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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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 여름에 읽은 책을 새삼 다시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책장을 덮은 다음 다가온 숨 쉴 수 없는 아픔과 격정을. 저자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했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한심한 쓰레기임을 깨달았다. 삶은 그토록 구차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말하던 저자. 말로는 표현하기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자로, 또한 노동운동가로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저자. 하지만 자신과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오늘도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는 저자. 그는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이 땅의 노동자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묵직함, 아픔, 쓰라림을 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깜냥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노동이라는 표현으로 매겨질 수 있는지도 자신할 수 없다. 몸으로 직접 치열하게 부딪치지 않는 것을 온전히 노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도 자신할 수 없다.

물론 정신적인 노동 역시 노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육체노동 못지않은 공력이 소모되고, 힘들기도 하다. 이 땅의 모든 수험생들 역시 지독한 노동자들 아닌가. 하지만 저자의 삶을 살짝이라도 들여다 본 이들이 과연 노동을 이처럼 넓게, 광범위하게 부를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모두들 자신의 일들이 가장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 부르더라도.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노동자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운동가로 진화해왔다. 그리고 정말 치열하게, 살기 위해 싸워왔다. 그 싸움이 정녕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지언정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주와 기득권 세력들이 보기엔 하찮을 정도로 작은 권리를 얻기 위해 죽어갔다. 그 현장에서 언제나 함께 했던 그는 때문에 소금꽃 나무의 서러움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안다. 너무나 잘 안다.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 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아시겠지요?”

얼마 전 철도노조의 파업이 한창일 때 이명박 대통령은 “안정된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파업을 하지 않는다며 선진국의 노동자답게 굴라고 훈계까지 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파업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무식함을 무슨 자랑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알고 있는 분이다. 유럽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가? 아니 보려 하지 않겠지.

노동자는 다만 입 닥치고 주는 돈 받고 살라는 말이다. 괜히 권리네 뭐네 나불대면서 나서면 패가망신한다는 경고다. 파업을 철회한 직후 사측과 정부는 이구동성으로 파업 철회는 잘 했지만,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동안 끼친 손해를 물어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동네 멍멍이도 고양이도 웃는다. 어처구니없어서.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강철의 대오도 더 이상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 형, 누나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다. 꿈이 있고, 또 꿈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심심해서, 혹은 부당하게 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없다. 아울러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탄압당하면 그 다음은 일반 시민들이 탄압 당하게 된다. 수순이다. 때문에 함께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말이다.

철도 노조의 파업이 끝나자,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이명박 정권이 워낙 세게 나가니 그게 무서워 서둘러 철회했다고 지적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다. 동의한다. 무서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하찮게 여기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시민들을 볼모로 벌이는 협박 따위로 매도한 정부가 진정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정작 그들이 힘들게 투쟁하고 있을 때 응원의 한 마디라도 던진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닥치심이 현명하다. 투쟁에 있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정부의 탄압이 아니다. 사측의 무자비한 진압이 아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냉소다.

“어머니, 지금은 감옥에 계신 어느 노조 위원장의 일곱 살 난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누구냐?’하고 물으니 ‘노동잡니다’하길래, 그 대답이 하도 맹랑해서 ‘노동자가 누군데?’하고 다시 물으니 ‘역사의 주인이십니다’하더랍니다. 그래요, 어머니. 학교에서 내주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농업’이라고 떳떳하게 쓰지 못하고 ‘상업’이라고 써 내고는 온종일 가슴이 오그라들어 있던 저처럼 못난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 직업란에 ‘노동자’라고 써 내는 당당함부터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신노예주의다. 단순명료하다. 노동자가 부품이 되어 사용 기한까지 사용되다 폐기되는 것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국제 금융이 전 세계를 활보해도 공장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신자유주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자본계급에게 신자유주의는 복음이다.

