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대통령 -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한걸음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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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모니터를 쳐다만 봤다. 마지막 페이지 그의 웃는 모습이 모니터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 시간은 흐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은 그렇게 쉴 새 없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래서 더 서럽다.

 

시간은 고마운 존재다. 치가 떨리는 분노와 심장을 도려낼 것만 같은 고통도 어느 새 무뎌지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아닌 게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고통과 분노도 반드시 존재한다. 그게 사실이다.

 

난 노빠였다. 처음엔 아닌 줄 알았지만, 결국 노빠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난 ‘배신한’ 노빠였다. 스스로 나의 배신은 먼저 배신당한 사람의 당연한 대응의 ‘배신’이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난 노무현 대통령을 버렸다.

 

지난 해 5월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가 후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6개월 정도의 백수생활을 거쳐 지금의 직장에 오기 직전이었다. 얼렁뚱땅 다시 일자리를 얻게 된 상황에서, 간만에 후배들을 만나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를 찾았다.

 

학교는 지방이다. 때문에 자주 찾아가기 힘들다. 하지만 난 왜 하필 그 때 학교를 찾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후배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갖고 예전 대학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숙취가 덜 풀린 상황에서 난 TV에서 나오는 속보에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그는 먼저 이별을 고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예감했던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후 5월 그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할 수 없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덕수궁 돌담길에서 흐느끼고 있었고, 영결식과 노제가 있던 29일까지 난 그곳을 서성거렸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왜 그를 그렇게 몰아 붙였을까. 왜 그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지 않았을까. 왜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하지 않았을까. 왜. 왜….

 

나에게 그렇게 5월은 다시 한 번 큰 구멍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을 목 놓아 부르며 그렇게 난 서러웠다.

 

노무현, 그리고 참여정부. 허점투성이에 아마추어 정권이었다. 물론 그이는, 그리고 참여정부에서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은 섭섭해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평범한 국민들을 다시금 한마음으로 만들게 했던 그 힘을, 그들은 온전히 추스르지 못하고 허망하게 물러났다.

 

이라크에 파병을 결심했을 때, 한미FTA를 추진했을 때, 평범한 노동자, 바로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그 노동자가 길거리에서 전경의 방패에 찍혀 죽어나갈 때, 난 노무현을 버렸고, 참여정부를 버렸다. 또 다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 모든 과오를 생각해도 그는, 그리고 참여정부는 그렇게 참혹히 평가받아선 안됐다. 아쉽고, 때론 분통터지게 하는 모든 잘못들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참여정부는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꿈을, 그리고 돈 많은 이보단 돈 없는 이들을, 힘있는 이들보단 힘없는 이들을 돌아보려 애썼다. 그것도 얼마큼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다시 평가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노력했다.

 

난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 혼자만의 분노로, 아집으로, 혹은 바람으로 난 어느 새 신문이라고 볼 수 없는, 언론이라고 볼 수 없는 쓰레기들의 말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온갖 저주의 굿판이 벌어질 때에도 애써 눈을 감았다.

 

참여정부 말기, 이명박 세력이 무서워, 혹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보수의 편으로 돌아선 껍데기 진보들. 그가 곤경에 빠질 때 더욱 큰 저주를 퍼붓다가, 정작 그가 떠나자 한껏 영웅으로 치켜세우던 더러운 언론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오열에 대답할 수 없었던 비겁한 인간들.

 

내가 그 더러운 것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서러웠다. 그렇게 울었다.

 

세상은 썩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밥을 먹여주지 않고, 철저히 계산된 속임수와 음모만이 판친다. 집값이 오른다고, 재개발이 이뤄진다고, 혹은 자기 동네로 명문고가 이사 온다고,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당을 찍을지 모른다. 1%를 위해 존재하는 세력에게 99%가 다시 지지를 보낼지 모른다. 그날의 그 울분과 서러움을 이미 잊었는지 모른다.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TV에선 다시 그때처럼 뭉치자고 호소한다. 다시 붉은 악마가 되자고 소리친다. 허무하다. 방송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다고 누가 그랬나. 아니다. 이미 성공했다. 국민들은 그렇게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4대강이 얼마나 썩어가고 있는지, 관심 없다. 아이들의 점심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천안함은 아마도 증거는 없지만, 북한이 했을 것이다. 설마 미국이 했겠나. 중간선거는 코앞인데, 정작 월드컵이 우선인 나라. 이미 속았음에도, 다시 한 번 표를 주면 집값이 오른다고, 뉴타운을 만들어주겠다고 장담하는 이들을 믿고 싶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그리고 가고 있다.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을 쥐고 있는 모습. 그 밑에서 잘 살아보겠다고 굴종하고 있는 기생충들. 국민? 국민의 안위? 국민의 행복? 개소리마라. 더 더러운 노예, 더러운 노예,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는 행복한 노예들만이 남은 곳.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노무현을 그리워한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완벽할 수 없었기에, 아쉬움이 많고 눈물이 많고 실수가 많았던 그였기에 그리워한다. 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을 기억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여해 미소를 지었던 이명박을 기억할 것이며,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해 헌화한 전두환을 기억할 것이다.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에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며,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게 한 사람이다.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이가 정녕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어떤 이가 더러운 입으로, 더러운 몸짓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

