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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공포 영화는 그야말로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간신히 눈만 드러내며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꽤 즐기는 편이다. 특히 피가 난무하고 신체의 일부분들이 여기 저기 뒹구는 고어 장르를 좋아한다. “취향 참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 한마디로 〈주온〉같은 영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제대로 못 보지만, 〈새벽의 저주〉,〈랜드 오브 데드〉같은 영화는 낄낄 거리며 본다. 변태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좀비 영화를 특히 즐겨 본다. 좀비 영화의 옛 고전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나는 전설이다〉까지 어지간한 놈들은 다 본 듯하다. 좀비 영화의 매력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좀비들을 헤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아, 쟤는 주인공인 것 같으니 웬만해선 살아남겠군.” 하고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되기도 하지만, 의외로 죽지 말아야 할 캐릭터가 일찍 가고, 허접스러운 캐릭터가 엔딩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쏠쏠한 묘미다.
모두가 좀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세계의 마이너리티이자 모순이 된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선 좀비가 정상인 것이다. 당연한 이치.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렇다면 어떤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끔찍한 악몽은 우리가 그렇게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성과 존엄, 고결함이 사실 모래성과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모래성을 쌓으며 인간은 스스로 만족해하고 스스로를 고결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어처구니없는 오만과 과신이 기실 하찮은 것임을. 소설은 그대로 보여준다. 불편하지만, 쉽사리 끝장을 보기에도 두려운 마음이다.
내가 좀비 영화를 즐겨보는 이유는, 물론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자각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명이 발달하고, 잘 산다고 자부하는 사회 또는 국가일수록 순식간에 타인을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점,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사회, 또는 국가. 그것은 학살을 부르고, 배제를 낳으며, 망각과 무관심을 강요한다. 독일 나치에겐 유태인 민족이 좀비였으며, 미국에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그것이었던 것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는 자신만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악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사라마구가 ‘의사의 아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물론 인간성의 회복, 또는 인간 본연의 고귀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은 한없이 고통스러워 보였고, 자신이 그러한 고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절망한다. 혼자인 그에게는 분명 너무나 힘든 과제였던 것이다.
‘눈’은 무엇일까. 우리는 눈을 통해 자신의 외부를 인식하고, 그것과 소통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니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것일까. 아님 누군가가 강요하고 계획해 놓은 그 어떤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한다. 삶은 어찌 보면 소유와 버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림보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닌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갑자기 당신이 눈이 멀어버린다면 지금껏 당신이 소유한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아름다운 연인, 비싼 집과 자동차, 넓은 땅, 상당한 금액의 재산 등 그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로 다가올까. 세계 최고의 갑부이든 일용직 노동자이든 일단 좀비에 물리게 되면 같은 좀비로 변해버린다.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도 그가 과거에 무엇이었든 모두 눈이 멀어버리고, 모두 동물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그가 얼마나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설을 중간 쯤 읽다가 동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엄연한 반칙이었지만, 갑자기 영화를 먼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다음 나머지를 읽어 나갔다. 영화는 생각 외로 원작의 의미를 살리려 많이 노력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짧은 영화 속에 옮기는 과정에서 최대한 흘리기를 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을 먼저 보라는 말은 유치하니 하지 말고.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눈을 뜨고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반쯤은 모두 눈이 멀었는지 모른다. 빤히 보이는 것을 애써 못 본척하고, 혹은 꼭 봐야 하는 것들을 덮어두고, 더러운 것들에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세상 자체가 그리 깨끗하지 못하기에 우리 탓만을 할 수도 없지만 당당하게 나 잘났다고 하기엔 역시나 부끄러운 지금이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아직 적지 않은 이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전히 눈 떠 있는 이들로 인해 우리는 그나마 걸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억지로 눈을 감게 만드는 지독한 세상에서 온전히 눈 뜨고 살아가기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의사의 아내’가 없었다면 소설이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난 의사의 아내가 결국 촛불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한다.
좀비들이 설치고, 그 좀비를 조종하는 더 사악한 집단들이 웃는 지금,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암흑세계에서도 촛불을 밝히고 있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쯤 눈먼 나로서는 그런 고마운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돕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도울 수 없다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자의 마지막 염치일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봐야만 할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