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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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입으로는 혹은 글로는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는데, 정작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건 아닌데’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뭐 멀리 안 찾아봐도 당장 우리나라의 대통령님을 비롯해 그 주변에서 기생하고 있는 이들만 봐도 그렇지요. 말만 들으면 어찌나 다들 훌륭하신지…아주 그냥.


그래서 옛 선현들은 그렇게도 언행일치를 강조하셨나 봅니다. 또한 차라리 악인이어도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았던 이들을 흠모하는 이들마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쩔 때는 차라리 그들이 더 낫다는 생각까지 한다니까요. ‘나는 나쁜 놈이다’라고 인정하며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겉으로는 성인군자처럼 행세하며 실은 음흉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것들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물론 둘 다 그리 바람직한 것들은 아니겠지요.


저는 참 무지합니다. 거기에다 게으름까지 신의 경지에 올랐죠. 때문에 장안의 소식들에 항상 몇 박자 늦게 반응하고, 최신 유행은 솔직히 버겁습니다. 뭐 그런 것이 아쉬운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한창 주가를 올리며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나 엄청난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도 나중에라도 찬찬히 볼 수 있으니까요. 좀 늦는다고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부분은 정말 난처합니다. 아울러 책을 쓴 이들을 뒤늦게 알게 될 때의 후회와 당혹감이란…. 더구나 그 분이 이제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 게으름이 그렇게도 미울 수가 없습니다.


장영희 교수님 역시 그런 후회와 안타까움을 전해준 분입니다. 뭐 제가 아무리 무식해도 장 교수님의 존함은 알고 있었고, 그 분이 어떤 삶을 살아오신 분인가 정도는 알고 있었죠. 하지만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그 분의 책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순전한 게으름 탓이었죠.


그러다 지인이 선물해 준 이 책을 뒤늦게야 읽게 되었습니다. 이미 장 교수님은 부친의 곁으로 떠나고 난 뒤였죠.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정말 아프게 와 닿은 문구였습니다.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사랑했고, 스스로를 사랑했던 분. 책을 읽고 난 뒤 제가 느낀 장 교수님의 모습입니다.


에세이는 자유로운 형식에 자유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칫 가벼워질 수 있고, 때론 신변잡기에서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리 유명인사라 해도 그들이 내놓는 에세이에서 실망을 느낄 때가 많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솔직하게 썼나, 저는 그게 에세이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보여 진다는 전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꾸미게 됩니다. 가공하게 되고, 덧붙이며, 보다 아름답게 치장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글은 활력을 읽게 되고, 결국 좋은 글이 되지 못하죠.


장 교수님의 글을 읽고 절감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용기, 듣기 좋은 사탕발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달한 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모습들. 저는 거기에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장애우라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도 아름답지만, 모든 장애우들이 받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잘못된 사회 관습에 비판을 아끼지 않는 모습. 저는 그 모습에서 장영희라는 분의 마음 속 깊이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 그 분의 모든 책들을 읽지 못했습니다. 저에겐 이번이 그 분과의 첫 데이트입니다. 하지만 왠지 한 번으로 헤어질 사이는 아닐 듯 합니다. 두고두고 아껴가며 그 분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님을 아프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저 역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족함에 흔들립니다.


하지만 장영희 교수님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우리는 디자인이고 경쟁력이고 다 필요 없이 이것부터 어서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안의 상처 때문에 타인을 눈물을 볼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장애는 없을 테니까요.


책에 여러 가지 이야기 중 어처구니없는 일을 목격한 교수님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대목이 두 번 정도 나옵니다.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혼쭐을 내주지도 않고, 훈계를 늘어놓지도 않고, 그냥 자리를 피합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아련했습니다. 눈물이 맺힐 뻔 했습니다. 교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애틋하고도 여린 마음이 보입니다. 차마 지켜볼 수도 직접 나가 항의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던 교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저는 조금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강하려 했지만, 누구보다 여렸던 분. 아름다운 글로 오래도록 우리를 지켜 주리라 믿습니다. 교수님의 바람처럼 이 땅의 모든 장애우들, 세계의 모든 장애우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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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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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때, 반대로 엉뚱한 사람에게 별안간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있다. 나름 타인을 이해하고 또한 상처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살지만, 번번이 실패할 때가 많고, 거꾸로 상대방은 생각도 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서성거릴 때가 있다.



