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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ㅣ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평점 :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 여름에 읽은 책을 새삼 다시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책장을 덮은 다음 다가온 숨 쉴 수 없는 아픔과 격정을. 저자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했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한심한 쓰레기임을 깨달았다. 삶은 그토록 구차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말하던 저자. 말로는 표현하기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자로, 또한 노동운동가로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저자. 하지만 자신과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오늘도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는 저자. 그는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이 땅의 노동자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묵직함, 아픔, 쓰라림을 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깜냥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노동이라는 표현으로 매겨질 수 있는지도 자신할 수 없다. 몸으로 직접 치열하게 부딪치지 않는 것을 온전히 노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도 자신할 수 없다.
물론 정신적인 노동 역시 노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육체노동 못지않은 공력이 소모되고, 힘들기도 하다. 이 땅의 모든 수험생들 역시 지독한 노동자들 아닌가. 하지만 저자의 삶을 살짝이라도 들여다 본 이들이 과연 노동을 이처럼 넓게, 광범위하게 부를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모두들 자신의 일들이 가장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 부르더라도.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노동자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운동가로 진화해왔다. 그리고 정말 치열하게, 살기 위해 싸워왔다. 그 싸움이 정녕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지언정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주와 기득권 세력들이 보기엔 하찮을 정도로 작은 권리를 얻기 위해 죽어갔다. 그 현장에서 언제나 함께 했던 그는 때문에 소금꽃 나무의 서러움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안다. 너무나 잘 안다.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 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는 아시겠지요?”
얼마 전 철도노조의 파업이 한창일 때 이명박 대통령은 “안정된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파업을 하지 않는다며 선진국의 노동자답게 굴라고 훈계까지 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파업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무식함을 무슨 자랑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알고 있는 분이다. 유럽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가? 아니 보려 하지 않겠지.
노동자는 다만 입 닥치고 주는 돈 받고 살라는 말이다. 괜히 권리네 뭐네 나불대면서 나서면 패가망신한다는 경고다. 파업을 철회한 직후 사측과 정부는 이구동성으로 파업 철회는 잘 했지만,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동안 끼친 손해를 물어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동네 멍멍이도 고양이도 웃는다. 어처구니없어서.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강철의 대오도 더 이상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 형, 누나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다. 꿈이 있고, 또 꿈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심심해서, 혹은 부당하게 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없다. 아울러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탄압당하면 그 다음은 일반 시민들이 탄압 당하게 된다. 수순이다. 때문에 함께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말이다.
철도 노조의 파업이 끝나자,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이명박 정권이 워낙 세게 나가니 그게 무서워 서둘러 철회했다고 지적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다. 동의한다. 무서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하찮게 여기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시민들을 볼모로 벌이는 협박 따위로 매도한 정부가 진정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정작 그들이 힘들게 투쟁하고 있을 때 응원의 한 마디라도 던진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닥치심이 현명하다. 투쟁에 있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정부의 탄압이 아니다. 사측의 무자비한 진압이 아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냉소다.
“어머니, 지금은 감옥에 계신 어느 노조 위원장의 일곱 살 난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누구냐?’하고 물으니 ‘노동잡니다’하길래, 그 대답이 하도 맹랑해서 ‘노동자가 누군데?’하고 다시 물으니 ‘역사의 주인이십니다’하더랍니다. 그래요, 어머니. 학교에서 내주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농업’이라고 떳떳하게 쓰지 못하고 ‘상업’이라고 써 내고는 온종일 가슴이 오그라들어 있던 저처럼 못난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 직업란에 ‘노동자’라고 써 내는 당당함부터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신노예주의다. 단순명료하다. 노동자가 부품이 되어 사용 기한까지 사용되다 폐기되는 것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국제 금융이 전 세계를 활보해도 공장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신자유주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자본계급에게 신자유주의는 복음이다.
우리는 노동자다. 청계천은 이명박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이 땅위의 모든 역사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의 삶이 한 노동자의 고난의 역사가 아니라 이 땅의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역사였음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파업을 감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노동자들에게 격려의 한마디, 박카스 한 병을 건네는 사소한 용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눈을 감고 입 다물고 한 세상 편히 살다 가고픈 이라면 감히 《소금꽃나무》를 펼치지 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을 욕보이는 일이다. 편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자신부터 변해야 할 것이다. 대가리가 아닌 몸으로 깨우치고 배워야 할 일이다. 눈이 아닌 몸으로 울어야 할 일이다.
아직도 차디찬 냉동고에 누워있는 용산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내 눈물과 사랑을 바친다.
『“변호인이 없어도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재판장은 말했다. “그렇다면 돌아앉게 해주십시오. 나는 변호인이 없습니다…….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나지막하게 떨리면서 법정에 퍼지던 피고인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어서가 아니다. 그날 나는 줄곧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이던 어떤 현실을 10미터 거리에서 직접 보았다. 최소한의 인권조차 무시당한 채,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권력이 한쪽의 증거만 취사선택해 제시하는 부당한 법정에 한 인간이 피고인으로 계속 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가 있다. 나는 그 나라의 국민이었다.』
-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