 

선거 때 놀러 가시라. ‘정치 따위 관심도 없어’ 하고 사시라. 이놈 저놈 다 도둑놈이야 하며 그 도둑놈들에게 빼앗기며, 계속 그렇게 사시라. 공부 잘하는 게 최고다. 좋은 대학 가는 게 최고다. 일단 이기고 보는 게 최고다. 하시며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시라. 북한은 주적이다. 통일하자는 놈들은 다 빨갱이다 하시며 그렇게 사시라. 조선일보를 봐야 신문을 보는 것 같다고 하시며 그렇게 사시라. 미국은 영원히 우리의 큰 형님이다 하시며 6월이 오면 성조기를 들고 나가시라. 그렇게 사시라. 아름답고 우아하게, 지저분한 것들은 하나도 보지 말고 그렇게 사시라.

 

그리고 죽으시라.

 

너무나 순진했던, 그래서 더 서러웠던, 내 마음 속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땅에, 태어나지 마시라. 인동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시라.

 

하지만….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우릴 지켜봐 주길.

 

다시 오는 5월이 무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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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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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위대하신’ 전두환 각하의 넓으신 아량과 백성을 어여삐 여기신 마음으로 탄생한 한국 프로야구. 한때 절대로 3S(Sports, Sex. Screen) 정책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프로야구를 우습게, 아니 야구장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열광하는 이들을 하찮게 보곤 했다.

도대체 저 인간들은 제 정신인지, ‘광주의 피울음’이 아직 생생한데, 군사 독재정권의 폭압 아래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저들은 이미 잊은 것일까. 아니 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위대한 각하의 의도대로 야구에 푹 빠졌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수와 류중일에 환호했고, 선동렬의 믿을 수 없는 방어율에 전율을 느끼며, ‘과연 그를 꺾을 수 있는 타자는 누구일까’고심했다. 삼미와 청보, MBC 청룡과 OB 베어스의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그립고도 서러운 유년시절과 함께 하고 있다.

책은 저자의 성장기이자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그리고 그 시절 힘든 이들을 울고 웃게 해줬던 그라운드의 모든 영웅들에 대한 헌사다. 그리고 역대 9회 우승이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화를 만들었지만, IMF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진 전설의 구단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그리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한다. 해태와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전라도 지역. 그리고 전라도를 향한 근거 없는 악의에 찬 비난과 차별의 기억들.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전라도 여자만 아니면 된다.”, “전라도 것들은 은혜를 모른다.” 저자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전라도에 대한 비난들은 그대로 내 기억과도 겹친다. 온 나라가 서슬 퍼런 총칼에 숨죽이고 있을 때, 결코 대한민국이 썩지 않았음을, 불의에 겁먹지 않았음을 피로써 증명한 광주 시민들, 그리고 모진 핍박과 멸시 속에서 오직 야구장에서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한을 달랠 수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계속 불편했던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서울이었고, 서울이며, 서울일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원들이 가장 많이 섭취되고 소화되며 배설되는 곳 역시 서울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대한민국의 심장은 광주였다. 서울의 1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도시 광주의 5월은, 대한민국이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생명체일 수 있게 해준 힘찬 박동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어디에서든 ‘전라도’운운하면 따가운 비난을 받거나 매우 용감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또 비겁한 키보드 워리어들의 자판질에는 ‘전라디언’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민주시민, 상식 등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영웅들의 서사시 한국 프로야구, 여전히 신화는 이어지고 있다. 신종플루가 전국을 공포로 몰아갈 때도, 사람들은 야구장을 찾아 서로 침 튀기며 응원했고, 삶이 팍팍하고 고단 할 때도 우리는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치어리더들의 흥겨운 응원이 있는 야구장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프로야구를 ‘각하’의 ‘업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을 성싶다. 서민들의 고단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야구는 고마운 친구다. 그 친구가 어디에서 왔던, 아버지가 누구이든, 친구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 글이 있어 옮겨본다. 그립다. 그 시절 그 사람들, 그 열정들이….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짓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래, 물론 지금 우리는 해태 타이거즈가 싸웠던 것보다도 훨씬 능글맞고 쌀쌀맞은 21세기, 그 중에서도 해태 타이거즈마저 휩쓸고 가버린 IMF의 유산 신자유주의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래도 노리고 휘두르면 선동열을 상대해서라도 1할 7푼을 칠 수 있지만, 포기하면 18연패 끝에라도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최강이었지만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이었으며 돈 앞에 무릎 꿇고 사는 이들의 가슴에 남겨진 야구팀, 사라지고 없는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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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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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해마지 않는 서경식 선생, 그리고 ‘거리의 철학자’‘서로주체성의 철학자’김상봉 선생.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서로주체성의 공동체를 꿈꾸는 두 명의 지식인이 만났다. 2007년 5월 19일부터 2007년 8월 15일까지 아홉 차례 총 40시간의 대담을 엮었다.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 출판사, 그리고 후배 학자들은 이들이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조금 길지만 이 배경만으로 나는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서도 아니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도 아닙니다. 너 나 없이 민주주의에 시큰둥해지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고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묻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만 된다면 과거나 이념 따위야 아무러면 어떠냐고도 합니다. 이념의 시대는 갔고 역사라는 거대서사도 다 죽어버린 거 아니냐고 제법 배운 티를 내며 삐딱하게 나오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역사, 이념, 정의 앞에 밥의 현실성을 내세우는 이런 말들을 듣고 돌아설 때, 우리 머리엔 ‘그럼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서로를 위해 흘린 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주머니들이 시민군들의 입에 넣어주던 주먹밥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라는 물음이 괴롭게 떠오릅니다.

