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공포 영화는 그야말로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간신히 눈만 드러내며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꽤 즐기는 편이다. 특히 피가 난무하고 신체의 일부분들이 여기 저기 뒹구는 고어 장르를 좋아한다. “취향 참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  한마디로 〈주온〉같은 영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제대로 못 보지만, 〈새벽의 저주〉,〈랜드 오브 데드〉같은 영화는 낄낄 거리며 본다. 변태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좀비 영화를 특히 즐겨 본다. 좀비 영화의 옛 고전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나는 전설이다〉까지 어지간한 놈들은 다 본 듯하다. 좀비 영화의 매력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좀비들을 헤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아, 쟤는 주인공인 것 같으니 웬만해선 살아남겠군.” 하고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되기도 하지만, 의외로 죽지 말아야 할 캐릭터가 일찍 가고, 허접스러운 캐릭터가 엔딩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쏠쏠한 묘미다.

모두가 좀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세계의 마이너리티이자 모순이 된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선 좀비가 정상인 것이다. 당연한 이치.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렇다면 어떤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끔찍한 악몽은 우리가 그렇게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성과 존엄, 고결함이 사실 모래성과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모래성을 쌓으며 인간은 스스로 만족해하고 스스로를 고결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어처구니없는 오만과 과신이 기실 하찮은 것임을. 소설은 그대로 보여준다. 불편하지만, 쉽사리 끝장을 보기에도 두려운 마음이다.

내가 좀비 영화를 즐겨보는 이유는, 물론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자각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명이 발달하고, 잘 산다고 자부하는 사회 또는 국가일수록 순식간에 타인을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점,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사회, 또는 국가. 그것은 학살을 부르고, 배제를 낳으며, 망각과 무관심을 강요한다. 독일 나치에겐 유태인 민족이 좀비였으며, 미국에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그것이었던 것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는 자신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악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사라마구가 ‘의사의 아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물론 인간성의 회복, 또는 인간 본연의 고귀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은 한없이 고통스러워 보였고, 자신이 그러한 고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절망한다. 혼자인 그에게는 분명 너무나 힘든 과제였던 것이다.

‘눈’은 무엇일까. 우리는 눈을 통해 자신의 외부를 인식하고, 그것과 소통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니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것일까. 아님 누군가가 강요하고 계획해 놓은 그 어떤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한다. 삶은 어찌 보면 소유와 버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림보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닌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갑자기 당신이 눈이 멀어버린다면 지금껏 당신이 소유한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아름다운 연인, 비싼 집과 자동차, 넓은 땅, 상당한 금액의 재산 등 그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로 다가올까. 세계 최고의 갑부이든 일용직 노동자이든 일단 좀비에 물리게 되면 같은 좀비로 변해버린다.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도 그가 과거에 무엇이었든 모두 눈이 멀어버리고, 모두 동물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그가 얼마나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설을 중간 쯤 읽다가 동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엄연한 반칙이었지만, 갑자기 영화를 먼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다음 나머지를 읽어 나갔다. 영화는 생각 외로 원작의 의미를 살리려 많이 노력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짧은 영화 속에 옮기는 과정에서 최대한 흘리기를 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을 먼저 보라는 말은 유치하니 하지 말고.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눈을 뜨고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반쯤은 모두 눈이 멀었는지 모른다. 빤히 보이는 것을 애써 못 본척하고, 혹은 꼭 봐야 하는 것들을 덮어두고, 더러운 것들에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세상 자체가 그리 깨끗하지 못하기에 우리 탓만을 할 수도 없지만 당당하게 나 잘났다고 하기엔 역시나 부끄러운 지금이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아직 적지 않은 이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전히 눈 떠 있는 이들로 인해 우리는 그나마 걸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억지로 눈을 감게 만드는 지독한 세상에서 온전히 눈 뜨고 살아가기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의사의 아내’가 없었다면 소설이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난 의사의 아내가 결국 촛불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한다.

