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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부러울 정도로 글 잘 쓰는 이들이 많다. 다양한 개성과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많은 글쓰기 고수들을 봐왔다. 나의 무디기만 한 펜과 어리석음이 부끄러울 정도로 세상엔 참 뛰어난 이들이 많다.
하지만 애석하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책과 글들을 읽어왔지만, 내가 진정 배우고 싶은, 흉내 내고 싶은 사람은 의외로 매우 드물었다. 나의 거만함과 속 좁음 탓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선뜻 찬사와 감탄은 나올 수 있지만, 진심으로 경외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을 준 이들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손석춘 선생의 글은 때문에 내게 매우 의미 있고, 또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 선생의 글을 흉내 내려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나의 직업을 떠나 현재까지 부동의 글 스승이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과 함께 하지 못하는 글은 이미 생명을 잃은 죽은 글이다. 헛짓거리이며,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무의미한 감정의 배설일 것이다. 자신의 글과 일치하는 행동, 삶.
때문이다.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가.
책은 2002년 처음 발간됐다. 그 후 많은 기자 지망생과 또한 언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책을 읽어나갔다. 지금은 절판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책을 구함에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여전히 찾고, 읽고 있는 책이다.
부자신문, 까놓고 말하자. 조․중․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난한 독자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상위 1%의 부자들이 아닌 대다수 서민들이다.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상당수 서민들은 부자신문을 사서 읽는다. 자신들의 처지, 고통에는 눈을 감고 오직 부자들만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기 바쁜, 그것도 사실과 다른 소설에 비견될 정도로 허구적인 기사들도 유감없이 쏟아내는 신문을 보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2000년, 2001년 베스트셀러였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시 돈에 환장한 대한민국과 언론들은 다투어 책의 성공 비결과 함께 오직 부자가 되기 위한 전략과 기술 찾기에 올인한 바 있다. 글쎄, 그래서 지금 과연 그 책을 읽은 100만이 넘는 독자들이 전부 부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저자만 재벌이 되지 않았을까.
선생은 대한민국의 부자신문들,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교묘한 부자들의 논리를 밝힌다. 아울러 그들에게 내침을 당하면서도 습관처럼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순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가난한 것은 아니냐고.
총 4부로 이루어진 책은 1부에서 부자 신문들이 일본제국주의와 미군정, 그 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정권과 손잡고 부자 신문으로 커온 과정을 설명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친일에 매진하고, 군사정권과의 밀착한 대가로 그들이 어떠한 보상을 받았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2부는 독재정권 당시 세무조사의 성역이었던 부자 신문들이 김대중 정권 당시 세무조사에 어떠한 논리로 저항했는지, 언론자유라는 기막힌 논리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저열한 모습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이를 탈세를 저지른 부자 신문들이 사회공기인 신문지면을 자사 이익을 방어하는데 탕진하는 사유화의 폐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3부는 부자 신문들의 공통점인 친미 사대주의와 반공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전후 부자신문들의 공격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는 제2차 정상회담 역시 다르지 않았다. 통일을 부정하고 색깔론으로 일관한 부자 신문들의 횡포는 고스란히 남북관계의 후퇴 내지 정체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제3차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 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4부는 부자 신문의 따뜻한 품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싸우며 고뇌하고 있는 젊은 언론인들과 언론개혁운동을 살펴본다.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중동과 싸웠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중고 학생들과 싸운다는 이야기가 촛불정국에서 심심치 않게 나온 바 있다.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은 거대 보수 언론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의 죽음에 조중동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누가 믿을까. 노 대통령이 지나치게 보수 언론들과 충돌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그 보수 언론들이 어떤 만행과 횡포를 부렸는지는 정확히 비판하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들은 철저히 뭉친다. 그게 진보, 혹은 대다수 가난한 독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지금도 보수 언론들은 맹활약 중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사실 더욱 살맛이 난다. 언론법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방송법으로 거대 언론들은 방송사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이 주주인 언론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나 방송이 나올 수 없음은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식이다. 보수 수구 언론들은 지금이 영원하길 꿈꿀 것이다.
그래서이다. 분통 터지고 짜증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알아야 대항할 수 있고, 알아야 싸울 수 있다. 내가 왜 부자들의 논리, 기득권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찌라시 신문을 읽어야 하는지, 왜 활자 공해, 종이 낭비의 신문들이 사라져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 4~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뭐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신문들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젊은 세대들이 주류로 올라가는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종이 신문들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것저것 다른 사업들을 함께 벌이고 있는 언론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러한 신문들 중 과연 진보적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신문이 얼마나 될까. 우울한 미래다.
나 역시 신문을 구독한다. 비록 게으름과 시간에 치여 온전히 다 볼 순 없어도, 아울러 인터넷 클릭 몇 방이면 대충 소식들을 알 수 있어도, 굳이 신문을 구독한다. 어떤 의무라고도 생각한다. 이대로 거대 자본의 언론들이 사회를, 국가를 점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쓰레기들이 정상이 되는 시대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신문들이 과연 어떤 신문들이었는지, 언론의 참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들을 신문이라고, 혹은 언론이라고 믿고 봐왔는지, 책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필독을 권한다.
아울러! 전기 히터나 선풍기, 자전거에 양심을 팔지는 말자. 정말 부끄럽고 자세 안 나오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