 

먹고살기도 각박한 세상에 과거의 기억 따위를 들춰서 뭐하느냐고 쏘아붙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란 한류 드라마의 소재로 돈 벌이 콘텐츠나 되면 족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때나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 분쟁이 벌어질 때가 아니고서는 역사가들이 진지하게 소환되는 경우도 드뭅니다. 그렇게 소환된 역사가들 입에서 반듯한 소리를 듣기도 쉽지 않고요. 민족이니 역사니 다 철 지난 이야기라며 시큰둥하던 사람들이 이럴 때는 ‘우리 역사를 지키자, 우리 땅을 지키자’며 독립투사라도 된 듯 흥분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 편에선 그런 흥분을 야유하기 바쁜 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민족주의는 파시즘적 열광이고 몽매주의적 산화라는 거지요. 맞는 말이지만 한편에 드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고, 그런 식으로 사회도 가족도 연인도 차례로 지워버린다면 남는 것은 개인뿐인가? 그런 개인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는 너무나 고독하지 않은가? 고독 끝에 병들지 않겠는가? 기댈 곳 없이 생존하기 위해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전략적으로만 행동하지 않겠는가? 그런 개인들로부터 어떻게 공동체, 즉 개인과 개인 사이의 호혜적 관계가 나타날 수 있는가? 서로에 대한 사랑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계약으로 충분한가? 서로를 못 믿는데 계약을 어찌 믿는가? 계약을 못 믿으니 그걸 강제할 법이 나오고, 또 그 법을 강제할 무력으로서의 국가기구가 등장하고, 그런 국가도 못 미더울 때 국적 없는 화폐인 국제금융자본에 의탁하게 되고, 실상 디지컬 숫자에 불과한 화폐를 실효적인 힘으로 만들려니 제국 같은 무력의 질서가 등장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20세기의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21세기의 개인과 제국은 어떠한 갈등과 모순도 없이 공존하거나 공멸하는 관계가 아닐까? 기업과 자본이 국가와 이념의 장벽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그 자본을 쫓아다니는 노동과 상품이 전통과 민족과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뒤섞고 또 스스로도 그런 혼란의 일부가 되는 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지구화된 세계, 이 혼란스런 퓨전의 21세기는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세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러한 부정적 사태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생각도 없거나 그럴 능력이 없는 자들이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마찰과 소음에 불과한가……?’이런 물음들에 그들은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합니다.

 

신, 군주, 독재자, 아버지, 이데올로기, 민족, 국가 등 온갖 굴레들로부터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기와 다른 것, 자신을 넘어서는 것, 성스럽거나 공적인 것들을 끌어안고 서로 어울려 사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다시금 과거의 거짓 주인들을 환상으로라도 불러와 예속되고픈 유혹을 느끼는 이 위태로운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 그런 배움을 찾아야 합니까? 구속 없는 결속, 속박 없는 소속, 자유로운 사랑…… 그런 역설적 관계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해방된 자들의 공동체라는 게 있습니까? 그런 세상을 만들며 살아가려면 우리는 누구여야 합니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여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일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물음들을 하필 서경식과 김상봉 두 분에게 꺼내놓는가? 그 두 사람이 모든 답을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보다 그런 물음을 열렬히 또 괴로워하며 던져온 선생이고 선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겠다. 내가 워낙 늦되는 녀석이라 그럴지도. 다른 이들은 예전에 이미 몇 차례 홍역을 치르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했는지도. 하지만 난 여전히, 아닌 나이를 먹을수록 위의 질문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여야만 하는가? 라는 화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 타인의 슬픔이 외면 받고, 무시 받고, 오히려 더욱 강요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그 순간까지 결코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결국 자신이 파멸의 길로 떨어져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존재 였는가 느끼는 사람들. 무수히 많이 봐왔고, 보고 있다.