좀비들이 설치고, 그 좀비를 조종하는 더 사악한 집단들이 웃는 지금,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암흑세계에서도 촛불을 밝히고 있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쯤 눈먼 나로서는 그런 고마운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돕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도울 수 없다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자의 마지막 염치일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봐야만 할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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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09-06-1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문부식 지음 / 삼인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을 계발하고 자유의 깃발 아래 떨쳐 나설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애틋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5월은 또한 가슴 무너지고 애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09년 저는 또 하나의 아픔을 5월에 묻어야 했습니다. 역사가 훗날 모든 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가장 혐오하는 저이지만, 과연 후세의 역사가들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무어라 말할지 한없이 두렵고 무참하기만 합니다.

1980년 5월 저는 막 4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해 5월 광주의 함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이른 바 의식 있는 친구 녀석이 몰래 건네준 광주 관련 영상물을 볼 수 있었는데요. 늦은 밤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상을 보다 무섭고, 무참하고,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영상은 독일의 기자들이 광주에 들어가 촬영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다시 편집하여 광주의 참상을 모르는 국민들을 위해 배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 영상물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요. 저는 그 영상물을 도저히 혼자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학교에 다시 가져가 친구의 약속을 어기고 영어 교육을 위해 만들어놓은 시청각실에서 상영하기로 마음먹었죠. 당시 전교조에 가입하신 선생님 한 분이 도와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저에게 당시 그 영상물을 본 친구들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부에 끌려가 “너 전대협에 관련되어 있느냐”는 협박성 취조를 당했던 기억만 나네요. 그 전까지 이른 바 반공사상에 철저히 함몰되어 있던 저를 깨워준 소중한 취조였다고 기억합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광주의 참상을 그대로 담았던 영상물과 영화의 장면들이 겹치면서 영화의 어느 장면의 다음 장면이 사실은 어떠했는지 떠오르며 치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영화라는 모습을 띠었더라도 사람들에게 광주를 다시 기억하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럽게 느꼈습니다.

책의 저자는 부산 고신대 신학과에 다니던 1982년 부산의 미국 문화원에 방화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건으로 1명이 목숨을 잃었고, 저자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죠. 하지만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6년 9개월만인 88년 12월 석방됩니다. 그는 다시 1989년 ‘한미문제연구소사건’으로 구속되는데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1991년 만기 출소합니다. 그 후 95년부터 출판 일을 하기 시작한 저자는 도서출판 삼인의 주간과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첫 에세이집입니다.

80년 5월 광주의 불꽃이 군홧발과 총칼로 짓밟힐 때, 광주를 제외한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광주를 응원하거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 떠들었고, 이에 격분한 광주시민들은 방송국을 불태웠죠. 광주 시민들이 그냥 죽을 수 없다며, 예비군 병기고를 습격해 얻은 무기로 공수부대와 싸워 광주를 지켜냈을 때, 그리하여 광주가 잠시나마 해방구가 되었을 때, 언론과 정부의 모략과는 달리 광주는 무법천지가 아니었습니다. 단 한 건의 범죄, 사소한 절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순결했고, 때문에 더욱 무참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80년 5월의 광주를 단 2년 만에 모든 국민들이 잊어간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광주의 비극을 방관하고, 오히려 전두환 정권에게 협조까지 한 미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일었습니다. 때문에 저자는 광주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과 철저히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해가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미 문화원에 방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1명의 생명이 숨졌습니다.

책은 총 9개의 글로 이루어집니다. 광주에 대한 기억, 그리고 남겨진 자에게 다시 남겨진 광주의 기억, 용서에 대한 성찰, 국가의 폭력과 야만에 대한 국민들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며 저자는 자율적 개인의 연대를 꿈꿉니다. 그는 그 어떠한 고귀한 이상이나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단 한 명의 생명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자신이 이상이라 믿었던 신념 때문에 하나의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는 대의를 위한, 혹은 정의를 위한 희생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러한 희생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혹은 불가피한, 흔히 미국이 말하는 ‘부수적 피해’로 치부하기 시작한다면 이른 바 ‘절대선’, ‘절대악’이라는 이분법의 지옥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저자의 뜻이 온전히 이러한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서울광장을 명박산성으로 막아놓은 경찰, 즉 공권력을 미워할 수는 있어도 버스 앞에 처량하게 서있는 전․의경 개인을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한 것을 두고 “전경들이 실수한 것”이라는 비겁한 말로 자신들의 부하들을 팔아먹는 꼴을 보셨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의 인심까지 잃어버립니다. 국민들에게 버림받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모양이지요.