우리는 노동자다. 청계천은 이명박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이 땅위의 모든 역사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의 삶이 한 노동자의 고난의 역사가 아니라 이 땅의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역사였음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파업을 감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노동자들에게 격려의 한마디, 박카스 한 병을 건네는 사소한 용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눈을 감고 입 다물고 한 세상 편히 살다 가고픈 이라면 감히 《소금꽃나무》를 펼치지 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을 욕보이는 일이다. 편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자신부터 변해야 할 것이다. 대가리가 아닌 몸으로 깨우치고 배워야 할 일이다. 눈이 아닌 몸으로 울어야 할 일이다.

아직도 차디찬 냉동고에 누워있는 용산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내 눈물과 사랑을 바친다.

『“변호인이 없어도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재판장은 말했다. “그렇다면 돌아앉게 해주십시오. 나는 변호인이 없습니다…….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나지막하게 떨리면서 법정에 퍼지던 피고인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어서가 아니다. 그날 나는 줄곧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이던 어떤 현실을 10미터 거리에서 직접 보았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무시당한 채,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권력이 한쪽의 증거만 취사선택해 제시하는 부당한 법정에 한 인간이 피고인으로 계속 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가 있다. 나는 그 나라의 국민이었다.』  


-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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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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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중요성 혹은 가치에 대해 모르진 않지만,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님의 성화에 못 이겨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한 경험이 없는 이들에겐, 게다가 내 나이 정도 되면 쉽사리 다시 다가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후의 명작들이 나온 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과연 고전에 버금가는 책들은 몇 권이나 될까.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어머님들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이다. 단 논술이나 뭐 이딴 불순한 의도로 읽는 고전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감히 상상할 따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독서편력은 그야말로 편향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아집과 무지를 키우는 데 크게 일조한 듯하다. 그렇다고 부모님들을 탓할 것은 없어 보인다. 온전히 내 의지로 책을 고르고 읽었으니, 또한 온전히 내가 만든 결과다. 어리고도 천둥벌거숭이 같던 난 고전이라 함은 왠지 케케묵은 옛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안에 담겨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그 빼어난 문장들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오만과 편견》역시 나에겐 그런 먼지 쌓인 것 중 하나였다. 사실 책장을 정리하다 이중으로 꽂혀진 책장의 뒤편으로 보이는 《파리대왕》을 찾았고, 그 옆에 언제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이 책을 찾게 된 것이다. 거기에 키이라 나이틀리의 얼굴이 겹쳐진 것도 고백해야 겠다. 영화에 모든 배역들이 대체적으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이틀리의 연기는 그나마 훌륭했다고 생각한 바 있다.

작품엔 조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속물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엘리자베스의 수다스러운 어머니를 비롯해 이른 바 아부의 달인 콜린스 경, 그의 재산을 보고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된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 그리고 온갖 거짓으로 엘리자베스의 눈을 흐리게 했던 위컴, 그런 그를 사랑한 철부지 리디아, 자신의 지위만큼의 품격을 애석히도 갖추지 못한 전형적인 속물 귀족 캐서린 영부인 까지. 신분과 명예,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런 모습들은 조소와 함께 당시 영국의 신분제도 및 결혼관을 투명하게 비쳐준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을 충실히 묘사한 것으로 작품의 미덕은 끝나지 않는다. 작품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당시의 문제의식이 지금까지 유효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상품화하고, 신분에 따른 인간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과거와 지금 별반 다르지 않다. 책을 읽으며 때론 킥킥거리면서도 마치 김대희나 된 듯이 씁쓸하게 느껴진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

