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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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난민과 이재민 약 3900만 명(아이티 지진으로 더 늘었을 것), 무력분쟁 사망자의 90%이상이 일반 시민, 그 중 80%이상이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여성과 어린이, 전 세계적으로 매설된 소형지뢰의 수 약 2억 개 이상, 매달 800명의 어린이가 지뢰를 밟아 죽거나 발목 등 신체 일부가 절단, 시에라리온의 경우 반군의 80%가 18세 미만 소년병, 2002년~2006년에만 전 세계 어린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2개 국가 약 15억 명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분쟁 상황에 휘말림》




아이티 지진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건물더미에 파묻힌 아이들, 끝없이 이어지는 시신들의 행렬. 절망과 비탄에 빠진 아이티 국민들을 바라보는 그 누구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전 세계가 아이티를 돕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고 있다. 우리 역시 의료진을 파견하고 천만 달러의 구호금을 내기로 했다. 당연하고도 잘 한 일이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이 마치 점령군처럼(점령군 맞다) 아이티 대통령 궁을 접수하고, 이에 대해 프랑스는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인다. 천재지변 앞에 선진국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왜 그럴까. 아이티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티는 서구 열강이 발견(발견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엄연한 공동체였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게 아니라 원래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공동체였던 것과 같다. 뭔 얼어 죽을 신대륙. 지랄하고 있다 아주.)한 이래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 에스파냐인들은 아이티에 원주민들을 학살과 질병으로 멸종시켰고, 그들의 노동력을 대신할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이주시켰다. 그들이 현 아이티인들의 조상이다.




이후 에스파냐에 이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아이티는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는 커피, 설탕, 노예무역의 주 공급지가 되었다. 때문에 당시 서인도 제도 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가장 번창했다고 하지만, 그 번성은 오직 유럽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기록엔 당시 아이티 흑인 노예들의 평균 수명이 21살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21살!




한편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이들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을 꿈꾼 아이러니! 아이티는 결국 피의 대가로 1804년 세계 최초로 노예 해방 혁명을 성공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이는 훗날 중남미, 쿠바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아이티의 독립은 커다란 시련을 함께 가져왔다. 강대국들의 폭압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아이티에서 물러난 프랑스는 그러나, 해상 봉쇄를 통해 아이티를 고립시켰고, 자국 노예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우려로 미국 역시 무역 제재 조치를 취했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 국가 아이티를 고사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아이티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 역시 잔혹했다. 프랑스는 해상 봉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지금 환율로 210억 달러의 금액이다. 상상해보라. 210억 달러.




신생 국가로서 돈이 없던 아이티는 결국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오늘날 아이티가 살인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티는 다시 옛 주인들의 돈에 묶인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아이티가 배상금을 갚은 건 1947년이었다. 122년이 걸렸다. 그 와중에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아이티를 점령했다. 언제나 써먹는 더러운 레퍼토리지만 아이티의 내정이 불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본 목적은 당시 확대되던 독일의 영향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 후 아이티는 군사 독재, 무장 소요, 쿠데타, 외세의 개입, 서구 열강의 경제 재재로 이어지는 참혹함 속에서 살인적인 그리고 만성적인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을 견뎌야만 했다. 그래놓고 세계 선진국들은 아이티를 세계 최빈국이라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이제 대지진. 지금 아이티의 모습이다.




책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왜 아이티의 역사를 주절거릴까. 너무 역겹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하루에 중국인들 몇 백명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물 쓰듯 써버리며 온갖 추잡한 짓거리는 다하고 돌아댕기는 스타들이 아이티를 돕자며 파티 열고 술 처먹는 모습이나, 아이티를 돕겠다며 군 병력을 파견해 미리 깃발 꽂고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이는 미국이나, 슬쩍 가서 돌 몇 개 나르고 뽀샵한 사진 우르르 찍어서 이미지 관리 하는 몇 몇 연예인들이나, 전쟁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해서 먹고 사는 CNN이 방송 도중 아이가 죽었다고 울먹거리는 꼬라지나.




너무 엿 같아서 그런다. 그들은 역사를 알까. 자신들의 선조랄 것도 없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짓으로 아이티 아이들이 진흙으로 만든 쿠키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말이다.