저자는 말합니다.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을 민주화운동을 한 국가유공자로 인정한다고, 또 망월동 묘지를 성역으로 조성하고, 해마다 5월이 되면 국가 통치자들이 찾아가 묵념을 드린다고 진정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하고. 국가의 의해 저질러진 폭력을 희생자가 아닌 국가가 먼저 처벌하고 다시 용서하고 기념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하고. 물론 국가의 의해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 국가는 사과를 하고 희생당한 분들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보상을 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하지만 먼저 광주의 비극이 왜 일어났고, 그 과정은 어땠으며, 당시 나머지 국민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침묵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떠한 마음이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가족들, 그리고 관련된 모든 분들이 먼저 용서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모든 국민들의 진정한 참회와 성찰이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요.

국가는 광주의 기억을 애써 뒤로 넘기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게 치르지 못했습니다. 국민들 역시 광주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고 단지 때가 되면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그것이 저자는 안타깝고, 서글픈 것입니다. 여기에는 오랜 기간 이어져온 우리의 국가주의가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의 정체성 보다는 국가라는 테두리에 모든 이들을 몰아넣고 마치 개개인 모두가 국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저자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디에 살고 있건 국가에 속해 있는 한 국민이 아닐 도리는 없다. 그러나 만일 한 개인이 국민 외에는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없고 아무런 정체성도 가질 수 없다면, 바로 그런 사회를 일컬어 전체주의 사회라 할 것이다. 조세 저항이 거의 없는 나라, 국민 통제를 위해 주민등록제를 바꾸려 할 때 거의 모든 국민이 단기간에 달려가 일사불란하게 지문 날인에 응하는 나라, 국가 안보를 위한 일이라면 교도소에 갇힌 죄수도 영치금을 털어 모금 운동에 참여하는 나라, 비로 이런 나라가 광주항쟁으로부터 20년이 지난, 군사 정권이 물러가고 두 번의 민간 정권의 ‘개혁’실험을 거치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 88~89pp

광주의 불꽃이 꺼졌던 그날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국가주의라는 가면을 벗었을까요. 국익이라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고통과 절규를 외면하지는 않았을까요.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 그리고 택배비 30원을 인상해달라고 외치다, 숨져간 화물연대 박종태님.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허망한 삶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 아직도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용인되고, 그 불의 앞에 숨죽이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 자신을 학대하여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분명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처럼 분명 읽고 나면 불편하고, 가슴 아플 것 같은 책들을 섣불리 들추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들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주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똑똑하고, 주위의 벗들이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멀기만 해 보이는 국가보다 몇 배 더 소중한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고 생각 정리가 서투른 제가 이 책을 다 소개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따릅니다. 슬기로운 님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아, 맨 앞의 구절은 체 게바라의 말입니다. 그냥 요즘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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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09-06-04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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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작품을 접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리고 그만큼 여러 가지 소회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그야말로 대책 없이 거꾸로 가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이러한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때론 당혹스럽고, 무참하고,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이 역시 감당해야 할 몫이리라.

통일이 된 이후의 한반도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많은 이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상상했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잘못을 떠나 결정적으로 외세의 장난질로 인해 분단된 땅에서 태어난 이유로 난 지옥 같은 악몽을 여러 차례 꾸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꿈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가까운 미래를 본 듯 떨리곤 했다.

그랬다. 통일은 나에겐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처음으로 진중하게 책을 넘기던 시절부터, 처음으로 부조리의 아픔과 그 상처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통일은 우리 민족의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사무치게 느끼면서도 막상 통일이 이루어진 그 다음을 상상하기는 두려웠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시대는 그처럼 통일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한 악몽을 현실적인 미래로 바꾸어 온 것이 지난 10년간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바쳐가며 이 상처받은 땅을 다시 이으려 노력해왔다. 그 분들의 피와 눈물이 없었다면, 그나마 지금의 모습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혹자들은 말한다. 국제적 정세의 변화가 남북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통일일군들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 많은 이들이 통일을 위해 땀과 눈물을 쏟고 있다.