그렇다.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함에 있어 내면보다 겉모습에 치중해 온 것이. 더구나 결혼과 같은 두 사람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대한 일에 인간성과 내면이 아닌 신분과 재산이 중시되는 행태. 과거와 지금이 전혀 다르지 않다. 내가 감히 필명으로 쓰고 있는 간서치(看書痴)의 제 주인인 이덕무의 절친한 벗이었던 박제가는 1700~800년대 조선 사회의 모습에 분개하며 이렇게 절규했다.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옳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박제가 다운 말이다. 서자라는 신분상의 차별을 일생의 큰 상처로 품고 살았던 박제가에게 신분상의 부당한 차별, 지위와 재산으로 평가되는 조선 사회는 그야말로 버러지 같은 그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에 나타난 영국 사회의 모습도 말만 그럴 듯하고, 껍데기만 요란할 뿐 사실 조선 사회의 그것, 그리고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한 노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하지 않고 신분이 고귀하지 못한 노처녀는 결국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개인교사나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 역시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매달리며 틈틈이 글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 하나 만큼은 대단했다고 하니, 그의 글이 단순한 가정사, 연애사로 치부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는 소일삼아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쳐 글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한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 사회 전체를 담아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언니 제인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결혼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그대로 영국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한정 상속이라는 매우 부당한 제도를 고수했던 영국의 후진성을 보는 재미도 사실 적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녀들의 동생인 철부지 리디아의 대책 없는 결혼,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의 정략적인 결혼도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결국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지만, 어찌 보면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결혼은 이 시대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의 “루저”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뭐 그냥 그러려니 생각할 수도 있었던 문제인데, 대한민국 루저들의 분노가 자못 컸던 모양이다. 발언자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루저일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뭐 그냥 덤덤하다고 말하고 싶다. 거기에 화를 내면 정말 지는 거다. 하하하.

그 대학생의 발언에서 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최악의 취업난에서 면접을 위해 성형을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되어 버렸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것도 아닌 단지 취업을 위해서 말이다. 개그 프로를 포함한 어디에서나 외모를 주제로 한 비하 발언들이 쏟아지고 “명품 몸매”“꿀벅지”“품절남”“여신 미모”등등 다양한 표현들이 나온다. 하나같이 외모 지상주의를 상징하는 말 같다. 물론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여성들이 자신을 상품화하고 그 단계 중 최고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 그것을 즐기고 이용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계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금 한국 가요계에 눈에 밟힐 정도로 많은 여성 아이돌 그룹들을 보자. 가창력, 댄스 실력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외모다. 가장 좋은 것이 섹시한 것이고, 그게 안 되면 귀엽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든 먹힌다. 노래는 그 다음이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감히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자격이 있는가. 즐기지 않는가.

루저 발언을 한 대학생이 잘 했고 훈장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나도 속상하다. 하지만 그렇게 한 명의 발언으로 전체 여성을 모두 속물로 몰아붙이는 이 살벌하고도 무식한 단순화의 오류는 이제 멈추자는 것이다. 여성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는 것이 남성들이 느끼는 것만큼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제발 알고 떠들어야 하지 않겠나.

여성은 결혼할 때 돈만 보고, 직장의 안정성만 보고, 정작 남성의 인간됨됨이는 보지 않는다는 말. 각종 중매 회사에 가입해 돈 많고 지위가 높은 남자들만 찾는다는 비난. 다 좋다 치고, 그렇다면 남성은 어떤지 한 번 살펴보자. 무조건 여자면 오케이인가? 무조건 착하면 되는가? 양심에 손을 얹고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여성들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난 아니라고 본다. 절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보기엔 이건 성별의 문제에서 이젠 사회적, 국가적 문제가 되어버린 수준이다.

여성들이 왜 될 수 있는 한 몸매를 예쁘게 가꾸려고 하고, 성형을 하려고 하는 지, 물론 자기만족도 있겠지만, 그게 왜 투자라고 불리는지. 당신이 모른다면 어느 책 제목처럼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놈’이다. 이 사회가 여성들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돈 조금 더 주면 애를 많이 낳겠지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너무나 무식한 정부와 다르지 않다. 이 시대의 결혼은 이미 거래가 된 지 오래다.