감동을 준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무뚝뚝한 사람들,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감동에 겨워 눈물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놀라운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글로, 그림으로, 그리고 자신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정녕 아름답고도 고마운 일이다.



어릴 적, 암만 생각해봐도 도통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모르던 나는 엉뚱하게도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따뜻한 이야기, 때론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해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느 순간 겁 없게도 글을 통해 타인에게 울림을 주리라 결심한 것이다. 물론 음악에 푹 빠지기 전에 일이다.



주제 넘는 일이었다. 될 법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꿈은 오래된 책장 속에 숨겨진 보물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만 쓰고, 그 마저도 온전히 제대로 쓰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나에겐 영원한 꿈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위로였다. 슬픔에 겨워 더 이상 갈 곳을 몰라 하는 이들을 조용히 안아주는 위로. 그 대상이 누구이든, 얼마나 가까운 사이든 상관이 없다. 다만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을 감싸 안는 위로가 느껴졌다. 그리고 글을 통해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는 저자를 바라보게 됐다.



“나는 세상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지고 싶지는 않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책에 담겨있는 단편들은 모두 상실과 상처, 고독과 방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끝이 있으리라 믿고 걸어온 길이지만, 결국 그 끝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난처함, 그리고 슬픔. 하지만 저자는 그 슬픔과 난처함을 구차하지 않게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비록 너무 벅차고 거대해 차마 다가갈 수 없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 길을 다시 걸어가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똑같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남루하지 않다.



황폐해진 지금의 삶, 더 이상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 어딘가 바쁘게 걸어가지만 그 어딘가를 찾지 못해 이리 저리 휩쓸리는 이들. 누구 앞에 엎드려 울어야 하는지, 그 누군가는 정작 어디에 있는지, 그 누군가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저자는 비록 내일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온전히 내보인다. 만남이 없으면 이별도 없는 것처럼, 상처와의 조우는 결국 극복으로 연결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처연한 슬픔을 터뜨리지 않고, 가만히 쓰다듬는 저자의 위로가 울림으로 다가온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혹은 상실 후의 슬픔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작품 역시 언뜻 그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책을 읽으며 안심했다. 불편한 삶의 조각들이 마냥 그대로 떠내려가지 않고, 누군가 바라보고 있으며 누군가 소중히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내버려지지 않았다.



젊은 작가이기에 앞으로 더 많은, 하지만 잠잠히 소설을 써내려 가리라 믿는다. 그러는 와중에 내 허전함과 난처함도 어느 새 다독거려질 것이다. 주저함 없이 글을 읽어 내려갔고, 작은 한숨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금은 더 용기도 얻었다.



누구나 주머니 속에 위안을 넣고 산다. 문득 문득 참 난감하고 어려울 때 주머니속의 그것을 살며시 쥐게 된다. 아직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느끼고, 그것이 무엇이든 잃지 않고 있음에 안도한다. “심장과 닮은”아프리카든, 색 바랜 단추든, 오래된 꿈이든. 든든함에 감사한다.  

 

참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저자의 위안과 수줍은 용기. 꾸준히 만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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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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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위에서 나를 어느 정도 관찰한 이들은 나의 경제관념 혹은 경제 관련 지식이 턱없이 미천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렇게 경제에 대한 지식 없이 대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 것이냐고 묻기도 한다. 뭐, 억울하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경제학원론 같은 수업을 들은 바 없고, 따로 경제학을 공부한 기억도 없다. 그렇다고 재테크나 ‘몇 년 안에 얼마 벌기’ 따위의 책들을 읽은 것도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무슨 이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식에 대한 길잡이 책을 한 권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2페이지나 읽었을라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장기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스테디셀러다.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1994년 당시 경제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30만 부라는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지금도 경제 서적 분야에서 이루기 어려운 수치다.


이렇게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과 함께 어려운 경제 문제를 매우 재미있게 풀어놓은 입담 덕분이다. 경제학이라면 일단 겁부터 먹고 보는 내가 재미있게 읽었으니 가히 그 재미는 장담할 만하다. 저자가 하버드 대학 ‘최우수 강의상’을 받았다던데,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읽는 내내 즐거웠고, 유익했다.


