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음모론

 

 

컨스피러시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번뜩했다. 음모,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음모론이 횡행했다. 사람들은 음모론에 열광했다. 일부에서는 음모론 열광을 넘어서 신봉, 신앙, 빠, 팬덤 현상에까지 이르렀다고 어설프게 계몽하려 든다. 나는 그들을 가장 경멸한다. 음모론의 주체가 되는 국가나 정부, 여당, 기득권, 정보기관에서 부인하고 협박하고 고소하고 고발하고 하는 것들은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음모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는 과정까지 가면 불리한 것은 그들이니까. 그런데 그런 음모론에 무작정 팬이 되고 그것에 휘둘리고 그것에 빠져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인식과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까대는 진보입네 하는 입쟁이들의 비난에는 구역질이 난다. 나꼼수 이야기다. 나꼼수가 엄청나게 큰 인기를 얻고 실제로 정치판의 지형을 새롭게 재편하기도 하고 아젠다 설정 능력을 단번에 획득하기 하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언론과 기존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 내지는 밥그릇을 뺏어 가는 폭력?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엄청나게 까기 시작했다. 2012년 대선에서 결국 선거에 패하게 되자 이 공격은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대중을 갈라놓았다. 그러게 봐라~ 그런 음모론에 빠져 있다 보니까 선거에서 지지 않았냐? 무지몽매한 대중을 음모론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책임을 져라! 지랄도 풍년이다.

그들의 논리의 핵심은 대중의 무지몽매다. ‘대중(국민, 유권자, 시민 모두를 포함한 개념)은 부유하는 존재고 계몽해야 할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자세다. 음모론만 주구장창 떠들어 내는 나꼼수로 인해 더 이상 그들의 입을 대중이 소구하지 않게 되자, 떼로 달려들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종영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진보 입쟁이들은 나꼼수와 팬덤현상을 가지고 씹고 비틀며 즐긴다. 아니, 팬덤현상의 중심에 있던 팬들이 그렇게 너희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하거나 몽매하지 않다고!! 이 양반들아! 우리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논리로 충분히 사건과 사안을 구별하고 해석할 줄 안다고!! 입만 놀리는 입쟁이들아!!

아무튼, 나꼼수가 제기한 음모론 중에서 사실로 입증된 것도 있고 여전히 음모론의 범주에 속해 있는 것도 있다.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은 제목에 컨스피러시가 들어가 있었지만 결코 음모론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내용도 어려웠다. 내가 기대하던 내용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도 있고, 미래에 화두가 될 만한 내용도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음모론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2004년 8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뉴욕 시민의 49퍼센트가 미국 정부 관료들이 ‘2001년 9월 11일 즈음에 계획된 공격을 사전에 알고도 의도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p.21)

 

 

9.11테러를 슈퍼마켓에서 지켜봤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취방 근처 슈퍼에 들렀다. 뭘 사려고 들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슈퍼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인사하던 사장 아저씨가 인사를 하지 않고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TV를 봤다. 처음에는 영화인 줄 알았다. 세계 경제 중심을 상징하는 맨하탄의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은 지극히 영화적이었다. 영화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상상 속에서,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CNN 브레이킹 뉴스를 그렇게 오래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좁은 슈퍼에 들어오는 학생들 모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9.11테러에 대해서도 뭔가 음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미국 국민이 많다고 한다. ‘진실’이라는 것이 드물게 발견되고, 그것의 힘이 어떤 것인지 모호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쉽게 마주하게 된다. 일단 재미있고, 뭔가 수상하고 미심쩍고 앞뒤의 논리가 잘 맞지 않는 일을 마주하면 아드레날린이 방출된다.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자신의 많은 신념들 간에 모종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음모론의 수용이나 거부도 대체로 둘 중 어느 쪽이 인식의 균형 상태를 유지시켜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p.39)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음모론은 늘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 음모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별로 결정할 바가 아니라는 것. 한국의 진보 입쟁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앞으로 굳이 나꼼수 같은 방송이 나오지 않더라도 음모와 음모론은 넘쳐 날 것이다. 며칠 전에 있었던 청문회에서도 총리후보자로 지명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라고 했는데, 몇 가지 증거가 나오자 바짝 엎드려 사과하지 않았나? 황우석 같은 사람의 사기사건도 일부에서는 황우석과 그의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게 하려는 집단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용과 거부는 각자의 균형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옆에서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다.