 

대담은 5·18에서 시작해 운명적인지 몰라도 8·15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는 끝이 아니다. 두 지식인의 대화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 어때야만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고민, 경악과 슬픔을 전해줄 뿐이었다. 때문에 짧지 않은 분량의 책을 덮고 난 후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래서다. 이 책이 더할 수 없이 고맙고, 치열한 이유가. 순간 순간 삶의 비루함에 젖어 나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던 때, 모든 고통을 외면하고 타인의 아픔에 눈감고 결코 편할 수 없는 안락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순간에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것도 말로 할 수 없는 큰 행운.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다. 본래 땅 위에 길은 없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서경식 선생의 좌우명으로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글이다. 그는 희망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밖에 없으니 걷는 것이고, 걷다 보니 길이 생기는 것이다. 걸을 수 있는 동안에는 걸을 따름이다.

 

서경식 선생은 이미 여러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재일조선 지식인이다. 그의 형 서승·서준식 형제의 간첩단 사건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두 형의 억울한 옥살이를 지켜봐야 했던 그. 그 와중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무고한 친구들의 이름을 댈까 두려워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뜨거운 난로를 껴안아 자살하고자 했던 형에 대해 서경식 선생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에게 타인의 고통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타인의 눈물과 함께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김상봉 선생은 인간 서경식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분은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나 자랐다. 생각하면 그것은 존재 그 자체가 고통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장한 뒤에는 무려 20년 동안을 형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그 사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것은 아직 서른 안팎이었던 막내아들에게는 너무도 힘겹고 절망스런 일이었겠지만, 아마도 그분은 그런 슬픔 속에서도 옥중에 있는 형들을 염려하느라 자기를 위해서는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서도 그분은 이를 악물고 형들에게 자기는 아무 일이 없으니 옥중에서 건강 조심하라고 편지를 써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앞에서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거구의 선생님을 뒤 따라가면서 바라볼 때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안으로 삼킨 눈물로 그분의 몸이 퉁퉁 부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남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이 되어버려, 자기의 슬픔과 남의 슬픔을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그리하여 자기의 슬픔 속에서 남의 슬픔을 보고 남의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예 성격으로 굳어져버린 사람, 그분이 바로 서 선생님인 것이다.”

 

책은 만남의 통한 슬픔의 공감, 타인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두 사람 모두 타인을 통한 만남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의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배우고 느낀 것이 다르고, 언어의 소통이 불편했더라도 결국 대담을 이어갈 수 있었다.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조선, 그리고 조선 내에서 바라본 조선, 일본,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이는 결코 같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이야기가 하나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책이 나에게 적지 않은 당혹감을 전해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책은 오직 책이어서 가능한 커다란 기쁨과 공감을 선물했다. 이들의 만남이 단순히 두 지식인의 만남이 아니라 책을 읽는 모든 이들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대담의 이름으로 나오는 수많은 허접 쓰레기 중에서 이 책이 독보적이라 믿는 이유이다. 책은 공감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아닌 새로운 자각을 깨워야 한다. 단순히 시대 유감이나, 어설픈 지식의 향연, 독기를 품은 저주 따위가 페이지를 채워선 안 되는 것이다.

 

두 분의 폭넓은 교양과 지식(두 분은 지식보다 교양이 중요하다고 대담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양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실용적인 목표를 갖지 않는 앎이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힘이 되어주는 앎’‘자기를 초월하여 타자의 자리에 자기를 놓을 줄 아는 능력, 곧 타자에 대한 상상력’으로 설명된다. 즉 참된 교양이란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지식과 소양을 얼마나 축적했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삶의 기쁨과 슬픔을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에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 책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두 분의 만남 중 내 심장을 ‘바늘로 콕콕’찌른 문장을 옮긴다. 책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지식인, 예술가들이 타인의 고통으로 자신의 몸에 ‘바늘로 콕콕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껴본 이들이었다. 진정한 교양인들이었다.

 

바깥에 대한 상상력은 그에게 현실의 모순, 존재조건의 모순을 겪어낼 수 있는 힘이자, 동시에 자기의 벽을 넘어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고 개인의 벽을 넘어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국민주의’란 자신이 ‘국민’으로서 향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인 심성을 가리킨다.