이른 바 ‘우울한 과학’이라 불리는 경제학. 우리는 경제학자들에게 때론 야멸차게 굴고, 때론 신처럼 숭배한다. 하지만 경제학자가 속 시원한 정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언제나 매우 드물다. 과거 수많은 경제학의 별들이 미래를 예측했지만, 100% 들어맞는 경우는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경제학은 난해하고 때론 무정한 학문인 듯하다.


저자는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로 시작해 맬서스, 마셜, 루커스, 케인스, 카너먼 등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삶과 그들이 주장했던 이론들을 마치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흥미롭고 쉽게 풀어가고 있다. 경제학의 진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과서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의미심장한 문장들이 적지 않았다. 저자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유머와 재치를 섞어 책을 썼지만, 중요한 주제들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아울러 300년 경제학의 역사를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골치 아픈 경제적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도 남겨주고 있다.


경제학은 자원의 희소성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에 관한 것이다. 무한정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애시 당초 경제학은 그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가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비쳐지기도 하는데, 경제학 원리에 충실한 이들에게 ‘없는 자들을 위한 배려’‘연대와 복지’등의 개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학자들이 모두 악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모두 최소한의 희생 혹은 소비, 투자 등으로 최대한의, 적어도 가장 효율적인 성과를 얻어내려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과 마찬가지로 경제학 역시 정치적 의도와 개인적 성향에 따른 변수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경제학은 ‘우울하지만 필요한’과학인 것이다.


그야말로 경제, 경제관념, 경제학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내가 이 책에 대해 무어라 평가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딱딱하고 어렵고, 때론 눈물 나게 냉정하고 야속한 세상사에서 경제학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 지금껏 시대를 풍미하며 ‘세상의 효율화’와 ‘풍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 온 많은 이들의 고민을 쉽고도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경제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멋진 경제인이 되었다거나, 재테크와 국내외 경제 흐름 등에 새로운 눈이 뜨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책이 원하는 것도 그것은 아닐 터다.


최근 책의 세 번째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것은 초판이니 그 사이 또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있었을까. 미국 경제를 그야말로 초토화 시킨 서브모기지 사태나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계 경제 구도의 변화, 에너지 수요 증대, 지구 온난화, 노령화, 이주노동자 문제 까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도 유효하게 살펴볼 수 있는 개정판이라 하니 다시 한 번 읽어볼 요량이다.


그 흔한 그래프나 통계 수치 하나 없이 명쾌하게 경제학의 역사와 이론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과 명석함은 역시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인 경제 이해에 대한 유쾌한 첫 인사가 될 것이다.


“경제학자 및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와 힘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세계는 그 아이디어들이 움직여 나간다……선용되는 악용되든 궁극적으로 위험한 것은 아이디어지 사리(私利)가 아니다.”


-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일반이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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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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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자를 모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바람의 딸’‘월드비전의 여전사’등 저자를 수식하는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저자는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에 상위 랭크되고, 이른 바 신세대들의 ‘롤 모델’로도 자주 언급되는 스타다. 물론 자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동안 저자의 책을 몇 권 읽은 경험이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저자가 살아온 열정의 시간들이 온전히 느껴지는 책들이었다. 도전과 실패, 또 다른 도전의 연속으로 저자는 자신의 삶을 단련시켜왔고, 더불어 빛내왔다.


저자의 책들을 읽어오며 느꼈던 것은 무엇보다 충만한 자신감이었다.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도전해보는 정신. 물론 실패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끝내 도전을 가로막지는 못했던 삶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섣불리 도전하지 못하며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이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저자는 적어도 잘 났다고 ‘나대는’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 좋았다. 무언가 남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낸 이들에게 풍기는 오만과 독선이 적어도 저자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특유의 낙천성과 유머 감각, 그리고 삶에 대한 애정과 긍정으로 언뜻 조금은 건방져 보인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글쎄, 미숙한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오만이 아닌 즐거운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때문에 저자의 글이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언제나 힘든 것은 ‘언행일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옥’같은 책을 쏟아내는가. 하지만 정작 책에 담긴 내용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책에 담긴 내용이 어떤 것이냐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9년이란 시간동안 전 세계의 재난, 분쟁 지역을 누비며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저자. 때문에 글 속에는 자부심과 함께 생명에 대한 가치가 확연히 드러난다. 공명심이나 자기만족이 100% 없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거짓이겠지만, 적어도 속물이나 위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새 우리 사회가 ‘한비야’ 라는 이름에 부여한 묵직함을 놓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저자에게 바라는 것, 기대는 것이 점점 더 커질수록 그는 지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기대와 관심이 그에게 경제적 가치를 함께 전해준다고 해도, 사실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원래 경제적 이익을 그리 중시 여기는 이도 아니지 않나. 누굴 돕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면 말이다.