소설은 어둡다. 희망을 모두 버리자는 말은 하지 않지만, 그 희망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는 역시 장담하지 못한다. 이미 미쳐버릴 대로 미쳐버린 남한과 역시 온전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북한의 결합. 그것을 저자는 재앙으로 묘사한다. 악몽으로 묘사한다.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지독한 수렁. 그것이 바로 통일이다.

줄거리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댄 브라운 스타일의 빠른 스토리 전개와 스릴러,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흥미로운 전개는 페이지를 쉽게 넘기게 만든다. 하지만 그 빠른 전개 속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허투루 담지 않는다. 때론 은유적으로 때론 직설적으로 쏟아버린다. 그것이 과연 누구를 향한, 어디를 향한 외침일까. 어쩐지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길지만 다음의 구절을 인용한다.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대한민국에는 우파도 없었고 좌파도 없었어. 대한민국은 그래. 없는 것 있다고 우기는 게 대한민국이야. 안 그러면 그건 대한민국이 아니야. 우파가 뭐냐? 우파의 궁극적 목표는 애국이야. 애국. 이렇게 애국 안 하는 우파들이 어딨어? 오죽하면 일본 극우 애들이 자기네 역사관을 표절하지 말라고 걔들한테 화를 다 내냐? 좋아. 욕해야 되니까 까짓것 우파가 있다고 치자. 마땅히 우파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들을 엉뚱한 놈들이 대신하면서 뺑이를 치잖아. 그러면 우파들이 그걸 또 가만 놔두지 않고 달려들어 탄압을 해요.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잖냐. 나라와 민족이 작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으니 나가서 용감히 싸워라. 언젠가 힘을 되찾으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은 너만이 아닌 네 후손에게까지도 꼭 보답하마. 이런 게 있어야 제대로 된 우파의 국가인 거야. 독립운동? 야, 이젠 더러워서 지나가는 개들도 안 하겠다. 친일파 문제는 어리바리한 시민 단체나 경로당보다 못한 역사연구회에서 정리하는 게 아니야. 진정한 우파들께서 손수 해 주셔야 하는 거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걔들은 몰라. 왜? 우파가 아니거든.

좌파? 이것도 욕해야 되니까 일단 있다고 치자. 걔들처럼 지독한 장사꾼들이 세상에 또 없어요. 나는 걔들이 잔대가리로는 더 재벌 같아. 우파들은 무식해서 간단하기라도 하지. 걔들은 엄청 복잡한 속물들이에요. 남한의 좌파는 낭만주의였어. 청춘의 아련한 추억이고. 자아도취지. 억울하다? 야, 성경 말씀에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뭔지 안다고 했어. 걔들이 나중에 온갖 분야에서 한자리씩들 해 처먹고 한 일들이 뭐가 있어? 자기들 배불리고 어디 가서 축사나 읽어 대고 술자리에서 골 빈 년들이 어머, 선생님 정말요? 그러는 거나 즐기면서 마치 고독한 척 어른 행세한 것 말고 뭐가 있냐고. 진짜 사회주의자는 말이야. 제 애비가 정주영이라고 해도 사회주의자인 놈이어야 해. 어디 있냐? 그런 놈이. 나한테 연락 좀 부탁한다고 그래라. 통일 이후에도 그래. 좌파들이 이북 노동자들한테 하는 소행들이 어떠냐? 방금 뉴스에서도 함경도 아저씨 하나 천국 갔잖아. 또 우파들이 누구냐? 통일 전에 그렇게 북한 인권을 들먹이던 사람들 아니냐. 그걸 걸고넘어지면서 식량 원조에 반대하던 양반들이 아니냐고. 뭐냐? 통일이 되고 나니까 이북 사람들 바로 왕따시켜 버렸잖냐. 통일 전에 우파들은 북한 사람들을 걱정했던 게 아니라 그들에게 공으로 퍼 주는 게 아까웠던 거야. 좌파들은 동포애를 주둥이로만 나발거렸을 뿐 막상 옆집에 이북 사람들이 살게 되니까 너무 좆같은 거고.” - 153~155pp

