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상 다락원 일한 대역문고 고급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도승렬 옮김 / 다락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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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직장 동료에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작가에 대해,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때였는데, 순전히 제목만 보고 골라준 것이었다. 직업이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제목, 헤드카피에 따라 무엇이든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무지의 소치요, 게으름의 유산이었다.

암튼 그 친구는 책이 너무 따분하다며, 한참 후에야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어허, 미안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재미없기에 이런 말을 하실까 생각이 들었다. 해서 기회가 된다면 꼭 고양이의 정체를 밝히리라 다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쓰메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도련님’이 되었다. 지난달엔가 읽은 『고민하는 힘』영향이었다. 강상중 선생은 책에서 나쓰메와 베버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선생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에게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래서였다. 나쓰메의 작품을 관심 있게 찾게 된 것이. 그리고 처음 접한 책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무지해서 그동안 몰랐지, 사실 나쓰메는 일본의 세익스피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위대한 작가였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근대에 접어들며 물질 만능주의가 되어가는 일본 사회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작가였다.

고전이 원래 조금 따분하다고 하지 않던가. 옛 직장동료가 그의 작품을 따분하다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쏠쏠한 재미가 없더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정독하리라, 암~.”바람직한 자세로 책을 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약간은 구식인 것 같으면서도 유쾌한 문체와 인물 묘사에 대한 탁월함에 매료되었다. 일단 지루하지 않았다. 어허 통재라, 이럴 줄 알았음 그 친구에게 고양이보다는 도련님을 먼저 인사시키는 것이었는데. 아쉬웠다.

‘도련님’은 나쓰메 자신의 젊은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 나쓰메는 혈기 넘치지만 엉뚱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으리라. 참고로 도련님의 주인공인 그 도련님은 단지 동급생 녀석이 “네가 아무리 뻐겨 봤댔자 거기서 뛰어내리진 못할 거다. 겁쟁이, 겁쟁이. 용용 죽겠지!”라고 놀렸다는 이유만으로 초등학교 시절 학교 2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도련님의 아버지 또한 보통은 아니었다. 우리의 도련님이 학교 사환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도련님의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겨우 2층에서 뛰어내려서 허리를 삐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고 야단친다. 이에 도련님의 대답은 “그럼 요담엔 삐지 않고 뛰어내려 볼 테에요.”멋진 부자다. 브라보~.

도련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이 재산을 정리해 나눠주자 하릴없이 있다가 충동적으로 물리학부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그리고 졸업 뒤 시코쿠라는 먼 섬의 수학 선생으로 발령받게 된다.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는 버릇이 있는 도련님은 교장은 너구리, 교감은 빨간 셔츠, 수학 주임은 고슴도치, 미술 교사는 알랑쇠, 영어 선생은 가지 꼬투리라고 정해버린다. 참고로 내 고3시절 담임은 학다리였다. 어찌나 다리가 기신지. 발길질 안 하신 게 지금도 감사하다.

이후 짧지만 결코 순탄치 않은 한 달을 보내게 되는 우리의 도련님. 정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좌충우돌 소동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도련님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의 복수를 날린 채 자신을 도련님이라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인 유모 ‘기요’에게 돌아간다.

내용은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난 스포일러 정말 싫다.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 그래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직접 확인하시라. 하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책임지고, 또한 나름 남는 내용도 있다. 몇 가지 꼽자면, 절대 좁은 동네에서는 튀는 행동을 하지 마라, 증거가 없을 때는 일단 자중하라, 지조 없는 여자는 아무리 예뻐도 아니다 정도?

나쓰메는 소설을 통해 의리와 정직한 양심이 비웃음을 받고 권모술수와 위선이 판치는 부조리한 세상을 풍자한다. 교감이면 교감이지 왜 평교사의 애인을 빼앗나? 왜 아부하지 않고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한 사람은 늘 피해를 받나? 아 통재라. 이런 모습은 고금을 막론하고 지역을 떠나 만고불변의 진리란 말이더냐. 하늘이 울고 땅이 뒤집어질 일이로다. 아 때마침 비오려고 하네.

