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에 걸쳐 서점 갈 때마다 조금씩 읽던 책인데, 드디어 다 읽었다.  

(함풍제, 동치제 등의 황제 이름과 태평천국의 난이 중간에 등장하는 걸 보면) 시대적 배경은 청나라 말기 정도 되는 것 같고, 공간적 배경은 중국 후난성 근처라고 하는데, 거기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리와 그녀의 라오통(평생토록 지속되는 절친(?) 정도라고 해 두자)인 설화의 인생 이야기를 죽음을 목전에 둘 만큼 늙어버린 나리가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는 두 세 가지 풍경을 만난다.  

첫번째가 전족이다. 전족은 여자 아이의 발을 어려서부터 꽁꽁 싸 매 놓는 것이란 것과 그 이유가 중국은 여자가 귀했기에 여자가 쉽게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과 손바닥 만한 발을 가진 여자가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이 관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주인공의 처가 전족을 하지 않아 커다란 자신의 발을 수치스러워 하는 장면이 나왔다.  

두번째는 라오통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의자매로 번역했는데, 말하자면 서로 궁합이 맞는 여자 아이들이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듯 정해진 날에 우정을 맹세한, 평생 서로를 아끼고 지켜주는 특별한 친구를 말한다. 그래서 라오통은 서로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어떤 면에서는 남편이나, 가족보다 더 소중하고 더 친밀한 존재를 말한다.   

라오통간이 되면 평생 서로에게 헌신하면서, 누슈라고 불리는 여인들만의 문자(어려운 한자를 간략하게 부호로 표현한 듯한 걸로 봐서 이두나 일본의 히라가나 같은 형태의 문자일 거라고 추측했다.)로 부채에 편지를 적어서 서로 주고 받는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궁녀들끼리만 쓰는 궁서라는 서체가 있었다고 하니까, 뭐, 거기 여자들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글을 써서 주고 받는다는 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마지막으로는 여자들의 거주 공간이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들의 거주 공간이 바깥 사랑으로, 여자들의 거주 공간은 안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중국 후난성 부근은 여자들의 공간은 2층으로, 남자들의 공간은 아랫층(1층)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여자들의 온갖 내밀한 이야기나, 사연들은 다 2층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런데, 중국의 주거 문화를 알지 못해서, 여자들의 공간이라는 2층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 복층 아파트 구조랑 비슷하려나?? 

이 소설은 나리라고 불렸던 여인의 평생에 대한 독백, 내지는 회고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가난한 농천의 별 볼일 없는 집안에 더더군다나 별 볼일 없는 딸들 중 하나인 나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끝에 금련이라고 칭송 받는 아름다운 전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중매장이의 소개로 설화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또래 소녀와 라오통 관계를 맺게 되고, 또 근방의 부유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부유하고 귀티 나는 설화와 라오통인 것을 나리는 자랑스러워하지만, 사실 설화네 집은 몰락할 데로 몰락한 처지였다. 아버지는 아편쟁이였고, 어머니는 너무 귀하게 살아와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처지였다. 중매장이는 자신의 조카가 창녀나 노리개로 팔릴 것을 염려해, 부잣집 며느리로 내정된 나리와의 라오통을 주선한 것이었고, 나리가 설화를 통해 부잣집에 어울리는 소양을 배워간 것처럼, 설화도 나리네 집에 왕래하며 여자들의 막일을 배워온 것이었다. 예정대로 나리는 부잣집 맏며느리가 되었고, 설화는 천대받는 백정의 아내가 되게 된다.  

시집에서는 천한 백정의 아내와 라오통 관계인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그녀들은 어릴 적 약속 그대로 지위나 신분에 관계 없는 우정을 지속한다.  시부모와 남편을 잘 시봉하고, 손아랫 사람들을 잘 다독이면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가진 맏며느리로서의 존중받는 삶을 살아가는 나리는 설화가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항상 그녀를 돕고 싶어 한다.   

 곱고 아리따운 설화가 무식하고 드센 백정의 아내로 살아가기란 원래부터 고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백정의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데다가, 병약한 아들과 쓸모 없는 딸만 줄창 낳거나, 아니면 계속 아이를 유산만 해 대는 설화를 남편과 시어머니는 용납하지 못하고 학대한다. 설화는 누슈를 이용해 나리에게 자신의 삶을 종종 하소연하고 그럴 때마다 나리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이용해 설화를 그들의 학대로부터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설화와 나리 사이에는 점점 틈이 생기게 된다. 서로의 환경과 처지가 다르다보니 설화는 귀부인이 된 나리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에게서 더 위안을 받는 듯 보이고 나리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와 배신감에 시달리게 된다. 평생  남편보다 더 소중하게, 더 진실하게 대했던 친구가 자신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자들에게 더 의지하고 그녀들과 의자매를 맺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리는 격분한다.  

자신들의 딸을 다시 라오통으로 맺어주겠다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모든 약속과 맹세를 설화는 폐기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많은 여자들 앞에서 나리는 설화를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결함있는 며느리, 라오통인 자신의 배신하는 친구, 아편쟁이의 딸, 남편과 성관계에만 탐닉하는 색녀 등으로 매도해 버린다. 존중받는 마나님인 자신의 말로 인해, 설화는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낙인 찍혀 버리게 되고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 평생토록 사랑했던 라오통 나리의 외면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설화의 비극적 죽음 뒤에 비로소 나리는 설화가 평생 라오통으로써 자신에게 헌신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오통인 자신은 힘든 삶에서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바랬던 설화에게 튼튼한 아들을 부지런히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인정 받으라며 끊임없이 몰아 붙였지만,  이웃 여자들은 고통받고 아파하는 설화의 옆에서 그녀를 돌보고 위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사이엔가 나리는 설화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거만하게 때때로 베풀고 때로는 충고하면서 설화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해 왔던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자 이 평생토록 가장 사랑했던 존재를 상처주고 힘들게 하고 결국은 고통 속에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나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책에서 이야기 하는 주제가 무엇이었을까?                                                                       힘든 시대를 살아간 두 여자의 우정?  혹은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글로 표현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불러 일으키는 오해로 어긋나 버린 관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제일 와 닿는 이야기는 동정과 공감에 대한 것이다.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동정하는 것과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것은 참 다르다. 물론 두 가지다 인간의 따뜻한 본성의 발로겠지만, 동정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공감이란 같은 눈높이에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동정이 아니라, 공감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감정인 것 같다. 설사 나와 생각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입장이 다르더라도, 먼저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텐데..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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