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즈음처럼 수많은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여러 재능 가운데, 멋진 제목을 잘 뽑아내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재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상투적이거나 현학적이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뻔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책의 주제와 상관없이 제목을 지을 수도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책을 제목과 첫 문장을 쓴다는 것이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에 딱 맞는 경우 일 수도 있겠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

고슴도치에서 연상되는 날 선, 까칠한 이미지와 상충하는 우아함이라는 단어의 어감에 끌려 도서관에서 모처럼 소설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책을 앞 부분과 뒷부분을 훑어보면서 지레 짐작으로 관습적으로 무지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굉장한 교양의 소유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과부 르네와 감수성 깊은 천재 외톨이 소녀의 뜻밖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혹은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책의 중반을 넘어가기까지 둘 사이에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기대 그대로 하류 계층의 평범한 수위 아줌마의 역할을 조심스럽게 연기하지만, 마음 속에 예술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 빛나는 지성으로 뭉친 르네가 자신이 일하는 고급 아파트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느끼는 단상들, 또 고작 12살밖에 안되었지만, 너무 뻔한 삶의 모습에 환멸, 혹은 무상함을 느끼고 자살을 꿈꾸는 팔로마가 성찰하는 생각들 (12살 짜리 꼬마의 생각에 성찰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좀 과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고작 늙은 혹은 나이 먹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 어른들보다는 더 삶을 성찰하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것 같다)이 교차된다.

르네는 27년동안 파리의 어느 고급 아파트의 수위 아줌마로서의 세상 사람들의 이미지에 부합된 삶을 연기하며 산다. 물론 자신의 공간안에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지성을 지니고 아름다움과 예술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에 속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마누엘라라는 친구가 있어서 종종 차를 함께 즐기고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르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 르네를 아파트의 새로운 입주자인 지혜로운 일본인 가쿠로 오즈씨가 알아보게 되면서 르네의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사람을 평가하고 단정짓는 기존 입주자와는 다르게 오즈씨는 르네의 반짝거리는 지성과 감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르네와 소통하고 싶어한다.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네덜란드 정물화를 사랑하는, 문학과 예술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는, 자신과 비슷한 공감대를 가지는 여성에게 편견없이 우정과 사랑을 느끼는 가쿠로 오즈씨를 통해 르네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또 가족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삶을 지속할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을 결심한 조숙한 천재 팔로마와 친구가 되려 한 사람도 역시 오즈씨였다.

그런 오즈씨의 등장으로 인해 르네와 팔로마는 친구가 되게 되고, 르네가 평생토록 못 배운 하층민의 삶을 연기하도록 만든 애초의 트라우마.. 누구보다 아름다웠지만 결국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다고 죽어버린 언니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팔로마 역시 삶과 사람 모두 그렇고 그런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혹은 아름답게 변주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예측 불허의 순간에 삶, 예술, 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기에  삶이란 충분히 살아갈 만한 어떤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속에 있는 '언제나'의 순간, 수많은 절망의 순간 가운데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느끼고 추적하면서 살아가리라 결심하게 된다.

 

사람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아는 것만큼 그 세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무를 100개 정도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보다는 나무를 1000개 정도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삶이 풍성하지 않을까?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닌지만, 삶의 풍성함이란 결국 경험과 인식의 풍성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읽고 나서 왜 다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팔로마의 엄마처럼... 숱한 문학 작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자랑하지만, 실제의 삶의 아름다움에는 문맹일 수도 있겠지만, 드물게는 르네와 일본인 가쿠로 오즈씨처럼 자신의 삶을 충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왜 약간의 반감 같은게 자꾸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삶으로부터 도망치듯 살아가는 두 주인공을 연결시켜주고 또 그럼에도 삶이란 충분히 아름답고 살아갈만한 것이라는 것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일본인인 것, 서양인의 눈에 비친 삶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가 일본색이라는 것, 혹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그들만의 소통과 그들만의 이해, 타인과 진정으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 급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자각 (내 딸 팔로마!!) 등등..

날선 자아 속에 웅크린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여린 영혼의 소통기라고 생각하며 읽기에는 왠지 산뜻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식하고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을 것 같은 늙은 수위 아줌마의 빛나는 지성,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고 있지만 기품있는 삶을 영위하는 마누엘라의 태도, 상류층입네 하는 사람들의 허위의식, 한 송이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통해 구원받을 타락한 영혼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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