 

 

동물권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사는 아줌마가 개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개가 이를 그르렁 거리더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나를 보고 짖었다. 나는 아줌마에게 이야기했다. 공공장소에 개를 데리고 나올 때는 꼭 목줄을 하시라고. 아줌마는 알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는 말없이 자신의 개를 나무랐다. 00야! 왜 그래~ 이리와!. 개를 기르는 것은 자유다. 개를 기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자유다. 개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개가 마음대로 뛰어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일이다. 그래서 목줄을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키울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동물을 사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반려동물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런데 동물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소한 말과 개념이다.

 

 

“2002년에 독일은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란 문구를 추가해, 유럽 최초로 헌법상 동물권을 보장하는 국가가 되었다.” (p.130)

 

 

‘역시 독일이다’라고 감탄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동성애를 포괄적 인권 개념에 넣는 것조차 불을 켜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동물에게?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헌법 조문에 다섯 글자 추가하는 행위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사회적·문화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독일은 그만큼 앞서 있는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한 공동체에서의 인권은 우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육식이다. 나는 식용동물을 온당하게 처우하는 한, 육식이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식용동물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이 육식을 삼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p.139)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육식의 문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 온 인류의 패턴이다. 육식이 죄악시 되는 것도 문제다. 채식의 범위와 규정 자체에 대한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채식인지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육식을 위해 사육되고 가공되며 유통되는 동물의 환경이 처참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에서 표현된 도살장의 모습은 지금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더 많이, 더 빨리 인간에 의해 소비되기 위해 항생제를 맞고 성장 촉진제가 함유된 사료를 먹고, 최소한의 동물다운 아니, 생명체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도살되는 동물들의 권리. 논의가 되고 토론이 되어야 하는 문제다.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책임 회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연은 실로 가혹한 서식 공간이라, 많은 동물이 야생에서보다 인간과 함께할 때 더 오랫동안 잘 살아 간다. 물론 오래 산다고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동물원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는 번식 프로그램이 있고, 동물들을 잘 보살펴주며, 사람들에게 자연과 동물의 가치를 교육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동물원에 갇혀 지내더라도 인간의 도움을 받아 본래의 서식지에서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자, 코끼리, 기린, 돌고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p.142)

 

 

이런 견해도 합리적이다. TV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는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사바나에서의 추격전. 굶주린 암사자가 가젤을 사냥하기 위해 벌이는 추격전. 사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반대로 뛰기 시작하는 가젤 무리. 흙먼지. 가젤의 튼튼한 다리에서 전해지는 근육. 생동감. 같은 것들은 낭만적인 무책임이다. 살기 위해 뛰는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이다. 마침내 암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채 매달린 어린 가젤을 멀리서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비참함은 앵글에 담기지 않는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생활하는 동물이라고, 생각을 전환해 보면 저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어쨌든 동물원에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사파리 우리를 타고 넘어 가젤이 모여 있는 곳까지 찾아와 사냥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야생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사자, 코끼리, 기린, 가젤의 모습보다 동물원에서의 모습이 더 행복한 걸까? 사실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입장은 달라진다. 주장도 달라질 테고.

음모론과 동물권 말고도 여러 가지 현대 사회의 논쟁거리가 담긴 이 책, 읽을 만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문장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 문장이 어려웠다. 전형적으로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번역의 문제인가? 문장이 조금 더 쉽고, 딱딱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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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갈트의기사 2019-09-1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에 굴복하는 머슴 종자들이나 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