꼭 작금에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요즘 정치권이나 정부의 행태를 보자면, 도련님이 맞서 싸웠던 조그만 섬의 학교가 떠오른다. 찰나인 권력에 대한 무한 굴종, 그로써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애꿎은 사람들. 언제나 눈치 빠르게 줄 잘서는 인간들은 영혼을 판 대가로 호위호식하고, 정작 이 사회가 온전히 꾸려나갈 수 있도록 일하는 이들은 병신 취급 받는 작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미디어법을 쪽수의 힘으로 통과시키는 한나라당의 의회 폭력과 22조 원의 비용을 들여 4대 강을 뒤집겠다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지원 예산은 3조 1천억 원을 책정한 정부. 15조 원이 넘는 돈을 음식쓰레기 처리에 쳐 부으며, 정작 지난 10년 동안 1인당 5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을 썼음에도 대북 퍼주기 운운하는 찌라시들. 이 상황을 우리 도련님이 보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할지.

어디에나 쓰레기는 있다. 영혼을 판 대가로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굴리며 살아가는 벌레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기억해야 할 것 하나. 쓰레기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피땀 흘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단 돈 만 원의 행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연예인들이 장난치는 만원의 행복 빼고.

『도련님』은 190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울림을 준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고, 저열한 쓰레기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고전은 따분하더라도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시대의 빨간 셔츠, 알랑쇠 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믿어야 한다. 아직까지 이 시대는 도련님들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고슴도치가 버티고 있다.  


힘내자. 그리고 외면하지 말자. 이제 우리는 누구라도 상관없이 길거리에 나서다 방패에 찍힐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외면은 곧 불의에 대한 타협과 다르지 않다. 외면을 합리화 시키지 말자. 사정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물론 하지만….

그렇다고 2층에서 뛰어내리진 말자. 허리 안 삘 자신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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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피터 싱어 지음 / 세종(세종서적)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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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철학자이자 ‘동물 해방 운동’의 선구자, 적극적 사회활동가로 알려진 피터 싱어의 대표작이다. 원제는 ‘How are We to live?’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목만 보면 윤리학 교재처럼 느껴진다. 물론 윤리적인 내용이 적잖이 담겨있긴 하다. 하지만 책은 단순한 교재 차원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에 대한 분석, 윤리적인 사유의 전개 과정, 인간이 지닌 본능적 성향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 이론 등 다양한 논의들이 윤리적인 삶의 우월성이라는 하나의 종착점을 향해 다각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역자는 이 책이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인문, 사회, 자연 과학 지식이 어떻게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랬다. 윤리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떠드는 세상에서, 혹은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 찬 위선적 윤리 강령이 부정과 범죄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 책이 주는 희망적 메시지는 고무적이다. 그것도 당위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더욱 적절하다. 그는 이론과 과학을 적절히 섞어가며 논의를 펼치지만, 그 안에는 그의 뜨거운 ‘가슴’이 담겨 있다. 이 세상은 분명 유토피아가 될 수 있으며, 그 원천은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 
 


허무한 도덕론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단순한 희망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윤리를 설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논리정연하게 설득하고 있다.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진정 어떠한 존재인지, 우리가 어떠한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다양한 명칭들이 떠오른다. 역자가 열거한 것만 우선 보자. 이기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등. 대부분 우울한 것들이다. 천민자본주의, 양극화, 시장만능주의 등을 여기에 보탤 수 있겠다. 우리는 환경의 오염, 빈부의 격차, 핵무기 등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에 포위되어 있지만, 이젠 장기하 형님의 말씀대로 ‘감각’이 없다. 당장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고, 개인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지 스스로 단정짓기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돈 때문에 다른 소중한 것들을 제쳐두고 산다. 부자라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거의 대개가 돈 버는 일에 몰두하고 산다.  



