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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저자의 이름 만으로도 어떤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작가로서는 굉장히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서모셋 몸은 그런 면에서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작가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나도 고등학생 때부터 그의 이름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 책은 그의 대표작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보다는 덜 알려진 이야기이다. (뭐, 이건 순전히 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면도날? 왜 제목이 면도날일까?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인생의 단면을 포착해낸 이야기일까? 아니면 쉽게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피부처럼 연약한 우리들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일까?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래리라는 한 미국 젊은이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한 방황이다. 특이한 점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가 더 쉬울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 작가 본인이 실명으로 등장해 자신이 고 있는 래리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래리가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래리의 진짜 마음은 무엇인지, 또 다른 주변 인물들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등등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단지 화자가 래리를 바라보는 방식대로, 혹은 그것과는 달리 래리의 인생에 대해 추측이나 해석을 할 뿐이다.
책에서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인물은 래리이다. 작가가 처음 그를 만났을 당시, 그는 호감가는 외모와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말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한 적이 있었고, 현재 아름다운 이사벨과 약혼중이었으며,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청년이었다. 래리의 약혼녀 이사벨을 비롯한 지인들은 그런 래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래리는 그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무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래리는 어떤 일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동료 조종사의 죽음이 그를 일상적인 삶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지,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인지,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래리는 계속 방황한다. 그런 래리의 방황은 이사벨을 힘들게 할 뿐이다. 이사벨은 안락하고 행복한 삶, 변화 발전하는 무한한 기회의 나라 미국 속 상류 사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였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래리와는 이상이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래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 그레그와 결혼한다.
래리는 이제 더이상 이사벨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자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자 세상 속을 배회한다. 수많은 책들을 파고 들어 인생의 답을 찾으려고도 해 보고, 광부로 살면서 육체를 써서 사는 노동자의 삶을 경험해보기도 하다가 결국 인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의 몇 년의 삶은 래리를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만난 래리는 이전의 래리가 아니라, 자신 안에 충만한 존재를 느끼는, 동양에서 말하는 기준으로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어 있었다. 내면의 평화가 충만한, 그래서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그런 래리는 세상 속에서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물론 래리다. 특별히 눈에 뜨지 않는 것 같지만, 공기처럼, 물처럼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지닌 사람!
래리와 소피이 이사벨의 잴투와 교묘한 훼방(?)으로 인해 맺어지지 않았지만(원래 인생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 둘의 관계가 제일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잃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인생을 망쳐버린 소피를 아마 래리는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피의 드러난 삶을 보지만, 래리는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과 자신과 더불어 시를 이야기하던 소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소피가 이사벨이 파 놓은 술의 함정에 빠져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인생이 다르게 진행되었을텐데.... 이사벨은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버린 래리가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소피와 결혼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순간의 우리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좌우된다. 인생의 진지한 목적을 찾고자 하는 목적 하의 일관된 래리의 선택은 후회 없는 삶을 그에게 선물했을 테지만, 과연 책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까? 특히 이사벨은 후회없은 삶을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