때문에 월드비전에서 떠나 유학을 결심한 그의 선택에 조금은 안도감을 느낀다. 물론 저자의 성격상 유학 생활 역시 가열차게 이어나갈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성찰의 시간과 함께 조금은 자신을 여유 있게 풀어줄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인물을 만들기도 어려운 환경일뿐더러 인물이 나와도 그 인물을 쉽게 지치게 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너무 볶는다. 유명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심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한비야의 또 다른 도전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면서도, “이번엔 조금 편하게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오시길”이라는 말도 하고 싶다.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줬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 역시 조금은 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뭐 남들 시선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유명인이라는 부담은 어쩔 수 없다. 그 부담에서 조금은 쉬시라 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은 결코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정갈하게 글을 쓴다. 솔직함과 믿음이 담긴 글은 허투루 쓰인 글 속에서 항상 빛나는 법이다. 진실이 담긴 글은 생명이 담기게 된다. 그의 글은 꾸밈과 거짓보다는 솔직함과 겸손, 편안함으로 독자들의 눈을 어루만진다. 미덕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추천한 도서 목록 중 내가 읽은 책들이 몇 보여 반가웠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1년에 100권 읽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기에 분발하자는 목소리도 슬며시 내봤다. 사실 저자 덕분에 에티오피아에 귀여운 아들 하나를 얻은 인연도 소중하다.


이제 다시 한비야 라는 인물은 도전을 찾아 떠나갔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을 찾아 고민하고 도전하고 쓰러지는 것은 비단 젊음만의 특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시기는 그야말로 모두 다를 것이다.


응원한다. 그의 삶과 도전을. 그리고 내 꾸물거리는 발걸음도. 항상 유쾌한 주눅과 부끄러움을 주는 그. 그의 메시지처럼 가는 길이 어디든, 그 끝이 어디든. 웃으며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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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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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콘이란 단어는 지난 부시 정권 8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단어이자, 가장 치명적인 힘을 과시했던 단어다. 특히 우리에겐 한반도 평화와 남북문제 진전에 있어 가장 장애물로 작용했던 강력한 세력이기도 했다. 미국 네오콘들의 권력 장악과 그에 따른 대외 정책 변화는 결국 남한 내에서도 자칭 ‘합리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사이비들을 다수 생산해 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뉴’뭐시기로 시작하는 영혼 없는 이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부시 정권 8년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힘으로 진리를 만들어내고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강하게 거부하고, 협소한 시각으로 레짐을 선과 악으로 구별한 뒤 일단 악으로 규정된 레짐은 힘으로 붕괴시키는 것. 그것이 네오콘들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부시 정권의 핵심에서 대외정책을 주도했던 이들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름 없는 유대인 정치철학자가 남긴 것은 생각 외로 엄청났고, 그 결과 역시 참혹했다. 대중을 말 그대로 우중으로 판단하고, 그런 우중을 바른 길로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생각. 하지만 그 앞에는 어리석은 우중들이 믿을 만한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레오 스트라우스의 신념이자 철학이었다.



중요한 것은 절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진실을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일단은 거짓된 선전과 믿음으로 대중을 현혹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라크는 나쁜 레짐이다. 때문에 없애야 하지만, 그냥 없애면 대중들은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있든 없든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곤 무력으로 이라크를 붕괴시킨다. 나중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나쁜 레짐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말은 레오 스트라우스에겐 ‘고귀한 거짓말’이 된다.



레오 스트라우스와 그 제자들을 20여 년 동안 추적해온 캐나다의 샤디아 드러리 교수는 “스트라우스의 진면목은 허무주의적 니체”라고 말한다.



