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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죽음에 직면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음은 어떤 것일까?’라고 자기 몸을 대상으로 실험하려는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고통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이 겪는 고통은 아프다. 병원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최신 의료기계로 겨우 삶의 시각을 연장하고 있는 중환자도
괴롭다. 며칠 째 떨어지지 않는 기침 감기로 배와 허리까지 통증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감기환자도 괴롭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이 말기 암 판정을
받으면 아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은 내 가족의 말기 암 판정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현실적 아픔과 고통과 상대적인 비교는 불가하다.
당장 내 딸아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이후 행동과 사고가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아버지가 있을까? ‘아! 딸아이가 죽을 지도 모르는구나. 이렇게 이렇게 연락하고 행동하고 이렇게 판단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지’하는 아버지는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당장 눈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에 파묻히게 된다. 지난 설
명절 내내 10개월 된 딸아이가 감기로 고생했다. 그 작은 몸뚱이에서 얼마나 뜨겁게 열이 나고,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어내고
잠을 자지 못해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하는지. 정말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병원에 다녀와도 차도가 없고 열흘을 앓더니 조금씩 나아졌다.
딸아이의 납치 소식을 듣게 된 이 소설의 주인공
헤르츠펠트는 정말 소설 속 인물이다. 그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도 문제가 있고 아내와도 문제가 있는 중이었지만 딸아이의 납치소식을 듣고 빠른 판단을
내린다. 물론, 소설에서 다 그려내지 못한 고통과 아픔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꼴에 10개월 된 딸아이의 아빠라고, 헤르츠펠트에 감정이입해
소설을 읽었다. 작가의 전작 「눈알 사냥꾼」과 「눈알수집가」를 이미 읽은 터라 기대를 가지고 몰입했다.
“딸을 잃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젠 내가 경험해야만 하겠군, 그때 자네가 증거를
조작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p.292)
작가의 전작이 그랬듯 액자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은 깔때기로
물이 모여 들 듯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의 전개가 증폭된다. 여러 가지 사건과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하나씩 풀릴 때 마다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조금 더 사건을 복잡하게 꼬고 비틀었다면 더 재미있을 텐데, 마지막까지 반전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같은
생각.
하지만 이번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연방수사국의
전 동료 마르티넥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딸아이가 납치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후회를 한다. 로또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확률을 계산하고 통계치를 분석해 매달리는 사람들이 매주 하는 후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마르티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선’이었다. 정의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내 판단으로 인해 몇 년 후 내 딸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질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일상에서 내리는 판단은 무수히 많다. 이것과 관련된 통계수치가 있었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많다. 지금 당장 저
직원에게 이 말을 할까 말까,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순두부백반을 먹을까 갈치찌개를 먹을까.
“세 건의 자살,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판사, 사형에 처해진 사디스트, 그리고 아마도 남은
인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의 딸. 그가 그때 마르티넥의 부탁을 받아들여 증거들만 위조했더라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p.433)
만약 헤르츠펠트가 동료인 마르티넥의 부탁을 받아들여
증거를 위조했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 문제다. 어렵지 않고, 위조한다고 크게 위험이 되지 않을 행동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일은 그렇다. 현실에서, 일상에서, 순간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
절대로. 그런 일은 본 적이 없다. 들은 적도 없다. 그저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무적으로 내리는 결정과 선택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한 번 내린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도로 담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전체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오.”
“그것은 모든 실종자 신고접수와 함께 수색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경찰의 문제이고... 사법 당국의 문제이고... 심리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오... 그리고 당연히 이른바 법치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법의학 기관의 문제이기도 하오. 거기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에는 범인에게나 유용한 것이고, 희생자들을 두 번 벌하는 거나 다를 바 없소.”
(p.360)
납치를 주도한 슈빈토프스키의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가 오버랩 되었다. 범죄자에 의해 가족이 죽게 된 사람들에게 <사형제도폐지>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딸아이가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같이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범죄자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음에도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시스템의 문제.
이것은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러면 피해자를 죽인 가해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해야 하나? 간단하게 분류하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처음에 언급한대로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 내 가족에게,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복잡한 문제 말고도 당장 해결해야 할 자신의 골치 아픈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그런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내
문제’가 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하고.
“그의 딸이 사법제도의 희생자로 보이는 절망에 빠진 부모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자신들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행동으로 복수하길 원했다.”
(p.409)
방법이 잘못된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한미군사훈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찬반은 물론, 여러 가지 형태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그것의 형태가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슈빈토프스키부부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이 제대로 가해자를 처벌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보고 누구보다 답답하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또 다른 아버지의 딸을 납치하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당화 하거나 인정한다면 사회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의 죽음은요? 아빠도 기름칠이 잘된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에요. 그
더러운 시스템이 잘 돌아가도록 해주는 톱니바퀴요.” (p.440)
나는 작가의 이런 면이 더 마음에 든다. 구출해낸(?)
한나가 아버지 헤르츠펠트에게 하는 이야기다. 아버지 또한 이 사회 시스템을 그저 돌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느냐?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납치되어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위협을 주지 않았다는 것. 헤르츠펠트는 딸의 스톡홀름
증후군을 의심하지만 결국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세상에 명확한 ‘선’과 ‘악’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을 구분하는 주체는 ‘선’인가 ‘악’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메스꺼움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수차례 질식할 듯한 숨 막힘에도 불구하고, 린다는
헤르츠펠트의 지시를 순서대로 따라 나갔고, 사체의 구강에서 절개한 핏덩어리 혀근육을 분리해내어...”
(p.157)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체를 해부실로 옮기도록 해요.” (p.194)
또 다른 위험에 빠진 린다는 헬고란트에 고립되었다.
그녀를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스토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시체보관소에 갇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헤르츠펠트의 전화통화로 시체를
해부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조력자가 된다. 황당할 수도 있는 사건 전개가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도 무수한
우연과 황당함이 꼬이고 꼬인 채 순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내리는 결론과 보고 있는 현실이 과거의 어느 한 시점, 누군가의
순간적이고 습관적인 판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 내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무모한 기대와 공포를 안은 채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