《오만과 편견》은 그래서 아직 유효하다. 아니 절실히 다가온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작품은 단지 고전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 운운하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고, 성이, 사랑이 상품화되는 시대. 우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제발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톡톡 튀는 문장과 탄탄한 줄거리 전개가 뛰어난 《오만과 편견》. 비록 씁쓸함을 전해 주긴 하지만 역시 고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 모든 루저들에게 슬며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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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 악의 뿌리 미국이 지목한‘악의 축’그들은 왜 나쁜 나라가 되었을까?
권태훈 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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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이들이 있다. 분명 승부는 그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 질 것이라 판단하는 싸움에 끝까지 나서는 이들이 있다. 김유신과 맞서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먼저 죽인 후 최후의 결전을 맞았던 계백이나, 어차피 질 것을 알면서도 웃으며 돌진했던 인류 전쟁사의 수많은 장수들. 그들은 분명 어리석었지만, 그만큼 아쉬움과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에 맞서는 나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세계 최강의 절대 국가. 세계 경찰이라 자부하며, 전 세계에 자국의 군 병력을 주둔시켜둔 국가. 무수히 많은 국가들을 전복시키거나 새로 만들어 내기도 했던, 지금도 이라크를 새로 만들고, 아프간을 새로 만들고 있는 절대 강자. 이 미국에 저항한 나라들.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책은 역사상 미국에 대항했던 국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놀랍게도 미국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거나, 혹은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중에는 부시 정권 당시 “악의 축”이라 불린 국가들이 상당수다. 북한도 포함된다. 하긴 북한이 빠진다면 그게 더욱 이상한 일이긴 할 것이다. 세계2차 대전 후 자신만만하던 미국이 처음 치른 전쟁에서 패배를 안겨주고, 또 지금까지 핵을 무기로 십년이 넘도록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베트남, 이란, 리비아 그리고 북. 모두들 선진국의 기준, 이른 바 지구상에서 잘 산다는 국가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그리 풍족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력이라는 것을 평가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과다한 경제력의 감안은 이들 나라에 있어서만은 공정성을 요구한다. 우리가 북과의 경제력에 있어 수백 대 일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 북과의 국력에서 절대적 수치를 차지하느냐에 문제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느끼고 있는 자신감, 자존심 그리고 국민적 화합이 얼마나 되는가를 따져본다면 단순히 북이 우리보다 열등한 국가라고 평가하는 것은 우둔한 생각이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집요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전복기도에도 끝끝내 맞서 싸워낸 국가들. 제국주의의 무례한 침공을 이겨내고, 경제적 제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국가들. 이들을 승자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이유다.

책은 일곱 개 국가들을 각각 필자 한 명씩 맡아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간략한 역사와 각 국가들이 미국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그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다들 저마다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미국의 침략, 간섭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힘 좀 있다고 다른 나라를 멋대로 침공하고, 1퍼센트 부자들만을 위한 신자유주의 경제를 전 세계에 강요하는 나라, 미국” 

이러한 미국에 대항해 국가의 자존심을 지켜낸 나라들. 물론 세계를 보는 시각과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저마다 다 다른 상황에서 이 책이 모든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 내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돌이켜 볼 때, 책의 내용 중 사실과 다른 것을 서술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의 반미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의식을 역사적 사실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한다. 미국이 지금까지 저질러왔던 분명한 사실. 그 사실에 기초해 쓰여진 글이기에 믿음이 간다. 물론 내 취향이 책과 비교적 잘 맞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러 번 말했지만, “우리 안의 미국”은 생각보다 매우 깊숙이 내재화되어 있다. 행여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우리 정부의 오랜 습성과 미국 문화에 거의 100% 동화되어 있는 국민들의 심성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에 반하는 이른 바 반미 의식도 상당 수 존재하는 것이 우리이긴 하다. 이러한 미국에 대한 이중성. 우리가 진정 우리로 살 수 있는 길에 필요한 고민을 제공해준다.