 

함석헌 선생은 고구려 역사에 관해서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어떻게 대면하느냐에 따라 뜻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것이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뜻, 의미, 가치’라는 것이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던 당시의 개인이나 집단의 뜻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에 사람들이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것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나와 너’가 이곳에 서 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절망적인 고통과 투쟁이 토양이 되어주었는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죽어 있어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 뜻이 결정된다는 일방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죠.

 

제가 5·18을 못 잊잖아요? 제 부모 세대는 6·25를 못 잊지요. 그렇게 보면 지금 대학생 정도의 세대들은 행복한 세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건 없이 자랐고 국가의 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도 없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묘한 것이, 역사의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희석되거나 휘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은밀한 전승 방식을 갖는다고 할까요?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 보이지 않는 큰 불안감이 있어요. ‘내가 한국 국민·시민이다, 국가가 있는 한 나는 인간 이하의 나락으로 쉽게 떨어지지는 않는다’라는 식의 믿음은 없고요. 국가는 여차 하면 나를 버리고 추방하고 박해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아마 세상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 클 겁니다. 개개인이 그런 체험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국가기구라는 것이 존재이유가 없다거나, 또는 국가기구의 존재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는 식의 불안·불만 같은 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계기들과 만나면 그런 불안과 불만의 자리에서 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불꽃처럼 확 일어납니다.

지금 이 나라의 권력이 대다수 국민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엔 회칠한 무덤처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이 책이 쓰일 때는 2007년.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른 듯.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국민들이 과연 지금 있을까.) 5·18이 일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 말기에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만 같았어요. 유신헌법이 90% 이상의 지지로 통과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순간에 5·18이 일어났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한미FTA나 자본의 지배 같은 현상들을 보노라면 국가가 국민들에 대해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지요. 그저 잘사는 사람만 계속 잘살면 된다는 논리밖에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영원할 것 같던 현재의 거짓 안온과 균형이 순식간에 뒤집힐 수도 있다고 봅니다.(김상봉 선생의 예언(?)은 촛불정국으로 현실화됐다)

 

저는 학자는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들을 위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해요. 이광수와 최남선을 두고 한 말인데, 함석헌 선생은 그네들이 끝까지 울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슬픔이라는 것은 식민지배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유서처럼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남에게 박해받고 수난당하면서 자기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그 감수성을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고, 지금 그것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제게 과제처럼 주어진 거죠. 만해와 윤동주가 다르지 않다고 봐요. 저는 그게 성찰이라고 느낍니다.

 

두 번째 생각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나타나는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일본에서 나타난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는 느낌이죠. 일본 지식인들은 ‘자발적 노예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제가 사사한 후지타 쇼조 선생님은 ‘안락전체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안락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전체주의가 1970년대에 진행되었다고 하셨어요. 한국에서는 일본의 그런 추세가 훨씬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20~30년이 걸렸다면 이 나라에서는 5~10년 사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듯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보다 더 앞질러 그런 추세를 밟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예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과도한 열성을 보이고 있죠. 미국과 국제 자본에 대한 자발적인 노예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배후에서 자라는 것이 그런 전지구화 속에서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자기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안락전체주의적’태도입니다.

 

오직 세상에 편재한 고통에 대한 경악과 절망에서 시작할 때에만 철학은 고통 받는 인간의 편에서 존재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된 철학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에서 시작한다.

 

철학은 너의 슬픔 속에서 나의 슬픔을 보고, 끊임없이 이 슬픔과 저 슬픔을 만나게 함으로써 더 보편적인 슬픔의 바다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철학의 보편성이란 그것이 매개하는 슬픔의 보편성에 다른 아닌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이처럼 인간의 슬픔을 서로 만나게 하는 정신의 활동을 통해 열리는 보편적 슬픔의 전형적 형상화이다. 그런 까닭에 철학적 정신은 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고 이해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슬픔이 보편적인 형식을 얻을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철학적인 것이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통은 영혼을 부패시킨다. 고생이 인간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매개될 때, 그때 고통은 우리를 넓고 깊게 한다. 한 사람의 정신이 자기의 아픔 속에서 타인의 아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을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고통은 인간의 정신을 자기의 비좁은 골방에서 해방시켜 보편적 존재의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나 스스로 좋은 독서가는 아니기에 타인에게 책을 권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겠지만, 내 삶의 파장을 던져주는 책들은 타인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것도 자기만족인지는 모르겠다.

 

때문에 추천한다. 두 지식인의 대화를 통해 내가 느낀 전율과 격한 슬픔, 그리고 희망과 의지를 당신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누군가 존경하고 싶은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감히 내 인생의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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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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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늘 하루 cctv에 노출된 횟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파트, 엘리베이터, 지하철, 관공서, 호텔, 백화점, 마트, 주차장 아니면 그 어디에서라도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음을 당신은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서울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매일 평균 39회이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고로 비극이다. 사생활? 그 기준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당 부분 침해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동성범죄자나 기타 등등의 흉악범을 잡는 데 cctv가 어리바리한 경찰 보다 뛰어난(물론 일부 경찰을 의미한다. MB께서 한 번 뜨시면 경찰은 순간 수퍼캅으로 변한다)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인권침해니 사생활 침해니 떠들어도 cctv는 무한정 늘어나고 있다.

