월급이 달라진다. 한국처럼 미국을 좋아하는 곳이 있을까 싶다. 학문적 토양도 거의 미국 것이다. 스포츠, 문화도 미국 것에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미국에 의한 실제적 식민 지배를 받고 있지 않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유색인 동료들의 반발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p.9)

“흑인에게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백인이다.” (p.13)

 

파농은 자신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동료와 친구들, 인종을 만나 개탄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흑인의 단 하나의 운명이 바로 백인이라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음은 그 당사자 흑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농은 당시 연구의 배경이 되던 시기를 살았던 흑인들(주로 동족 흑인)이 가진 모순된 정신을 분석한다.

 

 

“내가 연구한 지역의 특성에 상관없이 한 가지 충격적인 것은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p.80)

“이런 상황에 노골적으로 걸려들면 대부분의 백인들은 십중팔구 자기 여동생을 흔쾌히 흑인에게 넘긴다. 단 하나 ‘자넨 토종 검둥이들과 다르네. 다시 말해 흑인이 아니란 말일세. 좀 검을 뿐이지.’ 라는 조건을 달면서.” (p.93)

 

파농은 더욱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동일한 형태의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은 갑중의 갑이었다. 그들의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희고, 그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된 것 자체로 갑중의 갑이었다. 마음대로 흑인을 사고 팔수 있었고 사용할 수 있었으며 유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갑중의 갑, 백인들도 흑인에 대해 성적인 면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은 흥미롭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자주 차용하는 데 억압하고 탄압하고 억누르는 그들의 행동 기저에는 무의식적으로 ‘저 검둥이는 나보다 훨씬 정력이 좋을 거야. 저 검둥이 놈이 내 아내와 내 딸을 겁탈할지도 몰라. 나보다 더 여자들을 만족시키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서술은 거의 논문의 그것과 비슷해서 읽는 것이 다소 어려웠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해석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중적·다층적 연구와 설문을 통해 결코 ‘흑인의 성능력이 백인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지 않다.’라고 소결론을 내놓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더 자극적인 것에 판단의 추를 하나 더 얹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야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기에 전체 논리의 흐름에서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놀랍도록 우아한 금발의 아이, 이 문구에는 얼마나 풍성한 평화와 축복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가! 우아한 흑인 아이, 이 문구는 비교 대상도 안 된다.” (p.252)

 

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결론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식민지배를 탈피했지만 그 식민지배에서 탈피하지 못한 개인의 인식과 행동은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강요하거나 교육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체화(體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탈식민주의를 다루는 책에서는 어쨌든 초점이 식민지배자에 맞춰져 있었다. 그들이 오만방자하게 내지른 식민정책들로 식민지를 초토화하고 식민지 국민들의 생각과 영혼을 세뇌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파농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식민국가와 백인에 대한 추종과 찬양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다. 흥미롭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항상성을 나는 소실했다. 나 자신을 절대적 시작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그리튀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그 기제를 다시 조립했다. 산산 조각난 그것을 다시 세웠다. 칡뿌리 같은 양 손의 직감에 따라 그것을 다시 구성 했다.” (p.192)

 

이러란 식민지 민중의 식민국가와 백인에 대한 의존을 파농은 콤플렉스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던 <네그리튀드>운동의 부활과 중흥을 주문한다. <네그리튀드>는 한마디로 프랑스 문화 또는 유럽 문화의 본질적 우위성을 부정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문화의 전통적 풍요를 주장하는 토착 운동이라 볼 수 있는데, 산산 조각난 그것을 다시 붙들 수밖에 없는 유색 지식인 계급의 회한이 읽히기도 한다. 이것 또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싸움이 될 텐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힘에 의존하거나 그것만을 기다리다가는 언제 우리가 식민지배를 받았는지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프랑스화(化)되어 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p.316)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아 만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만 아니라면 파농의 지적처럼 타자와 공감하고 타자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식민주의에서 그대로 머문 채 탈출하지 못한 정신적 식민지배의 지속을 끊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책임감과 죄의식에 함몰되어 있어서도 안 된다. 어쩌면 파농의 뜬금없는 지적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의 해답이 될 수도 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채 “하얀 가면”을 아무리 써도 그(그녀)는 흑인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얀 피부”를 가진 채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 하더라고 그(그녀)는 백인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고 쉬운 이치다. 나를 타자에서 설명하며 내보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흔한 일이고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해보지 않은 일이다. ‘너’를 객관화 해 ‘타자’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서야 뭔가를 이뤄낼 수 없다. 바꿀 수 없다. 그것 또한 변하지 않는 진리다.

류현진 선수가 올 시즌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귀국 기자회견을 하면서 “음~ 암~” 이라는 단어를 수십 번 쓴다 해도 나는 류현진 선수를 ‘타자’로 인식 해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 노력할 것이다. 다가 올 추석에 서울에서 내려 온 친구를 만날 텐데 그 녀석이 사용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서울말에도 타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야~ 이제 진짜 서울 사람 다 됐뿐네~ 사투리 다 잊아뿌째? 내한테도 서울말 좀 갈키도~” 라며 ‘타자’에게 용기를 북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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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her 2016-03-2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석사과정중에 이책이 있어서 유심히 읽어보았어요. 현실이랑 잘 비교되는 애기예요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쉽게 생각이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