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오바마 북클럽 1
조지프 오닐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다른 나라들에는 문명과 법과 합리적인 규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면서도 미국만은 면제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


2001년 9월 11일. 학교 근처 자취방에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방 옆 건물에 사는 친구의 방에 있었다. 지금쯤 십중팔구 헐렸을 게 분명한 내 자취방은 온갖 고양이, 덩치 큰 개들, 닭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농장이었던 데 반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친구의 펜션은 온수 샤워가 언제든지 가능한 ‘럭셔리’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TV가 있었다.


왜 그 시각에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덤으로 껴서 온수 샤워를 하려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영화야?”곁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정말 영화 같은 장면. 미국의 번영,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이 그렇게 영화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와 경탄, 그리고 부러움과 화려함의 대상이었던 뉴욕. 멋진 할리우드 배우들의 로맨스가 펼쳐지고,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뉴욕. 그렇게 뉴욕은 어이없게 무너져 내렸고, 아메리칸 드림은 덧없이 사라졌다.


《네덜란드》는 바로 그 뉴욕에서 살았던, 그리고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가는 뉴욕. 그 곳의 욕망과 절망,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철저한 생존의 법칙. 누구도 돌볼 수 없지만, 또한 누구라도 돌봄 없이는 온전히 숨 쉴 수 없는 곳. 뉴욕은 환상과 낭만보다는 씁쓸한 혼잣말과 퀭한 눈망울이 더 어울리는 도시로 비쳐진다.


“지금까지의 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탈식민주의 작품”이라는 거창한 평가를 제쳐두고라도 《네덜란드》가 주는 난처한 묵직함은 범상치 않다.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뉴욕, 그 안에 살아가는 너무도 다양한 이들의 모습. 주류가 아니기에 때론 더욱 치열하고 때론 더욱 열광적일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치열함과 열정 밑으로 흐르는 불안과 고독.


작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공허함이었다.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이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뉴욕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 온갖 화려한, 그리고 잔인한 명분 속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난폭함 속에서 저마다 여전히 꿈을 안고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허무하면서도 슬프다.


오바마 대통령이 읽었다고 해 더욱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때문에 운이 무척 좋은 작품으로도 해석된다. 저자 역시 시대를 잘 만났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인들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의 동경의 대상, 화려함의 상징이었던 뉴욕이 철저히 타자화 되어 해석되고 보여 지고,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2001년 9월 이전의 뉴욕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미래는 불분명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쌍둥이 빌딩의 침몰은 여전히 미국인들의, 세계인들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아마 그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될 듯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뉴욕의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금 꿈을 꾸는 이들이 생긴다는 점이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도시, 뉴욕에 여전히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며, 좌절할 테고, 잊혀져갈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뉴욕은 여전히 잿빛이다. 미국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촌놈이라, 더더욱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내 기준으론 그렇다. 살아가면서 미국이란 국가에 대해 긍정보단 회의와 부정이 늘어나는 이유도 어찌할 수 없다. 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고 다분히 객관적이다. 혹시 모른다. 어느 때고 미국을 가게 된다면, 뉴욕을 바라보게 된다면 한스와 같은 삶을 살아갈지, 아님 척 램키순이 될지, 아마도 척이 더 유력할 듯.


퇴근 시간 난처해하며, 시내를 방황하는 많은 이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빌딩에 들어갔다, 빌딩에서 나오고, 구석을 찾아 들어갔다, 다시금 나온다. 끊임없이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알리려 애쓰고, 외롭지 않음을 선포한다. 하지만 DMB, PMP,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는 그들은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죽을 정도로.


뉴욕은 서울이다. 서울은 동경이고, 동경은 북경이다. 뉴욕이 주는 묵직함에 우리가 매일 놀라면서도 매일 지나치는 이유다. 서울 안에 얼마나 많은 척이, 한스가 살아가고 있을지 우리는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쓰라린 고독과 불안감. 이는 한 잔의 술잔으로, 지나친 수다로도 덮을 수 없다. 가족의 따뜻한 위로와 이웃들의 말없는 동행이 다시금 희망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척이 그리던 고향 땅은 온갖 미개한 것으로 설명된다. 척은 다시 고향보다는 뉴욕에 묻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척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결국 그는 고향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뉴욕에 묻히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즐거운 귀향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뉴욕에서의 한바탕 멋진 꿈을 꾸었던 척 램키순.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 그 어디에서도 편안함과 안정을 얻기 힘들었던 한스.


책 읽는 재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네덜란드》지만, 난처한 외로움과 불안을 멋들어지게 묘사한 범상치 않은 작품임은 확실한 듯하다. 오늘도 또 다시 화려한 꿈을 찾아 뛰어드는 수많은 척 램키순을 위해 한 잔의 건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