 

자, 살펴보자. 권력이, 그것도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당신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당신의 신용카드, 당신의 네비게이션이 당신의 행동, 위치를 낱낱이 파악한다. 당신이 사용하는 인터넷이 당신을 감시하고, 또한 규정한다. 당신이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책, 음반, 화장품, 액세서리, 전자제품 등등 모든 것으로 당신의 소비 수준과 소비 행태를 파악한다. 그런 통계는 모이고 모여 당신에게 언제쯤 어떤 물건을 광고하면 구매할 것인가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맞추어 광고 메일을 날린다.

 

국가권력, 또한 기업권력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감시한다고 당신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역전의 상황도 빈번하다. 개인이 개인을 감시하고 개인이 개인을 훔쳐보는 사례는 이미 일반화 되었다. TV엔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훔쳐보기’ 프로그램(리얼리티란 이름으로 포장한다)이 인기이고, 홈페이지,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정도로 보인다. 자신의 누드, 혹은 세미누드를 공개하는 홈페이지도 수두룩하다.

 

또한 우리는 휴대폰 등의 기기를 이용해 타인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타인을 찍고 감시하고 유포한다. ‘개똥녀’‘된장녀’등이 그 대표적 피해사례 중 하나다. 아무리 그들이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의사에 관계없이 그들을 찍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행위는 분명 범죄이다. 그것도 아주 죄질이 나쁜.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양의 사진과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그 중 어떤 이들은 죽일 놈 혹은 년, 어떤 이들은 완소남, 혹은 녀가 된다. 순서가 맘에 안들면 다시 바꾸겠다. 년 혹은 놈, 녀 혹은 남이 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시대는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 누가 대자적 존재이고, 누가 즉자적 존재인가. 과거 권력은 만인이 한 사람을 바라보도록 강제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오직 왕, 황제만을 바라봐야 했다. 오직 왕만이 대자적 존재요, 나머지는 영혼도 사고도 없는 돌과 같은 즉자적 존재여야만 했다.

 

이런 추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한다. 점차 권력은 만인에게 보여주는 방식보다 좀 더 진화한 방식으로 발전해 나간다. 넓은 광장에서 모든 시민들을 불러놓고 공개 처형을 통해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수많은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꿈꾸게 되었다. 이땐 보는 이가 지배자가 되고 보여 지는 이들이 피지배자가 된다.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판옵티콘의 죄수들은 중앙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이러한 방식은 또 다시 발전을 거듭한다. 발전이란 단어는 여기에서는 절대 긍정적 의미가 아니다. 하긴 발전이란 단어가 긍정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암튼 권력은 나병 환자의 격리, 페스트 질병의 관리에서 유레카(!)의 발견을 하게 되고, 그 이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민중을 관리, 통제하게 된다.

 

폭력과 압박보다는 자발적인 구속을 유인해내는 방법. 이는 현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휴대폰, 인터넷, GPS, cctv. 우리는 이미 사생활이라는 것을 박물관에 보내야 할지 모른다. 시선은 저자의 말처럼 권력이었다. 아니 지금도 권력이다. 그 권력은 이제 시선에서 앎으로 다시 정보로 진화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 새 우리는 500원 할인, 경품 행사,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우리의 사생활, 개인정보를 순순히 토해낸다. 옥션을 욕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회원가입을 한 순간 이미 우리는 위험을 각오한 것이다.

 

푸코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은 시선의 권력화, 시선의 진화, 권력의 보다 세련되어진 통제, 감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미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몰카(몰래카메라)에 익숙해진 우리는 점차 스스로 관음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싸움 구경,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 지금도 그럴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보다 은밀한 싸움, 은밀한 행동을 엿보는 것은 그 재미 면에서 최고를 달린다. 정작 치고 박고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이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그 재미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짐 캐리의 《트루먼쇼》를 기억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미 트루먼이 되었다는 서글픈 사실을. 때문에 저자는 말한다. ‘보는 눈’보다는 ‘우는 눈’을 주목했던 자크 데리다를. ‘보는 눈’이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눈이라면 ‘우는 눈’은 연민과 비탄의 따뜻한 눈이다. 국가가, 기업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보는 눈’을 온전히 버리고 ‘우는 눈’을 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래도 국가와 기업에겐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감시하고 훔쳐보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내가 대자적 존재인 것과 같이 타인도 대자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는 눈’에 대한 희망이 데리다만의 것은 아니리라.