부시 정권 8년 사이 미국은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겉으로나마 평화를 이야기하고 공존을 이야기하던 클린턴 정부와는 전혀 다르게 일방적으로 힘에 기초한 정책을 추진했기에, 많은 이들이 미국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진면목은 언제나 같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오바마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오만하게도 자신의 적들을 “악”이라 불렀다. 명확한 이분법 논리, 전혀 바르지 못한 종교적 오만이다. 예수님이 이슬람 민족을 악이라 부른 적이 있던가. 북을 악마라 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과 학살을 더 죄악시 하지 않으실까.

영원한 동경의 대상, 절대 우방, 혈맹, 우리의 다정한 친구.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제 시급한 교정을 필요로 한다. 쓸데없이 뒤통수 얻어맞고 울지 말고, 다시 한 번 미국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영원한 우방 따위는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한 국제관계의 역학구조 속에 우리는 단 한 순간 미국에게 버림받을 수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젠 우리 스스로 살아야 한다. 더 이상 비굴함과 아첨으로, 막연한 믿음으로, 저열한 사대주의로 생존을 모색할 순 없지 않은가. 미국과 맞짱을 떴던 국가들을 모두 긍정하고 받아들일 순 없다. 각 국가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의 몫이다. 저자들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독자들은 조금은 깨어날지 모른다. 미국이 얼마나 하찮고도 도덕적 정당성을 결여한 국가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책이 전해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책이 될 것이다. 무턱대고 쿠바가 싫고, 북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속는 셈 치고 한 번 읽어보시라.

울화통 터지면서도 속이 시원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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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2016-02-0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엉덩이 딱을 때나 코 풀때 쓰면 참 좋겠네요. ㅍㅎㅎㅎㅎ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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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러울 정도로 글 잘 쓰는 이들이 많다. 다양한 개성과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많은 글쓰기 고수들을 봐왔다. 나의 무디기만 한 펜과 어리석음이 부끄러울 정도로 세상엔 참 뛰어난 이들이 많다.

하지만 애석하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책과 글들을 읽어왔지만, 내가 진정 배우고 싶은, 흉내 내고 싶은 사람은 의외로 매우 드물었다. 나의 거만함과 속 좁음 탓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선뜻 찬사와 감탄은 나올 수 있지만, 진심으로 경외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을 준 이들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손석춘 선생의 글은 때문에 내게 매우 의미 있고, 또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 선생의 글을 흉내 내려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나의 직업을 떠나 현재까지 부동의 글 스승이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과 함께 하지 못하는 글은 이미 생명을 잃은 죽은 글이다. 헛짓거리이며,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무의미한 감정의 배설일 것이다. 자신의 글과 일치하는 행동, 삶.
때문이다.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가.

책은 2002년 처음 발간됐다. 그 후 많은 기자 지망생과 또한 언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책을 읽어나갔다. 지금은 절판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책을 구함에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여전히 찾고, 읽고 있는 책이다.

부자신문, 까놓고 말하자. 조․중․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난한 독자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상위 1%의 부자들이 아닌 대다수 서민들이다.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상당수 서민들은 부자신문을 사서 읽는다. 자신들의 처지, 고통에는 눈을 감고 오직 부자들만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기 바쁜, 그것도 사실과 다른 소설에 비견될 정도로 허구적인 기사들도 유감없이 쏟아내는 신문을 보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2000년, 2001년 베스트셀러였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시 돈에 환장한 대한민국과 언론들은 다투어 책의 성공 비결과 함께 오직 부자가 되기 위한 전략과 기술 찾기에 올인한 바 있다. 글쎄, 그래서 지금 과연 그 책을 읽은 100만이 넘는 독자들이 전부 부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저자만 재벌이 되지 않았을까.  


선생은 대한민국의 부자신문들,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교묘한 부자들의 논리를 밝힌다. 아울러 그들에게 내침을 당하면서도 습관처럼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순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가난한 것은 아니냐고.