전쟁? 인류 역사 5000년 중 92%의 시간을 서로 살육하며 보낸 인류다. 여전히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는 죽이고 죽고 있다. 그 전쟁의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지금 “피스!! 신에 가호가 영원하기를!!”주절거리는 새끼들이 먼저 뼈를 깎고 반성부터 하잔 말이다. 그럼 전쟁의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현 상황에선 기대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우리는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그 많은 베트남 신부들의 아버지 혹은 삼촌, 오빠들을 살육했다. 우리는 이라크에도 군대를 보냈다. 이라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은 태극기를 보며 환호보다는 저주를 퍼붓는다. 우리는 아프간에도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한다. 그리고 원전이라는 빌어먹을 “국가적 성취” 때문에 아랍에미리트에도 군대를 보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우리는 결코 전쟁에 대해 무관하지 않다. 60년 전에 같은 형제끼리 무참히 살육을 저질렀던 민족이다. 우린 평화를 논하기에 앞서 전쟁을 기억하고 참회하고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프랑스가, 영국이 감히 평화를 말하고 공동체를 말하려면, 무엇보다!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고 성찰해야 한다.




탱크로 짓밟아버리고, 다 죽여 버리고, 그 다음에 평화를 논하겠다는 개수작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노벨상을 땡겨받은 오바마는 이라크, 아프간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 진치고 앉아있는 미군을 빼야 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싫으면 토해내라. 얼마하지도 않는 메달을.




책은 전쟁이 왜 일어나며, 전쟁으로 얼마나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갔으며, 죽어나가고 있으며, 죽어나갈 것인지를 명쾌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일개 시민인, 하찮은 개인이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답은 물론 하나뿐이다. 고통과의 연대다. 타인의 고통에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성을 되찾는 길이다. 그게 뭔 도움이 되냐고, 엉엉 울어 제낀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뀐다.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에 전 국민이 울어, 미국은 빌어먹을 소파 협정을 바꾸려는 시늉이라도 했고, 이라크 파병을 요구할 때에도 조심조심했다.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별 것이 아니다. 절대 우리는 하찮지 않다.




전쟁마저 이벤트로, 돈벌이로 치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인간성을 지켜나가고 타인의 눈물에 관심을 갖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억하라. 우리의 눈물은 타인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마를 수 있다. 그 반대도 물론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 우리가 먼저 전쟁의 지독한 고리를 끊어버려야 한다.




때문에 책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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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오바마 북클럽 1
조지프 오닐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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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다른 나라들에는 문명과 법과 합리적인 규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면서도 미국만은 면제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


2001년 9월 11일. 학교 근처 자취방에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방 옆 건물에 사는 친구의 방에 있었다. 지금쯤 십중팔구 헐렸을 게 분명한 내 자취방은 온갖 고양이, 덩치 큰 개들, 닭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농장이었던 데 반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친구의 펜션은 온수 샤워가 언제든지 가능한 ‘럭셔리’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TV가 있었다.


왜 그 시각에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덤으로 껴서 온수 샤워를 하려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영화야?”곁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정말 영화 같은 장면. 미국의 번영,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이 그렇게 영화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와 경탄, 그리고 부러움과 화려함의 대상이었던 뉴욕. 멋진 할리우드 배우들의 로맨스가 펼쳐지고,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뉴욕. 그렇게 뉴욕은 어이없게 무너져 내렸고, 아메리칸 드림은 덧없이 사라졌다.


《네덜란드》는 바로 그 뉴욕에서 살았던, 그리고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가는 뉴욕. 그 곳의 욕망과 절망,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철저한 생존의 법칙. 누구도 돌볼 수 없지만, 또한 누구라도 돌봄 없이는 온전히 숨 쉴 수 없는 곳. 뉴욕은 환상과 낭만보다는 씁쓸한 혼잣말과 퀭한 눈망울이 더 어울리는 도시로 비쳐진다.


“지금까지의 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탈식민주의 작품”이라는 거창한 평가를 제쳐두고라도 《네덜란드》가 주는 난처한 묵직함은 범상치 않다.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뉴욕, 그 안에 살아가는 너무도 다양한 이들의 모습. 주류가 아니기에 때론 더욱 치열하고 때론 더욱 열광적일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치열함과 열정 밑으로 흐르는 불안과 고독.


작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공허함이었다.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이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뉴욕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 온갖 화려한, 그리고 잔인한 명분 속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난폭함 속에서 저마다 여전히 꿈을 안고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허무하면서도 슬프다.