저자는 더 이상 이러한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공동체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목적의식을 회복하면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 저자는 그 길이 대의와 자기 이익을 동일시하는 삶에 있다고 말한다. 윤리적인 삶만이 경쟁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그의 주장. 지금처럼 살다가 눈에 빤히 보이는 파국을 맞을 것인가, 미력하나마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하면서 희망을 가질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세상에는 불가피하지 않은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도 많이 존재한다.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그 때문에 우리들이 삶을 충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유는 탐욕과 사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의해서도 심각한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올바른 정치가를 위해 투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윤리를 정치보다 우선시 할 경우,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투표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원하는지에 따라 평가되기보다는 지금 당장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당신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자원 배분 상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리고 당신이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잉여 소득 중 얼만 큼을 개발도상국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할 수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인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세계가 봉착한 기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는 것이 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과연 인구 통제를 추진하는 단체에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산림이 나무 조각으로 변하는데도 아무 상관이 없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종이를 재활용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가? 당신은 가축 농장에서 동물들을 좁다란 우리에 가두어 키우는 것에 반대하는가? 그럼에도 당신은 베이컨이나 계란과 같이 동물을 학대하는 가축 농장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을 소비하면서 이들 사업을 간접적으로 돕고 있지는 않는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단지 올바른 태도를 갖고 올바른 견해를 표출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한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름대로 윤리적 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심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살아온 나에게 정작 실천의 결핍은 뼈아프게 다가왔다. 행동보다는 글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정의를 외치고, 공존을 외치고, 평화를 외쳐오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정작 온 몸으로 다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려 노력했던 사람을 먼저 억울하게 보내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분의 죽음이 허무하게 잊혀질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는 중간에 그 분이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그를 보내야 했다. 그가 묻는 것 같다. 이렇게 살아가도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점점 더 공존을 거부하는 이기적 인간들이 무차별적인 파괴와 억압과 살육을 일삼고 있는데, 정말 이렇게 우리는 맥없이 살아가도 괜찮은 것이냐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지금, 정작 난 두려움과 외면이라는 공포 속에 주저앉은 것은 아니냐고.

인간이 만들어낸 돈과 물질에 스스로 다시 구속되어 살고 있는 지금. 진정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를 고민해본 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적어도 나같이 대책 없이 4가지 없는 인간도 반성이란 걸 하게 만든 책이니. 다른 훌륭하신 님들 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 책의 정말 중요한 미덕 두 가지. 절대 훈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절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훌륭하다.

아, 사족 하나. 일본에 대해 묘사한 부분은 조금 우스웠다. 옥의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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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09-07-12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 싱어 지음 / 정연교 옮김 / 세종서적 펴냄 (2003년 4월 / 초판 7쇄)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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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과 함께 재일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집필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강상중 교수의 최근 저서다. 이 분은 〈세계화의 원근법〉,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등으로 나에게 친근한 분이다.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그의 글은 꽤 머리 아프기도 하지만, 그 고통만큼 많은 것을 전해주기 때문에, 무척 고마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민하는 힘〉은 지금까지 써왔던 강 교수의 글에 비하면 읽기에 별 무리가 없다. 마치 갓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들을 앞에 두고 편하게 대화하는 것 같다. 사실 이 글이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긴 하다.

 

하지만 쉽게 풀어나가는 그의 글은 정작 적지 않은 당혹감을 전해준다. 고민하기 싫어하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물론 기성세대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에게 강 교수는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을 고민해 보라고 권유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잘 사는 것인가를, 그리고 과연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쓰면서 저자 역시 상당히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만만한 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혼란을 느끼던 젊은 시절, 그의 청춘을 어루만져 주었던 두 명의 지식인,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통해 진정 고민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평생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고민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는지, 저자는 편안하지만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청춘은 아름다운가,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늙어서 ‘최강’이 되라. 이렇게 아홉 가지의 화두를 던지며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껏 미처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의 삶과 고민을 들려준다. 물론 저자 자신의 고민도 함께 말이다.

 

