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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보다 긴 하루 ㅣ Mr. Know 세계문학 14
칭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로제끄는 거대한 스텝 중간 어디엔가 있는 화물열차만이 간간히 정차하는 간이역이다.
그런데 스텝? 스텝이 뭐지? 책을 읽으면서 거대한 사막, 혹은 목초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면 사막인데, 사막이라고 하기엔 책에는 너무도 빈설하게 폭설과 추위가 기승을 떨치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도대체 거기가 어딜까? 하는 생각에 방금 스텝을 검색해 보았다.
스텝은 헝가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를 지나 중앙 아시아와 만주까지 뻗어 있는 대상의 넓은 초지라고 한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않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예지게이도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피폐해졌을 때, 우연히 만난 까잔갑을 따라 이곳 사로제끄의 부란니 간이역에 정착했다. 거대한 불모지를 오가는 철로를 손보는 철로 노동자로의 삶은 고되고 척박했지만, 그 안에서 맺어진 탄탄한 인간 관계 덕분에 예지게이와 그의 아내 우꾸빌라는 이곳에서 삼십여년을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평탄하게 살아왔다.
무슨 공상 과학 소설 마냥 외계인과 접촉하는 두 우주인 이야기와 그것에 당황해서 자기 보호에 급급한 미/소 양대 진영의 이야기가 섞여들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줄거리는 예지게이가 그의 오랜 동료인 까잔갑이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을 그의 평소의 바람대로 부족 전통의 묘지인 아나 베이뜨로 매장하러 가면서 하루 동안에 겪는 여정이다.
더 이상 전통의 가치나 신을 믿지 않는 젊은 아들이나, 술주정뱅이 사위등과 함께 까잔갑의 시신을 모시고 낙타를 타고서 사로제끄의 황야를 횡단하며 아나베이뜨 묘지를 향해 가는 동안 예지게이는 순간 순간 자신의 삶에 아른다웠던 순간, 혹은 가슴 아픈 순간,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가슴 아픈 기억, 아부딸리브와 그의 가족들...
전직 학교 교사였던 아부딸리브는 전쟁 포로였다가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한 이력 때문에 직업을 잃고 하층민 생활을 전전하다가 비참한 처치가 되어 부란니 역에 흘러들게 된다. 예지게이는 그를 보면서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들이 자신처럼 부란니 역에 정착해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배운 사람임에도 어울리지 않는 막노동을 하면서 힘들게 살지만, 아부딸리브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금방이라도 부란니 역을 떠날 것 같았던 아부딸리브는 점차 예지게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광대한 자연의 힘과 몇 안되는 이웃이지만, 이웃 간의 따뜻한 정과 배려 덕분에 점차 건강과 행복을 회복해 간다.
예지게이와 아부딸리브 가족은 점점 한 집안처럼 서로를 오가고 염려하고 서로 아껴주면서 부란니역에서 최고로 행복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숙청과 밀고가 판치던 그 시절은 아부딸리브를 비켜가지 못했고, 단지 아이들을 위한 회고록과 까자흐의 구전 문학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아부딸리브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버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을 돌보던 예지게이는 그의 아내를 향한 절망적인 사랑에 빠져버린다.
평생의 그리움으로 남은 여인, 그리고 평생의 아픔으로 남은 그의 벗 아부딸리브!!
또 한 가지의 이야기는 만꾸르뜨에 대한 이야기인다. 먼 옛날 부족 전쟁이 여사로 이루어지던 시대에 추안추안족은 상대부족을 사로잡으면 그의 머리를 박박 밀어서 거기에 갓 도려낸 암낙타의 유방을 쓰워서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사흘 이상 사막에 방치한다. 사막에 던져진 사람은 뜨거운 열기로 점점 머리를 옥죄어오는 낙타가죽 때문에 점차 뇌가 말살되어 살아남더라도 더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극심한 고통으로 모든 기억이 말살되어 버리고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는 주인에게만 반응하고, 인간으로서의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가축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노예를 만꾸르드라고 불렀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최고의 폭력이 그런 것일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통제할 권리는 없으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물신주의/ 성장 제일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낙타 가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줄 소중한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모습들, 후손에 물려줄 보존 가치에 대한 생각 없이 마구 파해쳐지고 있는 우리의 강과 산들.. 그리고 광장에 모이기만 하면 기겁을 하고 달려드는 정권들...
생소한 분위기의 소설이었지만,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책에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외계인과의 접촉 이야기가, 서로 공존을 위해 화합하지 못하고 기득권 유지와 체제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의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다.
광대한 초원을 기차는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쉴 새 없이 오가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도 계속 이어질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