오바마 대통령이 읽었다고 해 더욱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때문에 운이 무척 좋은 작품으로도 해석된다. 저자 역시 시대를 잘 만났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인들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의 동경의 대상, 화려함의 상징이었던 뉴욕이 철저히 타자화 되어 해석되고 보여 지고,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2001년 9월 이전의 뉴욕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미래는 불분명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쌍둥이 빌딩의 침몰은 여전히 미국인들의, 세계인들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아마 그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될 듯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뉴욕의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금 꿈을 꾸는 이들이 생긴다는 점이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도시, 뉴욕에 여전히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며, 좌절할 테고, 잊혀져갈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뉴욕은 여전히 잿빛이다. 미국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촌놈이라, 더더욱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내 기준으론 그렇다. 살아가면서 미국이란 국가에 대해 긍정보단 회의와 부정이 늘어나는 이유도 어찌할 수 없다. 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고 다분히 객관적이다. 혹시 모른다. 어느 때고 미국을 가게 된다면, 뉴욕을 바라보게 된다면 한스와 같은 삶을 살아갈지, 아님 척 램키순이 될지, 아마도 척이 더 유력할 듯.


퇴근 시간 난처해하며, 시내를 방황하는 많은 이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빌딩에 들어갔다, 빌딩에서 나오고, 구석을 찾아 들어갔다, 다시금 나온다. 끊임없이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알리려 애쓰고, 외롭지 않음을 선포한다. 하지만 DMB, PMP,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는 그들은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죽을 정도로.


뉴욕은 서울이다. 서울은 동경이고, 동경은 북경이다. 뉴욕이 주는 묵직함에 우리가 매일 놀라면서도 매일 지나치는 이유다. 서울 안에 얼마나 많은 척이, 한스가 살아가고 있을지 우리는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쓰라린 고독과 불안감. 이는 한 잔의 술잔으로, 지나친 수다로도 덮을 수 없다. 가족의 따뜻한 위로와 이웃들의 말없는 동행이 다시금 희망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척이 그리던 고향 땅은 온갖 미개한 것으로 설명된다. 척은 다시 고향보다는 뉴욕에 묻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척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결국 그는 고향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뉴욕에 묻히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즐거운 귀향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뉴욕에서의 한바탕 멋진 꿈을 꾸었던 척 램키순.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 그 어디에서도 편안함과 안정을 얻기 힘들었던 한스.


책 읽는 재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네덜란드》지만, 난처한 외로움과 불안을 멋들어지게 묘사한 범상치 않은 작품임은 확실한 듯하다. 오늘도 또 다시 화려한 꿈을 찾아 뛰어드는 수많은 척 램키순을 위해 한 잔의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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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 - 7인의 명사들의 들려주는 행복동맹 이야기
노회찬 외 지음 / 해피스토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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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특강〉을 시작으로 강연을 글로 옮긴 책들이 최근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일단 〈철수와영희〉에서 출판한 〈작은책〉강연 시리즈 3권을 비롯해 여타 단체들에서도 강연을 글로 모아 다시 책으로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단 강연은 책보다 쉽다. 청중을 상대로 직접 대화하는 것이기에 글보다 평이해야 하고, 또한 재미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어도 졸린 강연 듣는 것보다 고역도 없기 때문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설립한 마들연구소에서 매월 열고 있는 ‘명사 초청 월례 특강’에서 진행된 7인의 강연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언뜻 제목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 제목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 땅 이 시간 행복하다면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이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조세희 작가가 했던 말을 옮긴 것이다. 오직 나만 알고 나를 위해 살아야 하는 물신주의와 경쟁지상주의가 지배하는 바로 이 땅 이 시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되묻는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행복에 길들여진 바보, 혹은 남의 것을 빼앗아 배부른 도둑.


난 그 중 무엇일까. 건방진 생각일지 몰라도 적어도 난 지금 그리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언가를 빼앗은 경험이 없다고 믿고 싶다. 물론 나도 모르는 사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누리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너무나 죄송스럽고 염치없는 짓이다.


7명의 강사들은 어떠한 하나의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지 않았다. 때문에 각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르다. 모두들 자신의 삶과 경험에 기초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중심은 느껴진다. 그것은 ‘진실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그것도 거창하게 ‘더불어 행복해지는 법’. 참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문구. 더불어. 함께. 같이.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는 게 병’이라고 말할 만큼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게 약인지도 모르겠다. 단단히 어리석다. 하지만 만약 내가 누리고 또는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물질, 경험, 행동들이 온전히 나로써 시작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받았고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이때부터는 말이 달라진다. 병이 나더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게 현실이다. 난 결코 온전히 홀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그게 현실이고 정답이다.