무심코 그동안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순간의 고통과 즐거움은 표현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없는 새내기가 뿔테 안경을 진지하게 쓴 선배를 통해 어떠한 식으로든 의식화되는 그 순간이라고 할까. 뭔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하면서, 여전히 먼 산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 무참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한 그 순간.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순간 조금이나마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그 성장이 또 다른 고민으로 깨지더라도 말이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 시스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심한 차이. 젊은이들이 견뎌야 할 현실은 너무나도 혹독합니다. 따라서 잔혹하고 박정한 취급을 받는 그들, 그녀들에게 세련된 정신론을 제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바에야 살아남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나 실업자의 경우처럼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루바삐 자기방어책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무엇인가 고민하며 살아가기엔 지금의 우린 너무 바쁘다. 내가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를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정제된 티브이나 신문의 기사로 대충 파악한다. 주변에 이웃들이, 저 멀리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이 어떠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혹은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한 눈 팔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내일 우린 다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던 때가 있었나 싶다. 민주주의를 뒤엎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는 지금, 난 민주주의란 것 자체에 심각한 의심이 든다. 대의민주주의가 정답인가.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자각하고,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상을 자기 것처럼 쥐고 흔들려는 저들은 과연 그럴 권리가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삶 자체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는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리고 많이 듣는다. 우리는 작고 힘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작고 힘없는 존재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작고 힘없는 존재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었고, 바꿔왔으며, 바꾸고 있다. 그것을 잊는 순간, 정말 우리는 작고 힘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고민하는 힘, 그것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적어도 그럴 듯한 이유 하나쯤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살아가며, 보다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주변의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한 번쯤 돌아보자는 것일 터이다.

 

고민을 많이 하면 담배가 늘고, 술이 늘며, 머리가 빠진다. 하지만 고민을 하지 않으면 무지가 늘고, 이기심이 늘며, 영혼이 빠진다. 선택은 물론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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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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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호쾌한 구라꾼 성석제. 특별히 어느 작가의 글을 찾아서 읽는 편이 아닌 내가 그나마 주의를 기울여 읽는 것이 바로 성석제의 글이다.

물론 그 정도의 수고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모든 글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논문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논문도 난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것이 내 생각이다. 재미없는 글은 아무리 위대해도 적어도 나에겐 ‘아니올시다’이다. 책이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의 전달, 진리의 탐구라는 위대하신 이유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오락적인 측면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글을 읽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때문에 성석제의 글은 그야말로 나에겐 쏠쏠한 읽을거리다. 일단 재미있고, 깔끔하게 정제된 때로는 그냥 투박하게 쏟아 버리는 구라는 오호라 ‘고맙습니다’가 될 수밖에.

「사냥에는 보통 개를 쓰지만 불법 사냥에는 코뿔소나 악어, 코끼리, 공룡, 이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사실 호랑이를 잡는 데는 더 크고 사나운 호랑이를 쓰는 게 최고다. 길을 들일 수만 있다면. 불법 사냥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개는, 개가 아니고 사람이다. 개에게는 불법을 가르치기가 쉽지 않은데다 사람은 개와 달리 도구를 쓰는 존재이므로 사람을 사냥에 쓰면 개가 할 수 없는 요긴한 일, 예컨대 털 뽑기, 요리, 술심부름 같은 일을 시킬 수 있다.」

- ‘누가 염소의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 중 12p

능청스럽게 던지는 구라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또한 아주 진지한 구라이기에 어느 순간에는 믿어버리고, 또 믿고 싶게 만든다. 킥킥거리게 만들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순간 주목받게 만든다. 아~! 그의 글을 읽다 주변의 눈총을 받은 게 몇 번이더냐. 참고로 난 항상 이어폰이 귀에 박혀 있는 관계로 내 웃음소리의 크기를 감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정말 짜증나는 세상에서 성석제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비록 비웃음, 실소, 어처구니없음에서 비롯된 기동이표 썩소가 되더라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은 분명 아주 고마운 일이다. 이런 웃음마저 없다면 세상은 정말 삭제하고픈 악성 스팸메일이나 바이러스 잡아준다는 구라 프로그램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저자나 출판사에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내 무지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고맙기도 하고, 지루한 시간을 그럭저럭 때울 수 있게 해줘서 고맙기도 하다. 눈물 나게 진한 감동을 전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때론 그냥 내 앞에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음 그 자체가 고맙기도 하다. 

‘고맙다’라는 말은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거나 짜증내는 이들은 거의 없으리라. 물론 가식적인, 예를 들어 형식적인 “고맙습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고객님~” 따위의 고맙다는 좀 다를 것이지만. 암튼 고맙다는 말을 듣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 그 전까지는 내 존재가 너에게 전혀 불필요한 쓰레기였단 말이냐!”며 분노를 터뜨리는 이는 별로 없다고 믿는다. 소설가 성석제는 여전히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다. 