 

상당히 난해할 수도 있는 여러 철학적 이론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나 같은 멍청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썼다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문장 곳곳에서 저자의 보수적 성향이 드러나지만 애교로 봐주겠다. 적어도 ‘이 세상 나쁜 것은 모조리 좌파 때문’이라고 주저리 주저리 거리는 찌질이 정치인들 보다는 나으니까.

 

보수도 진보도 알고 떠들었으면 하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난 모르니까 안 떠든다. 때문에 책은 알고 떠드는(감히 떠든다는 표현을 써서 심히 송구스럽지만) 당당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 같은 찌질이도 충분히 끄덕거릴 만큼 명백하다.

 

“내 귀의 도청장치”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사건이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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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별 역사 인물 찾기 28
멜빈 골드스타인 외 지음, 이광일 옮김 / 실천문학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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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 바로 국가권력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국가의 권력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권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물리적인 죽임이든 정신적인 죽임이든.

 

때문에 난 굳이 아나키스트라 말할 깜냥은 지니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국가를 혐오한다. 특히 이는 이른 바 한민족이라 불리는 한반도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이들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땅위에 역사라는 것이 발명된 이래 단 한 순간도 국가라는 것에게 온전한 지킴을 받지 못했다. 다만 국가가 필요할 때 동원되어 부역하고 죽었을 뿐이다.

 

최근 천안함 참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국민의 숭고한 의무라 불리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끌려간 꽃다운 청춘들이 차가운 물 속 아래에서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동안 국가 권력은 그들을 구해내지 못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설치는 언론들도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 그들을 구하려다 다른 생명들이 희생되었을 뿐이다.

 

국방력 세계 10위를 맴도는 대한민국은, 그러나 국가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이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다만 소모품일 뿐이다. 미국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이미 싸늘히 식은 시신위에 성조기를 덮어주며 온갖 화려한 치장으로 영웅화한다.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죽어갔다고 칭송한다. 하염없이 울고 있는 부모들에게 말한다. ‘댁의 아드님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었다’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꼴들이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당당히 벌어진다. 도대체 속절없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조국을 위해서인가. 그 조국은 도대체 무엇인가. 부모들의 피눈물을 토해내도록 만드는 그 조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에게 조국은 다만 괴물일 뿐이었다. 자식들을 구해달라는 눈물어린 절규를 차디찬 총으로 가로막는 권력. 그들을 폭도처럼 취급하는 권력. 자신들의 실수를 가리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는 권력. 그랬다. 이것이 권력이란 괴물의 실체였다.

 

개인의 죽음을 영웅화하여 사회적 규율을 다잡는 것.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특기다. 미국은 물론이다. 아니 이건 비단 제국주의뿐만 아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두 다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에게 국민은, 혹은 인민은 소모품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가는 거다.

 

생명은 너무나 소중하다. 말해 무엇 하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안 된다. 우리는 동족끼리 피터지게 싸운 민족이고, 아직도 ‘북괴(!)’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단다. 언제나 국가 예산 중 국방비는 최우선 되어야 하고, 국민들은 자신이 멋모르고 갖다 바친 돈들이 도대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다만 국군 장병 아저씨, 용감한 대한민국 군대를 믿을 뿐이다. 아프간이든, 이라크든, 그 어디든 우리의 돈이 피로 변할 수 있음을 알려 하지 않는다. 군산복합기업체에 로비자금으로 들어가는지, 군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돈이, 노력이 살인무기가 되어 우리를 겨눌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티베트의 역사를 다룬 책을 말하며 왜 이리 사족이 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연이어 터진 사건들이 절묘했다. 기가 막혔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 동생들이, 친구들이, 선배들이 그렇게 바다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영문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욕만, 더러운 권력에 대한 더러운 욕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며 티베트의 역사를 읽어내려갔다.

 

푼초 왕계, 그는 푼왕으로 불린다. 티베트족 사람들의 이름은 대부분 네 글자로 되어있고, 앞 글자를 따 두 글자로 불린다고 한다. 푼왕. 그는 어린 나이에 부조리한 티베트의 현실에 울분하고,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애정으로 평등한 티베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이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투쟁한다.

 

열일곱의 나이에 티베트 공산당을 창건하고, 구태의연한 귀족주의, 봉건체제에 안주해 있던 티베트를 바꾸기 위해 투신한다. 티베트 지배층으로부터는 사회주의자라고 낙인찍혀 추방당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에는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추격을 당하던 그는 마오의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군벌세력을 몰아내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것은 티베트 민족의 완전한 자치와 스스로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모든 티베트 민족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세력을 몰아낸 후 국민당 세력 하에 있던 티베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는 결국 군사적인 지배냐 평화적 합의를 통한 편입이냐의 갈림길이었다. 이때 푼왕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과 달라이 라마의 회담에 함께 해 중국과 티베트 간의 17개조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맡게 된다.