총 4부로 이루어진 책은 1부에서 부자 신문들이 일본제국주의와 미군정, 그 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정권과 손잡고 부자 신문으로 커온 과정을 설명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친일에 매진하고, 군사정권과의 밀착한 대가로 그들이 어떠한 보상을 받았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2부는 독재정권 당시 세무조사의 성역이었던 부자 신문들이 김대중 정권 당시 세무조사에 어떠한 논리로 저항했는지, 언론자유라는 기막힌 논리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저열한 모습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이를 탈세를 저지른 부자 신문들이 사회공기인 신문지면을 자사 이익을 방어하는데 탕진하는 사유화의 폐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3부는 부자 신문들의 공통점인 친미 사대주의와 반공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전후 부자신문들의 공격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는 제2차 정상회담 역시 다르지 않았다. 통일을 부정하고 색깔론으로 일관한 부자 신문들의 횡포는 고스란히 남북관계의 후퇴 내지 정체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제3차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 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4부는 부자 신문의 따뜻한 품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싸우며 고뇌하고 있는 젊은 언론인들과 언론개혁운동을 살펴본다.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중동과 싸웠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중고 학생들과 싸운다는 이야기가 촛불정국에서 심심치 않게 나온 바 있다.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은 거대 보수 언론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의 죽음에 조중동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누가 믿을까. 노 대통령이 지나치게 보수 언론들과 충돌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그 보수 언론들이 어떤 만행과 횡포를 부렸는지는 정확히 비판하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들은 철저히 뭉친다. 그게 진보, 혹은 대다수 가난한 독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지금도 보수 언론들은 맹활약 중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사실 더욱 살맛이 난다. 언론법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방송법으로 거대 언론들은 방송사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이 주주인 언론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나 방송이 나올 수 없음은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식이다. 보수 수구 언론들은 지금이 영원하길 꿈꿀 것이다.

그래서이다. 분통 터지고 짜증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알아야 대항할 수 있고, 알아야 싸울 수 있다. 내가 왜 부자들의 논리, 기득권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찌라시 신문을 읽어야 하는지, 왜 활자 공해, 종이 낭비의 신문들이 사라져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 4~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뭐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신문들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젊은 세대들이 주류로 올라가는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종이 신문들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것저것 다른 사업들을 함께 벌이고 있는 언론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러한 신문들 중 과연 진보적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신문이 얼마나 될까. 우울한 미래다.

나 역시 신문을 구독한다. 비록 게으름과 시간에 치여 온전히 다 볼 순 없어도, 아울러 인터넷 클릭 몇 방이면 대충 소식들을 알 수 있어도, 굳이 신문을 구독한다. 어떤 의무라고도 생각한다. 이대로 거대 자본의 언론들이 사회를, 국가를 점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쓰레기들이 정상이 되는 시대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신문들이 과연 어떤 신문들이었는지, 언론의 참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들을 신문이라고, 혹은 언론이라고 믿고 봐왔는지, 책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필독을 권한다.

아울러! 전기 히터나 선풍기, 자전거에 양심을 팔지는 말자. 정말 부끄럽고 자세 안 나오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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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혹시 ‘야설’을 아시는가? ‘야동’이란 단어가 ‘야구 동영상’이 아님을 아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야설은 ‘야한 소설’을 뜻한다.

야동과 마찬가지로 야설 역시 평범하지 않은 내용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 중 전형적인 것을 든다면? 바로 직장 상사 부인과의 스캔들이다. 어찌 보면 식상한 설정이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야설 전문가인 것 같아 민망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 《Red Book》한 번 안 읽어본 남자와는 사랑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아, 더 민망하다. 

아무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게 된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뭐야, 이 식상한 야설은!”이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소설은 단순한 야설이 아니다.

일단 작가를 보자. 옌롄커는 루쉰 문학상과 라오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그저 그런’ 작가가 아니라는 말씀. 또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아울러 제목이 주는 의미심장함도 주목해야 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이는 마오쩌둥이 1944년 발표한 유명한 정치적 슬로건이다. 1944년, 혁명동지였던 중국공산당 전사 장쓰더가 목탄 탄광에서 갱도 붕괴로 사망하자 마오는 “장쓰더 동지는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태산보다 중요하다”며 인민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했다. 그 연설의 제목이 바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다.