‘고맙다’는 말은 ‘곰’에서 말미암았다. 단군 이야기에 나오는 단군을 낳으신 곰, 쑥과 마늘을 먹으며 백일을 버텨 결국 사람이 되었다는 그 곰이다. 우리말교육연구소 김수업 소장님의 글을 보면 이 곰은 본디 하늘 위에서 온갖 목숨을 세상으로 내려 보내고 해와 달을 거느려 목숨을 살리고 다스리는 하늘서낭(천신)과 맞잡이로 땅 밑에서 온갖 목숨을 세상으로 밀어올리고 비와 바람을 다스려 목숨을 살리고 북돋우는 땅서낭(지신)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런 땅서낭 ‘곰’을 우리 글자가 없던 시절의 《삼국유사》에서는 ‘熊’으로 적었지만 우리말 그대로 한글로 적으면 ‘ㄱ·ㅁ’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한글을 만든 15세기 뒤로 오면 ‘고마’로도 썼다는데, 이제는 뜻이 “삼가 우러러볼 만한 것” 쯤으로 낮추어졌고, “삼가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고마하다’는 움직씨도 만들어 썼다고 한다. 

‘고맙다’를 그대로 뿌리와 가지로 나누면 ‘곰+압다’가 되겠지만 그것은 ‘곰+답다’에서 ‘ㄷ’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고맙다’는 본디 “당신은 나에게 목숨을 내어주고 삶과 죽음까지 돌보며 이끄시는 곰(서낭)과 같은 분이다”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우와, 정말 아름답고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좋은 말을 두고 우리는 그동안 일본 한자말 ‘감사하다’나 어설프게 ‘땡큐’ 어쩌고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곰에게 한 대 맞아도 싸다.

우리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들을 따뜻한 웃음, 허풍선이 웃음, 때론 씁쓸한 웃음으로 보여주는 성석제의 글은 소중하고, 역시 고맙다. 어설프게 글을 쓰는 업으로 먹고 사는 나에게 성석제의 글은 활력소이자,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아무리 짧고 하찮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러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애정과 우리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한 사랑을 배워감에 있어 나는 여전히 멀고 아득하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성석제의 감칠맛 나는 구라. 여전히 기대한다.  

「아, 아, 이 마이크가 왜 이카나. 아, 아, 원투스리포오, 아, 뒤에 잘 들리십니까. (뒷줄: 뭐 기양도 들리는구만 마이크는 뭐 하러 써싸. 전기만 닳구로.) 안녕하십니까. 제가 바로 옥산면 파출소에서 소장님을 모시고 있다가 소장님이 안 계실 때는 소장님을 대신해서 면민의 안녕과 치안을 책임지는 차석 김옥출 경장입니다. 이 화창한 봄날에, 만물이 생동하는 마당에, 바쁘신 중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와주신 옥산면 주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 말씀 드리며 인사올립니다. (앞줄: 빨리 할말만 해. 돼지 마구 똥 쳐낼 기 태산이구마는. 중간줄: 아, 인사한다는 기 뭐가 해로웨. 기양 점자이 받아서 보겟도에 넣어두세.) 아, 아, 다른 게 아니고 말입니다. 옥산면민 여러분. 제발 파출소에 씰데없는 전화 좀 넣지 맙시다요. 솔직히 이 인간 김옥출이가 차석 모가지를 걸고 말하는 긴데 우리가 작년 한 해 동안에 음주운전 단속한 기 딱 두 건입니다이.」

- ‘당부 말씀’ 중에서, 26~27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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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 13억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 살림지식총서 362
김승일 지음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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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0퍼센트 정도 과오를 범했지만, 그가 우리 인민을 위해 노력한 70퍼센트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마오쩌둥에 의해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포악한 선동정치 속에서 엄청난 굴욕과 탄압을 받았던 덩샤오핑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천안문 광장의 자금성 정문 벽에 마오의 초상화를 그대로 걸도록 지시하였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다. 
 