 

푼왕이 꿈꾼 것은 사회주의 대가정이었다. 그는 이론과 실천적인 면에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만큼 순수했다. 때문에 중국과 티베트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함께 이상을 그려갈 수 있는 사회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최선을 다해 양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푼왕의 노력이 없었다면, 티베트가 중국과의 협의를 거부했다면 중국은 군사력으로 티베트를 점령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상황과 무엇이 다르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티베트를 자치구로 인정은 하지만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2009년에도 총칼로 티베트를 짓밟은 사례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푼왕은 믿었다. 진정한 사회주의, 모두가 평등한 세상. 소수이든 다수이든 사회주의라는 공통의 목적을 지닌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투쟁한 것이다.

 

결국 그의 노력은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화주의의 폭풍 아래 가라앉게 된다. 그는 그토록 헌신했던 공산주의 바로 그것에 의해 유배되어 18년이란 세월을 차디찬 독방에서 보내게 된다. 죄목이 무엇인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다. 20세기 중국의 바스티유라 불리는 베이징 친청 제1교도소에서 보낸 18년의 세월.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자신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민족 간의 진정한 자치와 평등. 이 화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기에 그의 꿈은 현실화될 수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투옥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었던 신문 가장자리 여백을 잘라 밥풀로 붙이고 또 붙여서 백지를 만들고, 염료가 배어나온 옷 빤 물을 증발시켜 물감으로 사용해 그는 기록해 나갔다.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신념을. 종이가 없기에 작게 써야 했다. 깨알같이 써내려간 것이 10만 자에 이르렀다. 감옥도 그의 영혼을, 그의 신념을 죽일 순 없었던 것이다

 

56살의 나이로 석방된 그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 티베트를 비롯한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들이 진정한 자치와 평등을 얻기 위해 그는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여든여덟의 나이. 이미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아버지도, 부인도, 친구들도 세상을 떠났다. 광포한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그는 모든 걸 잃었지만,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고 살아남았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다시 한 번 혁명을 생각해 본다. 푼왕의 삶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 치하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함께 독립운동, 반제국주의 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을 떠올렸다. 《아리랑》의 김산을 떠올렸다. 민생단 사건으로 스러져간 수많은 사회주의자들,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중국을 도와 일제를 몰아내면 진정 평등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다. 그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쳐 투쟁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시대에, 신념에 배반당해 그렇게 죽어갔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세상은, 물론 없다. 하지만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도 없다. 역사는 반복되고 또한 재해석된다. 새로운 역사는 새로운 과거일 뿐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미래를 찾는 이유이기도 한다. 눈의 나라 티베트에서 민족의 완전한 자치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혁명가. 자신의 신념이었던 공산주의에 의해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혁명가. 이제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금 티베트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혁명가.

 

이 땅. 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땅 위에, 혁명가는 어디에 있을까. 온갖 더러운 음모와 계략이 판치는 똥물 같은 세상 속에서 진정 민족을 위해 혹은 내 가족, 내 이웃을 위해 싸우고 있는 혁명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 시대 김산은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의 푼왕은 어디에 있는가. 거짓을 밥 먹듯 일삼으며 일신의 안위와 부귀를 위해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살해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지금 이 땅을 지배한다고 믿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고 있다. 이 땅 곳곳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이 땅 모든 민중들을 서로 이간질 시키며, 더러운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언론을 장악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아이폰 촛불에도 연행을 일삼는 찌질이 짓거리를 하면서도 자신들은 겁먹지 않았다고 믿을 것이다. 전직 총리는 잡범 대하듯 오라 가라 하면서, 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차기 대선 전까지만 감옥에 집어넣으려 발악을 하면서도, 검은 돈을 받아먹고 배를 튕기던 공정택 교육감은 죄가 드러났음에도 조심조심 모신다. 서울을 디자인 도시로 만들며 아이들 밥값을 가로채고, 전 국토를 살린다면서 파헤친다. 북한을 이용해 여전히 국민들을 협박하고, 정작 국민들에겐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외친다. 다시 한 번 월드컵을 통해 뭉치자고 개소리한다.

 

그래, 바로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절실하고 치열하다. 살아가려는 이들을 죽이는 것. 그것은 국가도 뭐도 아니다. 때문에 지금의 현실은 정상이 아니다. 극도로 뒤틀린 아비규환일 뿐.

 

선거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스스로 살아있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더러움 앞에 침을 뱉지 못하는 소인배는 되고 싶지 않다. 더러우면 더럽다고 외치는 것이 사람이다. 그게 진정한 사람이다.

 

나는 국민이 아닌 사람이고 싶다.

 

천안함 희생자들과 이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명복을 빈다.

 

대통령은 제발 그런 곳, 가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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