우리는 북이 핵을 개발하여 전 세계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핵 한 두 개로 마치 자신들이 세계의 커다란 위협이 되는 양 떠들고 있긴 하다. 하지만 남한을 포함하여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거나 개발할 능력이 북한보다 월등이 뛰어나다. 미국과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는 말 그대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무기의 전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북이 만에 하나 손담비가 되어 미국 본토나 일본 등에 핵을 날린다면 그것은 곧 자신들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지게 만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으로 북이 그걸 모를까? 그리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 그걸 모를까. 진정 북의 핵이 두렵기는 한 걸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이다. 다르다. 우리는 바로 코 앞 아닌가.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북한의 위협에 대해 신중히 분석하고 대처하려 했던 적이 얼마나 되는가. 눈눈이이가 아니었나?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있기 전 김영삼은 김일성이 사망했는데도 김정일에게 공갈을 퍼부었다. 덤비라고. 아비가 죽었는데, 아들한테 “고소하다. 너넨 끝이다. 백기 들고 나오든가 뒈져라.”라고 한 꼴이다. 덕분에 한반도는 전쟁의 바로 5분 전까지 갔었고, 우리는 그의 말대로 뒈질 뻔 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지금은 또 왜 이러고 있을까. 그 대답은 소설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하지 않는 세력들이 아직 살벌하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보다는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 더욱 더 쉽고 또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이 위에 있고, 한반도 정세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자신들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세력이 변화의 모습을 보여도 웬만해선 꿈쩍하지 않는다. 일단 버티는 데까지 버티는 것이다. 그 사이에 통일은 악몽이 되고, 그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우파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승만은 한국 전쟁이 터지자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도망갔다.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 말라고, 집을 지키라고 말하고 자신은 튀었다. 시작부터 그랬다. 그게 역사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겠다. 그는 북한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한다. 통일 이후의 한반도를 어둡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전의 현재 우리의 꼬라지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따위로 살아가면서 무슨 통일을 떠들고, 무슨 한반도 평화를 나발대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감이다. 그의 소설에서 아쉬운 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그 말은 동감이다. 우리는 아직 통일을 떠들 자격이 없는 종들이다.

자칭 민주주의 국가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암담하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억압받고, 언론의 자유 역시 옛 말이다. 이른 바 공안정국이 이어지고 있고, 검찰과 경찰 등 국민들을 지켜야 하는 권력들이 오히려 정부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이미 너무나 오래다.  

통일운동단체들이 순간 이적단체가 되고, 빌어먹게도 지겨운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집권당은 경찰이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가방을 뒤지고, 신분 확인을 위해 DNA 조사를 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꾼다고 거품을 문다. 얼굴에 마스크만 써도 잡아간다. 집회 근처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목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했다고 연행됐다. 지나가던 일본 관광객도 쳐 맞았다. 그게 다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란다. 자신들의 안녕이란 말은 죽어도 안 한다. 그게 아니란 건 몰래 대출 조회한 봉식씨도 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지만, 그나마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보여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과연 그 누가 지금 상황에서 장밋빛 통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생각은 들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이 소설의 존재 가치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곳에서 문익환 목사의 글이 보였다. 시라고 할 수도 있고, 제목 그대로 잠꼬대라고 할 수도 있다. 읽다가 울컥해진다. 지금의 상황을 문 목사님이 보셨다면….

저자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러고 싶다. 하지만 심히 어려운 시대다.

문 목사님의 글을 옮기며 마친다. 한잔 술을 찾아봐야겠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 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구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구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구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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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흔히 이 책과 같은 산문집이라 하면 이름 있는 작가들이 의례적으로 한두 권씩 내는 뭐 그런 것으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소설이나 뭐 그런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쉽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별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모아 산문집이네 에세이네 해서 펴낸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책을 읽기 전에 조금은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얼추 비슷한 시기에 김훈의 《바다의 기별》도 발간돼 더욱 그런 생각이 든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에세이, 산문집들이 작가들의 이른 바 ‘명성을 이용하여 쉽게 돈 버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산문, 에세이에 대한 이런 편견이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수준 미달의 작품들이 그동안 적지 않았고, 거기에 독자들이 일정한 짜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히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나는 파울로의 작품 중 고작 《연금술사》만 읽었을 뿐이다. 고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백분의 일도 논의할 자격이 없다. 그가 독재에 싸운 민주화 투사였다거나, 락 음악에 심취해 직접 밴드를 결성한 적도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온전히 이 책에 대한 감상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아직 김훈의 책을 읽지 못했다. 책을 투명한 비닐로 포장하지도 않았으니, 읽으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주변을 보니, 그리고 인터넷의 수많은 고수들의 평가를 보니 김훈의 책이 파울로 만큼은 못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인 듯하다. 아직 내 스스로 읽어보지 못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우선 프롤로그을 읽다 킥킥거리며 웃었다. 파울로는 15세 때 자신이 작가가 되겠다고 어머니에게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작가가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작가가 되겠다고 그러냐며 반문한다. 여기에 파울로는 나름대로 작가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조사를 하게 되고 결론이 나온다. 결론은 총 8개이다. 얼추 요약해보면,