그 후 이 말은 혁명언어의 경전이 되었고 무소불위의 금언이 되었다. 혁명 정신의 상징이 된 것이다. 바로 이 혁명의 상징을 작가는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직장 상사와의 대책 없는 사랑에 마오의 위대한 어록을 접목시킨 것이다. 소설에서 이 말은 섹스를 위한 최음제 역할을 맡는다. 파격적인 변신이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은 2005년 중국의 어느 격월간 문예지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분량이 삭제된 채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은 중앙선전부의 긴급 명령에 의해 3만 권에 달하는 책이 전량 회수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른 바 5금(禁) 조치가 취해졌다. 5금은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벌하다. 무슨 반혁명적인 내용이 담겼기에 이리 가혹한 조치를 취했을까.

혁명은 가혹하다. 혁명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구속과 고통이 따른다. 그럼에도 혁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마오라는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로 인해 중국의 모든 인민들은 혁명의 길로 나섰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중국의 역사가 말해주듯, 중국 혁명의 역사는 인민들의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욕망은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홍위병의 광기는 어쩌면 억압되었던 중국 인민들의 뒤틀린 분출이었을지 모른다. 지금도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한 가정에서 한 자녀 이상을 낳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산하제한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국가다.

소설은 혁명 앞에서 억압당해온 인간의 본성,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마오의 위대한 어록을 섹스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리는 파격은 때문에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당혹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아마도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 마오의 석고상을 실수로 부셔버린 주인공 우다왕과 사단장의 부인인 류롄이 이어 마오 선집, 글이 담긴 액자, 상징물 등을 모조리 부셔버리는 장면. 그야말로 압권이다. 김일성의 사진이나 선집을 북의 인민들이 파괴한다고 생각을 해보라. 상상이 가는가.

불륜의 두 연인은 자신의 사랑이 진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의 모든 것을 부순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불륜인 것은 사실이다. 영원할 순 없다. 젊은 남녀의 뜨겁고도 격정적인 사랑은 현실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저자의 파격적이고도 섬세한 성애의 묘사는 때문에 흥분과 자극보다는 씁쓸함을 전해준다. 그 어떤 사랑도, 열정도, 욕망도 혁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시골에 있는 아내와 부모, 자식을 도시로 데려오기 위해 군 복무에 충실히 임하던 우다왕은 사단장의 전속 요리사로 차출되어 사단장의 관사에서 머물게 된다. 하지만 사단장은 오랜 시간 관사를 비우게 되고, 그의 젊은 아내 류롄은 우다왕에게 집요하게 접근하고, 요구한다. 마오의 위대한 말씀과 같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고. 류롄 역시 사랑을 갈구하고 보살핌이 간절했던 인민일 따름이다.

우다왕의 심리적 갈등과 류롄에 대한 욕정.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둘의 뜨거운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그 끝은 비극이 아닌 씁쓸함이 먼저 느껴진다. 더 이상 언급하면 안 될 듯하다.

표지의 모습만 보고 행여 라도 《색계》를 떠올려 책을 집어든 이라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색계에서처럼 유연한 신체를 가진 자들만이 도전할 수 있는 희한한 체위가 등장하지도 않고, 급박함이 덜하다. 하지만 곱씹어 읽을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수려한 문체와 섬세한 심리 묘사, 격정적인 섹스 장면은 분명 이 작품의 미덕이다.

중국은 알듯 하면서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나라다. 우리와 오랜 시간동안 애증의 역사를 공유해왔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 어색하다. 그 어색함을 영영 내버려둘 일은 아니다. 혁명의 치열함 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자본주의의 맹아로 변해버린 중국. 그리고 그러한 중국과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국의 혁명을 바라보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물론 재미도 쏠쏠하다. 야설의 추억을 기억하는 그대여. 그렇다고 몰래 숨어서 보진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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