 

모택동, 마오쩌둥. 그를 제외하고 중국 현대사를 논할 수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가, 혹은 수천만 혹은 그 이상의 중국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냉혹한 독재자.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지만, 여전히 중국 인민들에게 마오쩌둥이란 이름은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살림지식총서는 내가 즐겨 보는 시리즈 중 하나이다. 얇은 분량에 비해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고, 그 분야 또한 정말 다양하다. 짧은 여행길이나 혹은 출근길에 부담 없이 몇 권 집어 들고 갈 수 있는 쏠쏠한 친구가 되어준다. 살림지식총서 362번째인 《모택동: 13억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역시 분량은 매우 적다. 내 속도로는 2~3시간 정도면 읽을 정도이다. 하지만 마오에 대해 궁금했던 ‘마오 초보자’가 읽기에는 적당한 듯하다. 이 책을 읽은 후면 ‘모택동 선집’, ‘중국의 붉은 별’, 그리고 최근에 발간된 장융의 ‘마오’ 등이 보다 친숙하게 다가오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레닌과 마오쩌둥은 그야말로 탐구의 대상이었다. 때론 그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때론 비관과 증오를 낳게 만들었다. 하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한 내 관심마저도  언제나 이들보단 높지 못했다.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레닌과 마오는 빠질 수 없었다. 김일성과 함께 한 마오의 모습, 그리고 레닌주의와는 또 다른 공산주의 건설에 꿈을 걸었던 북한 정권 수립은 많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길지 않은 내 지나온 삶을 보면 적어도 꿈속에서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만났던 적보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나 지독한 독재자들을 더욱 많이 만났던 듯하다. 한국의 지도자라고 해야 백범, 장준하 정도였고, 대통령은 노무현이 유일하다. 하지만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친숙했다. 꿈까지 국가가 통제한다면 진작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오, 말하고 나니 조금 놀라.

중국 현대사에서 대장정,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홍위병이란 단어들을 빼놓을 수 없듯, 마오쩌둥의 거대한 그림자 역시 지울 수 없다. 이제 혁명 4세대가 중국을 이끌고 있는 지금도 마오는 중국 인민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혹자는 이것을 박정희에 대한 한국인들의 향수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신적 지주라는 표현은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의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 인민들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높아진 국가의 위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힘에 걸맞는 대우를 국제사회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위상이야 예나 지금이나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파고 속에서 그 위상이 더욱 높아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중국의 부상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이제 우리 바로 옆에서 다시금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 혹은 연관과 함께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통일에 대해서도 중국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아니 지금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북핵 문제가 뜨거운 지금 중국의 입김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북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중국식 공산주의를 적절히 이용해 북을 통치했다면, 지금 김정일은 중국을 버팀목 삼아 경제를 유지하고, 또한 국제사회에서 일정한 비상구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중국은 한반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중국에 대해 짐짓 많이 아는 척 하면서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중국 전문가가 몇이나 있는지, 상상하기 두려울 정도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했다 하더라도 아직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비교적 저렴하게 놀러 갔다 올 수 있는 나라, 재중동포, 흔히 말하는 조선족들로 상징되는 나라일 뿐이다. 동북공정으로 한동안 반중 감정이 일더니 이제는 한류가 먹힐 주요 대상지로 생각하고, 공략에 열을 올린다. 한국 연예인 몇몇이 중국에서 인기를 얻는다고 대륙을 정복했다고 떠든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우스운 모습이다.

북의 최근 행보는 미국을 비롯하여 특히 한국 정부의 초등학생 수준의 대북정책이 불러온 결과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하지만 그 이유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북은 북의 시간표대로 다만 가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들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정권의 유지를 위해 그들은 그렇게 갈 것이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그들의 시간표대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 그 누가 방해한다 해도 그들은 갈 것이다. 하지만 북의 행보와 중국의 행보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중국이 움직이면 세계의 1/4, 1/5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곁에서 분단된 채 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걸음이 우리에겐 치명적일 만큼 중요한 이유다.

지금도 살아있는 마오의 정신 혹은 그 위상은 앞으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비록 조금은 우스운 모양이지만 상하이의 벼룩시장에는 마오와 관련된 물건들이 쌓여 있다. 배지, 흉상, 조각, 각종 기념품, 훈장에 이르기까지. 물론 마오가 살아있던 당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인민들은 결코 마오 동지를 잊지 않고 있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그리고 이제 다가올 시진핑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마오는 그들과 함께 했고, 또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마오로부터 시작된 중국 현대사를 다시금 곰곰이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중국의 미래가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짧지만 개괄적으로 마오의 생애와 현대 중국을 소개한 이 책은, 때문에 가볍지 않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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