1.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를 빗는 법이 없다. 늘 화를 내거나 우울하거나 둘 중 하나다.

2.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따분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동시대인들에게서 이해받는 건 천재로 간주될 기회를 송두리째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한다.

3. 작가의 말을 이해하는 건 동료 작가들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남몰래 동료들을 경멸한다.

4. 작가라는 사람은 기호학, 인식론, 신구체주의 같은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명사에 조예가 깊다. 누군가에게 겁을 주고 싶으면 이런 말을 들먹이면 된다. “아인슈타인은 바보야”, 혹은 “톨스토이는 부르주아의 광대였어”.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아니꼬워하면서도, 그 자리를 뜨자마자 상대성이론은 엉터리이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귀족사회의 옹호자였다고 떠벌리게 될 것이다.

5.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네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

6. 작가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비평을 한다. 그는 비평가로서 동료들의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가 쓴 평론이 반은 외국 작가의 인용구로, 나머지 반은 ‘인식론적 단락’이니 ‘융화된 2차원적 삶의 비전’ 같은 표현 따위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감탄할 것이다. ‘참 똑똑한 사람이야!’ 하지만 막상 책을 사기는 꺼린다. 인식론적 단락 앞에서 쩔쩔 매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7. 작가는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늘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을 댄다.

8. 작가와 그 동료들에게 한결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책은 세상에 단 한 권 뿐이다. 비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이 작품을 깎아내리는 작가는 없다. 하지만 책 내용을 물으면 횡설수설한다. 정말로 그걸 읽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푸하하하~! 앗. 나만 웃긴가. 물론 위의 8개 항목이 우리 문학계에 모조리 다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 부분 겹치지 않을까. 온갖 어려운 말로 작품을 해부하여, 나름 재미있게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넌 작품의 반의 반도 제대로 읽지 못한 거야, 이 바보야~”라고 잘난 척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도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정말 밥맛없다. 그림을, 음악을 그리고 모든 예술 작품을 그것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암튼 파울로는 이렇게 나름 철저히 준비한 조사 결과를 어머니에게 들이밀며 작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어머니의 말씀.

“차라리 엔지니어가 되는 게 쉽겠구나. 게다가 넌 안경도 안 쓰잖니.”

어머니의 꾸미지 않는 재치가 파울로에게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꼭 파울로가 아니더라도, 아니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가 조금 심한 편인데, 독자들에게 어떤 교훈 내지 감동을 주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이 역력한 산문집이나 에세이들이 많다. 특히 정치인들이 쓴 책들은 더욱 그 정도가 심하다. 약간 과장하면 독자들을 훈계하고 교육하려 든다. 감히 비싼 돈 주고 책까지 사줬더니만 오히려 구매자를 가르치려 드는 판매자라니. 에잉.

하지만 적어도 나는 파울로의 책을 읽으며, 거부감이 들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개인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종교적 이야기마저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파울로 역시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은 소중한 가치, 혹은 자칫 너무 사소하여 잊어버릴 수 있는 삶의 기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는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친구의 입장이다. 바로 그 이유다. 자신이 세계적 작가라는 것과 책을 읽는 이들이 전 세계 무수히 많은 군상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냥 친구에게 연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전하는 말들일 뿐이다.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이야기지만 관심이 가고 공감이 간다.  


