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우리 나라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외국 작가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 전의 이야기인 하나, 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가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였었고, 그의 또다른 책 [향수]도 꽤 많이 팔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책들 가운데....

[비둘기]와 [깊이에의 강요] 두권을 가장 좋아한다.

 

[비둘기]의 주인공은 조나단 노엘이라는 50대의 은행 경비원이다.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성공적인 삶(?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하찮을 수도 있으나, 그가 원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방을 갖는 것이었다. 그 소망은 곧 이루어질 예정이었다)을 살던 그의 일상에

우연히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면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하루 동안의 일과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하찮은 비둘기지만,

노엘에게는 비둘기는 한 공간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숨을 쉬기 힘들 만큼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 (쫓아내자면 비둘기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혐오스럽고 무섭다.) 비둘기로 인해,

그렇다고 타인의 도움을 빌릴 수도 없는 ( 흉물스러운 비둘기보다 더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비둘기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들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노엘은

도망치듯 자신이 평생 가꾸어온 안식처를 버리고 모든 짐을 챙겨 나온다.

 

여름에 겨울 외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싸고 장화를 신고.. 비둘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우산까지 챙겨들고..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노엘...

그러나, 비둘기가 점유한 층을 벗어나자 마자,  자신이 이런 모습이 남들에게 얼마마 우스꽝스럽게 보일까를 생각하고, 겨울 옷을 벗어 손에 들고 출근길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려는 사람처럼.. 애써 태연을 가장 한다.

 

그날 하루는 노엘에게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수십년 동안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은행 정문을 지켜왔던 자신이지만,

그날 아침부터는 온 몸이 가렵기 시작해서.. 점점 몸의 균형을 잡는 게 힘들어지고, 비둘기로 인해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불운한 일들을 상상하다, 은행장의 출근에 맞춰 철문을 열어주고 경례를 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쳐 버린다.

평생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였다.

그 때부터...노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종국에는 자신이 평소에 몸서리치도록 혐오했던 삶..

빈털터리 폐인이 되어 거리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 나가 순식간에 제 몸과 혼이 분리되어 버리는 경험까지 한다.

 

그가 평생토록 소망해 왔던 것,

그것은 익명성..

어디에 존재하건 남의 시선을 끌지 않고 조용히 품위있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

그걸 위해, 무의미한 일.. 은행 문 앞에 스핑크스처럼 서서..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삶을 수십년 동안이나 불평 없이 참아 왔었는데..

고작 한 마리의 비둘기 때문에 평생의 그의 모든 노력, 꿈, 희망이 다 무너져내린 것이다.

 

거의 유체 이탈 상태였던, 노엘의 영혼은

그날 저녁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배회하는 동안에, 어느 사이엔가 제 몸 안으로 들어왔다.

 

노엘은 걷기에 지친 몸을 호텔에 뉘였다가 새벽 비에 깨어..

용감한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자신의 방이 있는 건물로 돌아간다.

다행히..

 비둘기의 모든 흔적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작가는 100 여쪽 남짓의 짧은 분량안에.. 비둘기 한마리로 초래되는 노엘의 내면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 내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내면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노엘에게는 비둘기였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앞에 서면, 모든 논리적 생각이나, 판단은 사라지고 그저 도망치고만 싶게 만드는 그 무엇?

 

암튼 짧은 분량에 비해..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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