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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문부식 지음 / 삼인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을 계발하고 자유의 깃발 아래 떨쳐 나설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애틋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5월은 또한 가슴 무너지고 애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09년 저는 또 하나의 아픔을 5월에 묻어야 했습니다. 역사가 훗날 모든 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가장 혐오하는 저이지만, 과연 후세의 역사가들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무어라 말할지 한없이 두렵고 무참하기만 합니다.
1980년 5월 저는 막 4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해 5월 광주의 함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이른 바 의식 있는 친구 녀석이 몰래 건네준 광주 관련 영상물을 볼 수 있었는데요. 늦은 밤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상을 보다 무섭고, 무참하고,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영상은 독일의 기자들이 광주에 들어가 촬영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다시 편집하여 광주의 참상을 모르는 국민들을 위해 배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 영상물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요. 저는 그 영상물을 도저히 혼자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학교에 다시 가져가 친구의 약속을 어기고 영어 교육을 위해 만들어놓은 시청각실에서 상영하기로 마음먹었죠. 당시 전교조에 가입하신 선생님 한 분이 도와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저에게 당시 그 영상물을 본 친구들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부에 끌려가 “너 전대협에 관련되어 있느냐”는 협박성 취조를 당했던 기억만 나네요. 그 전까지 이른 바 반공사상에 철저히 함몰되어 있던 저를 깨워준 소중한 취조였다고 기억합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광주의 참상을 그대로 담았던 영상물과 영화의 장면들이 겹치면서 영화의 어느 장면의 다음 장면이 사실은 어떠했는지 떠오르며 치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영화라는 모습을 띠었더라도 사람들에게 광주를 다시 기억하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럽게 느꼈습니다.
책의 저자는 부산 고신대 신학과에 다니던 1982년 부산의 미국 문화원에 방화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건으로 1명이 목숨을 잃었고, 저자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죠. 하지만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6년 9개월만인 88년 12월 석방됩니다. 그는 다시 1989년 ‘한미문제연구소사건’으로 구속되는데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1991년 만기 출소합니다. 그 후 95년부터 출판 일을 하기 시작한 저자는 도서출판 삼인의 주간과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첫 에세이집입니다.
80년 5월 광주의 불꽃이 군홧발과 총칼로 짓밟힐 때, 광주를 제외한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광주를 응원하거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 떠들었고, 이에 격분한 광주시민들은 방송국을 불태웠죠. 광주 시민들이 그냥 죽을 수 없다며, 예비군 병기고를 습격해 얻은 무기로 공수부대와 싸워 광주를 지켜냈을 때, 그리하여 광주가 잠시나마 해방구가 되었을 때, 언론과 정부의 모략과는 달리 광주는 무법천지가 아니었습니다. 단 한 건의 범죄, 사소한 절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순결했고, 때문에 더욱 무참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80년 5월의 광주를 단 2년 만에 모든 국민들이 잊어간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광주의 비극을 방관하고, 오히려 전두환 정권에게 협조까지 한 미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일었습니다. 때문에 저자는 광주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과 철저히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해가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미 문화원에 방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1명의 생명이 숨졌습니다.
책은 총 9개의 글로 이루어집니다. 광주에 대한 기억, 그리고 남겨진 자에게 다시 남겨진 광주의 기억, 용서에 대한 성찰, 국가의 폭력과 야만에 대한 국민들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며 저자는 자율적 개인의 연대를 꿈꿉니다. 그는 그 어떠한 고귀한 이상이나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단 한 명의 생명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자신이 이상이라 믿었던 신념 때문에 하나의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는 대의를 위한, 혹은 정의를 위한 희생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러한 희생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혹은 불가피한, 흔히 미국이 말하는 ‘부수적 피해’로 치부하기 시작한다면 이른 바 ‘절대선’, ‘절대악’이라는 이분법의 지옥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저자의 뜻이 온전히 이러한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서울광장을 명박산성으로 막아놓은 경찰, 즉 공권력을 미워할 수는 있어도 버스 앞에 처량하게 서있는 전․의경 개인을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한 것을 두고 “전경들이 실수한 것”이라는 비겁한 말로 자신들의 부하들을 팔아먹는 꼴을 보셨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의 인심까지 잃어버립니다. 국민들에게 버림받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모양이지요.
저자는 말합니다.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을 민주화운동을 한 국가유공자로 인정한다고, 또 망월동 묘지를 성역으로 조성하고, 해마다 5월이 되면 국가 통치자들이 찾아가 묵념을 드린다고 진정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하고. 국가의 의해 저질러진 폭력을 희생자가 아닌 국가가 먼저 처벌하고 다시 용서하고 기념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하고. 물론 국가의 의해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 국가는 사과를 하고 희생당한 분들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보상을 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하지만 먼저 광주의 비극이 왜 일어났고, 그 과정은 어땠으며, 당시 나머지 국민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침묵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떠한 마음이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가족들, 그리고 관련된 모든 분들이 먼저 용서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모든 국민들의 진정한 참회와 성찰이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요.
국가는 광주의 기억을 애써 뒤로 넘기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게 치르지 못했습니다. 국민들 역시 광주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고 단지 때가 되면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그것이 저자는 안타깝고, 서글픈 것입니다. 여기에는 오랜 기간 이어져온 우리의 국가주의가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의 정체성 보다는 국가라는 테두리에 모든 이들을 몰아넣고 마치 개개인 모두가 국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저자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디에 살고 있건 국가에 속해 있는 한 국민이 아닐 도리는 없다. 그러나 만일 한 개인이 국민 외에는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없고 아무런 정체성도 가질 수 없다면, 바로 그런 사회를 일컬어 전체주의 사회라 할 것이다. 조세 저항이 거의 없는 나라, 국민 통제를 위해 주민등록제를 바꾸려 할 때 거의 모든 국민이 단기간에 달려가 일사불란하게 지문 날인에 응하는 나라, 국가 안보를 위한 일이라면 교도소에 갇힌 죄수도 영치금을 털어 모금 운동에 참여하는 나라, 비로 이런 나라가 광주항쟁으로부터 20년이 지난, 군사 정권이 물러가고 두 번의 민간 정권의 ‘개혁’실험을 거치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 88~89pp
광주의 불꽃이 꺼졌던 그날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국가주의라는 가면을 벗었을까요. 국익이라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고통과 절규를 외면하지는 않았을까요.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 그리고 택배비 30원을 인상해달라고 외치다, 숨져간 화물연대 박종태님.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허망한 삶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 아직도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용인되고, 그 불의 앞에 숨죽이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제 자신을 학대하여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분명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처럼 분명 읽고 나면 불편하고, 가슴 아플 것 같은 책들을 섣불리 들추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들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주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똑똑하고, 주위의 벗들이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멀기만 해 보이는 국가보다 몇 배 더 소중한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고 생각 정리가 서투른 제가 이 책을 다 소개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따릅니다. 슬기로운 님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아, 맨 앞의 구절은 체 게바라의 말입니다. 그냥 요즘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