혹시나 이 책을 읽으리라 생각한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 내용을 이것저것 소개하는 스포일러 추태는 자제하겠다. 다만 내가 조금 감동적으로 읽은 부분 하나만 소개하고 마친다.

다도의 명인이라고 하는 오카쿠라 가쿠조의 말이다.

“우리 안에 악마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타인 안의 악마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역시 그런 경우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털어놓는다. 그것을 감추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강건함을 과시한다. 누구도 우리의 허약함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때, 피고석에 선 것은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라.”

상식이 그립고, 짐승이 아닌 인간이 그리운 시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쓰러지듯 잠들다 깬 새벽 3시. 아파트 복도 너머 보이는 불 꺼진 창들, 그리고 저 멀리 여전히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 문득 입에 문 담배가 맥 빠진다. 그리곤 춥다. 세상에 저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생명 중 하나인 내가, 도대체 다른 생명들을 얼마나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같은 인간끼리 죽이고 죽는 모습에 이미 길들여져, 이젠 내 눈에서 흐르지 않는 것은 눈물로 보이지도 않을지, 두렵다. 삶이 두렵고, 내가 두렵고, 내 눈물이 우습다.

이런 우습고도 소름끼치게 슬픈 시대에 흐르는 강물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두들 너무나 잘 알기에,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여전히 인기다.

비록 파울료의 산문집이 뻔한 교훈을 담고 있고, “아름답긴 한데, 어디 세상이 그런가”라는 말을 내뱉게 한다 해도, 확실한 것 하나.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이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신화는 없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스물일곱 이건희처럼》등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종이 뭉치들 보다 값지다는 것이다.

신화가 왜 없어. 아직 해체 안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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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왜 자유주의를 싫어하는가
레이몽 부동 지음, 임왕준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정치적인 성향으로 봤을 때 분명 난 우파는 아닌 듯하다. 국가라는 대상에 대한 지극한 반감 혹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같은 헛소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좌파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혐오하고, 미국을 상당히 지저분한 국가라 생각하지만, 그것들의 장점 혹은 역할에 대해서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렇담 난 뭐지? 그냥 온건사회주의자 정도? 국가니 정의니 하는 헛소리들보다는 그냥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최대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내가 국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난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에 속해 있고, 대한민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도 살기 좀 나아지지 않겠나.

현대 프랑스 사회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 중 한 사람이라 불리는 저자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라는 것에 대해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반감 혹은 증오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자유주의라는 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나에게는 그의 설명이 얼핏 난해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뛰어난 학자일수록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자신의 논점을 설명하지 않던가. 저자 역시 나름 이해가 쉽도록 글을 풀어나가고 있다. 덕분에 그렇게 머리 아프지 않게, 어떤 부분은 재미있어하며 책을 넘겨갔다. 물론 내가 저자의 주장을 100% 동감한다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의 문제 제기는 이것이다.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왜 자유주의적 사고를 기피하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에 저자는 다양한 예와 또한 다양한 학파들을 소개하며 그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곧 우익적 사고를 의미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그것은 일관되게 좌익적 사고로 여겨졌다고 말한다.

막스 베버는 자유주의에 ‘이상적인 유형’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은 자유주의 사고의 핵심을 이룬다.

저자는 자유주의를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에 가능한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전체 사회구성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는 분명한 이득이 있을 때만 국가의 개입을 인정한다. 또한 정치적 자유주의는 권리의 평등, 자유의 확장, 그리고 제한적인 공권력 개입을 원칙으로 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자유주의가 바탕을 둔 철학적 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되도록 많은 자율권을 보장하고, 내가 타인을 존중하는 만큼 타인도 나의 존엄성을 존중해 줄 것을 기대하는 상호주의적 사고라고 정의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조금만 더 설레어 볼까?

저자는 자유주의는 계층, 국가, 자치단체, 정당 등 모든 형태의 집단이 개인을 기초로 구성되었음을 중요시하고 전체주의를 혐오한다고 강조한다. 우와~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렇담 난 단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자유주의 국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저자가 프랑스의 사회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떠드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저자는 “자유주의는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사회의 여러 규칙이 그들에게 공정하게 적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각자의 지위나 수입이나 권리나 영향력에 따라 보상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능력과 적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장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온건하고 일관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불평등을 인정하지만, 그 불평등이 ‘기능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상 불평등의 폭을 줄이면 모두가,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그 수준까지만 불평등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강조한다.”고 말한다.