‘불행으로 동맹 맺은 사회(조세희)’에서 다시 행복으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내가 홀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일이다. 먼 아이티의 지진이 나와 아무런 상관 없다고 믿지 않고, 4대강이 쑥밭이 되는 것이 내 인생과 뭔 놈의 상관이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희망의 단초다.


억지로 그렇게 믿고 살라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니면, 도둑이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다만 모른 척 하는 것이다. 아프니까. 힘드니까. 눈물이 흐르니까 말이다.


이웃의 눈물을 외면한다면 결국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게 된다. 아이티를 외면한다면 그 누군가도 당신을 외면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고 ‘그냥 이렇게 살다 죽지 뭐’라고 생각해도 ‘이렇게’살 수 없다. 더욱 후퇴되는, 더욱 끔찍한 현실과 조우해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누군가가 ‘쓸데없는 일’에 나섰다가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고, 눈물을 흘렸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많다. 그 ‘누군가’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기억은 해야 한다.


7명의 강사 모두 친근한 얼굴들이고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다. 물론 호감, 비호감의 개인적 느낌은 다르더라도, 적어도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이 전해주는 ‘행복 동맹’ 맺는 법. 편하게 읽히는 동안,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안 아프게 살살 콕콕 찔러준다.


사실, 좀 아파도 할 말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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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법이라고? - 10년을 거꾸로 돌리는 MB악법 바로보기
강풀 외 지음 / 이매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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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헌법 21조〉


1.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2.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꼭 통과시켜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85개 중점 법안을 세부적으로 검토한 뒤 그 중 31개를 꼭 저지해야 할 법안으로 꼽은 바 있다. 그 31개 법안을 중심으로 만화가들과 여러 논객, 정치인 기타 등등이 한마디씩 보태 만들어낸 책이다. 정말 재미없는 만화책이다. 작가들에겐 미안하다.



하지만 작가들의 죄는 아니다. 내용이 절대로 재미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 사람은 분명 미친 넘이다. 확실하다.



이명박 정권은 지나가는 봉식씨나 돌돌이도 알고 있듯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가장한 1%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사실상 정치라 하기도 민망하다. 그냥 살고 있다. 삽질도 좀 하고 포장도 좀 하면서 말이다.



때문에 이들이 정권 초기 밀어붙이려 한 수많은 법안들을 자세히도 아니고 대충만 훑어봐도 이들의 명확한 정체성과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그런 면에선 솔직하다. 물론 겉으로 포장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서민 운운 하는 소리지만, 그런 걸 진심으로 가슴에 안고 믿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서민들을 위한다고 떠들던 정부는 집권 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를 쳐드시라 안겨주셨고, 용산의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아 살해했으며, 방송법 개정을 통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으려 했다. 또한 불법 더하기 위법 더하기 무도하기까지 한 4대강 사업을 강행했고, 경제가 어렵다고 말한 ‘기밀 누설죄’로 무직인 네티즌을 구속했다.



살기 위해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을 피비린내 나게 진압했고, 시민단체들을 길들이기 위해 탄압과 회유를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 세금 포탈범을 같잖은 이유로 사면시켜주며 “우린 한편이니까”키득키득 거린다.



하지만 국민들은 분노에 앞서 이미 지쳤다. 사는 게 힘들고 정치에 희망을 갖는 게 부질없어 보인다. 6월 2일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지만, 여전히 개혁진보세력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까.



일단 난 “한나라당이 싫지만, 민주당은 더 얄미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서 한나라당 다시 찍을 거냐고. 대안이 싫다고 최악을 또 다시 경험할 거냐고. 진지하게 묻고 싶다. 아예 투표를 하기 싫다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권리 행사가 아니라 한나라당에게 한 표 주는 것이다. 어찌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계급적 자각이 뚜렷한 분들은 자기 소신으로 한나라당을 찍을 수 있다. 원래 부자 분들이 계급적 각성이 몇 백배 투철하지 않은가. 지난 공정택 교육감 선거 때를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들은 반드시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에 맞게 투표한다. 그들이 자기 표를 버리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언가. 80대 20을 넘어 이미 90대 10이 된 상황에서 자신이 90인 줄 모르고 10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함께 연대해 나갈 것인가.