“신은 죽었고, 정의의 기반도, 도덕의 기반도 사라졌다. ‘진리가 없다는 것’그것이 ‘냉혹한 진리’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많은 대중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도덕을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고 그러면 사회는 도덕적 무정부상태에 빠져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진리’는 냉혹함을 견딜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알아야 한다. 나머지 멍청한 대중들은 엘리트들이 지어낸 정의와 도덕, 신화를 믿으면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고귀한 거짓말’이다. 플라톤 같은 고대의 현인들은 이를 잘 알고 진리를 숨겨놓았지만 경망스러운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자유주의의 확산과 함께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상대주의, 허무주의가 판을 치면서 도덕이 무너졌다. 사회도 함께 무너질 운명이다. 서구문명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고전 정치철학으로의 복귀’다. 대중들에게 또다시 ‘고귀한 거짓말’을 해서 도덕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따라서 스트라우시언들이 진리, 정의, 도덕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와 함께 정치공동체는 강력한 적의 존재에 의해 각성되고 유지된다. 적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역시 ‘고귀한 거짓말’이다.”



“오호 왠지 그럴 듯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네오콘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정신병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이들이 일반인이 아닌 미국 대외정책의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지 않더라도 일단‘낌새’만 보이면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폴 울포위츠, 그의 스승이자 스트라우스의 제자 앨런 블룸, 미 국방부의 정보담당 책임자로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데 총괄적인 역할을 맡았던 에이브럼 셜스키(그는 “정보 작전의 목표는 진실이 아니라 승리”라고 주장했단다.), 네오콘이라는 단어를 처음 공식화한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네오콘의 전도사 윌리엄 크리스톨. 이들은 모두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스트라우시언들이다.



이들이 주도했던 부시 정권 8년은 그야말로 파괴와 거짓, 전쟁과 살육으로 장식되었던 암흑의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우리도 반세기만에 얻은 남북 화해의 분위기를 채 피워나가지 못했고, 결국 제2차 핵위기라는 먹구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스트라우스는 서양 고전 철학,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숭상했다. 이는 곧 홉스나 로크 등 근대 정치사상의 부정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가치를 부정하고, 문화 상대주의, 민주주의의 원칙도 모두 인간을 타락시키는 질병에 다름 아니다. 그는 고전 철학이 숨겨온 “진리란 없다”는 진리를 멍청한 근대 철학자들이 ‘누설’하는 바람에 서구 문명이 치유하기 힘든 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때문에 일반 멍청한 대중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밀교적 방법으로 진리를 전해야 하고, 소수의 엘리트들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글쎄, 일정 부분 네오콘의 영향을 받아 정책을 수행했던 부시 대통령이 그렇게 뛰어난 엘리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부시를 이용해 신나게 자신들의 철학을 현실로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사생결단’의 정치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부시 정권이 끝난 지금, 이제 오바마가 평화와 공존을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일까. 사실 지금도 미국의 권력 핵심에는 네오콘들이 건재하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부시’를 기다리거나 혹은 만들려 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 오바마 대통령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치열하게 그러고 있는 중이다. 어느 정도 약발이 먹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문제는 이러한 네오콘들의 ‘활약’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다. 저자 역시 우려한 부분이지만, 가뜩이나 어지럽고 사생결단식 정치에 매몰된 우리 사회에 네오콘의 영향력이 미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미 그런 모습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힘겹게 만들어온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는 누가 말한 것처럼 ‘빛의 속도’로 후퇴하고 있다. 전임 정권들의 정상회담을 그렇게도 폄하하던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보수 세력들은 정작 3차 정상회담을 두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정치적 효용이 없으면 남북관계고 나발이고 정상회담 따위는 필요 없다는 계산이다.



때문에 기자 출신의 저자가 비교적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네오콘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진면목은 지금도 충분히 읽어야 할 가치가 있다. 네오콘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네오콘들은 지난 부시 정권 시기의 모습들을 통해 충분히 자신들의 철학을 보여줬다. 그것은 바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상관없다”는 것과 “어떠한 무고한 희생도 목적을 위해서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완결한 종결이 아닌 ‘휴전’상태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우리에겐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아직 우리는 완전한 평화를 얻지 못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데 힘이 부친다.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이라 자신하는 미국과 우리 주변의 모든 강대국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알아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이 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술술 읽히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책. “도대체 네오콘이 뭐하는 녀석들이야?”하고 궁금해 했던 이들은 일독해 볼 만하다.



“도시(폴리스,국가-역자)는 도시로서 때때로 전쟁을 치러야 하고 전쟁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해치는 것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비난은 가장 정의로운 도시조차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Leo Strauss, The City and M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4,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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