더더욱 우울해진다.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 윗글에 반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불평등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평등이 과연 기능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의아해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계층 간 불평등이 과연 기능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땅값이 비싼 곳에서 사는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히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 과연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거지”하면서도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 있을까.

저자는 때문에 자유주의 그 자체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그 불평등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비 기능적인 모습일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식인들이 자유주의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즉 자유주의 그 자체가 아닌 부수적 문제들로 자유주의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마르크스의 도식, 즉 세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둘만 존재한다는 인식이 자유주의를 증오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계급이 분명 존재함을 강조하며, 계급이 아닌 계층의 문제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이 남반구 국가들과 북반구 국가들과의 격차를 설명하는 데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협력의 관계를 오로지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을 여전히 지식인들이 활용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왔다고 비판한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생경하고, 한 편으로는 부러운 말이기도 하다. 현재 기득권을 쥐고 있는 지식인 계층에서 과연 이러한 이분법적 설명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까. 거의 전멸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세속적 마르크스주의는커녕 신 니체주의나 뒤르켕주의도 보기 힘들지 않은가. 적어도 내 생각에 주류 지식인층에서는 그렇다. 저자의 비판은 대한민국에서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행동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등 개인의 자율성을 하나의 환상, 무시해도 좋은 사실, 혹은 과학적 관점에서 변별성이 없는 사실로 간주하는 사고의 경향이 대중의 수요에 부응하며 자유주의에 반하는 기류가 강하게 형성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많은 지식인이 자유주의를 배척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집단적 정서에 비추어 볼 때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돌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수요가 발생하고, 신념의 윤리에 따르는 지식인, 특히 유기적인 지식인이 이런 수요를 이용한다. 즉, 이 돌출적 사실이 자유주의 사회의 실패를 증명한다는 인상을 줄 때, 반자유주의적 사고가 시장에 내놓은 설명의 도식들을 이용하여 사태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이다.”

저자는 소수집단 문제, 교육 문제, 범죄의 원인에 대한 분석 차이 등을 예로 들며 자유주의에 대한 반자유주의적 공격을 설명하고, 그것에 부당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은 반감을 불러올지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부러운 점이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의 역할과 정당성 내지는 그 효과, 존재의 가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자유주의란 단어 대신 자본주의를 집어넣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의 타락에 대한 지적 역시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어떤 이념보다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유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타락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자유주의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내가 왜 부러웠을까. 적어도 내가 알기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가치를 주장하는 우파 내지 우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것을 해결하려기보다는 기득권 수호에 더욱 열심이었고, 지금도 그것은 변하지 않고 있다. 불평등의 완화에 노력하기 보다는 그것의 강화에 주력하고, 기능적인 불평등이 아니라 영구적인 불평등을 추구한다. 이따위 것들을 진정 우파 혹은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보수 혹은 진보가 드물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많다. 아닌 게 아니라 건전한 보수를 지향하고 어쩌고 하는 뉴라이트는 새로운 수구 세력으로 성장해 역사왜곡의 삽질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진보 세력 역시 허구 헌 날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폐만 외칠 뿐, 정작 촛불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는 적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납득하고 동참할 수 있는 자유주의 혹은 반자유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다. 아하~ 또 다시 통재라.

저자는 확실히 우파 지식인이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우파로 분류되는 그가 만약 지금 한국으로 이민 온다면? 내가 보기엔 얼마 못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서 그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혹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미네르바의 죄명이었다)으로 감옥으로 가던가 말이다.

책은 분량도 많지 않고, 친절하게 글자까지 큼지막하여 읽기에 부담이 없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는 내내 짜증과 아쉬움이 남았다. 도대체가 제대로 된 우파 지식인을 찾기 어려운 나라에서 무언 맨날 대한민국 만세고, 건국절이 어떻고 개소리들이냐. 국가의 정체성 운운, 국익을 우선으로 운운, 이런 잡소리 하는 사이에 역사가 왜곡되고 우리는 또 다시 미친 쇠고기를 받아 처먹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욕 나온다. 

진정한 우파 없으신가요? 제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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