책을 읽으며 내내 고심한 부분이다. 결국 신뢰와 보다 실질적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일단 각성과 성찰,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적어도 그러한 고통과 각성 이후에 다시 국민들에게 신뢰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는다. 그래야 한다. 반MB 연대로 일단 힘이 모이더라도 성찰과 반성 없는 연대는 결국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 정치와 경제 분야에 있어 괄목할만한 지식을 쌓아온 우리 국민들이지만, MB정부의 파렴치를 비교적 쉽게 설명한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그러한 바람으로 작가들은 인세를 받지 않았으며, 출판사는 책값을 5천원으로 내렸다.



우리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나.



정부의 바람대로 헌법 21조를 없애고 싶은 이들은 보지 말고 주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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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어려운 환경, 혹은 선천적인 정신·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용기와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빛나는 삶을 영위하는 감동의 스토리. 그동안 적잖은 이야기들이 있어왔다. 사지가 제대로 펴지지 않는 관절장애와 척추장애, 거기에다 무안구증을 안고 태어나 평생 앞을 볼 수 없는 패트릭 헨리의 삶은 때문에 조금은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의 신체적 장애가 평범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삶 역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 그리고 가슴에 와 닿은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긍정적 자세보다, 그의 열정과 의지보다, 오히려 그를 믿고 지켜주는 가족들이었다. 평범하지 않게 태어난 헨리를 최대한 평범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 가족들의 헌신. 그 헌신에 난 더 큰 울림을 받았다.


미국은 생각보다 복지가 잘 갖춰진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생각보다 선진국이 아니다. 물론 지난 시절 우리 머릿속을 가득 세뇌시켰던 “미국이 최고”라는 생각이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은 사실 그리 잘난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미국이라 해도,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오만한 국가라 해도, 적어도 우리와 비교한다면 미국은 많은 부분 앞서 가고 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자본부의에 찌든 “무식한 양키”에 불과할 지라도 말이다.


장애우에 대한 복지 정책, 여성에 대한, 나아가 사회적으로 보다 관심과 애정, 지원이 필요한 계층에 대한 정책만을 놓고 봐도 그렇다. 우리는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이고, 미국은 그나마 우리보단 낫다는 소리다.


예전에 장애를 가진 자녀를 버리거나 살해라는 끔찍한 일까지 저지른 부모의 이야기가 종종 뉴스를 장식하곤 했다. 내 기억으로는 부모 역시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안다. 그런 뉴스들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부모를 욕하고 비난하고, 천륜을 저버린 극악무도한 이들로 매도한다.


물론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러한 선택까지 하게 되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웠다면, 과연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쫓겼을까. 우리가 장애우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들을 기울여왔는지 되돌아본다면 과연 그래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진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려는데, 학교 측에서 “네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면 장애로 인해 겪는 어떤 불편도 감수하겠다. 이에 대해 항의나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고 했다. 다른 어떤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이야기다.

유럽이나 하다못해 미국에서라도 이런 요구를 하는 학교가 있다면, 과연 그 학교는 무사할 수 있을까. 참담한 이야기다.


패트릭 헨리의 삶은 이른 바 정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보기엔 한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과 불편은 어쩌면 우리가 안고 사는 한심한 편견과 무관심,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장애우들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엔 딱 그만큼의 우리의 책임이 있다. 이 땅의 장애우들에게 패트릭 헨리는 단지 부러운 친구일 뿐이다.


패트릭 헨리는 책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긍정적인 사고, 두려움에 대한 의지, 용기와 투지. 모두 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먼저, 사랑을 해야 한다. 먼저 사랑이 필요하다. 그 사랑이 있어야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사랑이 있어야만 주위를 돌아볼 수 있고,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다.


그는 당당히 자신이 가능성이라 말한다. 그 가능성을 먼저 우리가 구해야 한다. 휠체어가 탈 수 있는 버스 몇 개 만들고 마치 장애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양 거들먹거리는 이들이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장애를 보지 못한 채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모든 이들의 ‘인간답지 않은’심성을 버릴 수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고 노력해야 한다.


곁들이로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멋지게 살아가는 패트릭 헨리에 박수를 보내며, 이 땅의 모든 장애우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장애우들의 삶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사명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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