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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 오늘 하루 cctv에 노출된 횟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파트, 엘리베이터, 지하철, 관공서, 호텔, 백화점, 마트, 주차장 아니면 그 어디에서라도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음을 당신은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서울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매일 평균 39회이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고로 비극이다. 사생활? 그 기준이 어느 정도까지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당 부분 침해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동성범죄자나 기타 등등의 흉악범을 잡는 데 cctv가 어리바리한 경찰 보다 뛰어난(물론 일부 경찰을 의미한다. MB께서 한 번 뜨시면 경찰은 순간 수퍼캅으로 변한다)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인권침해니 사생활 침해니 떠들어도 cctv는 무한정 늘어나고 있다.
자, 살펴보자. 권력이, 그것도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당신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당신의 신용카드, 당신의 네비게이션이 당신의 행동, 위치를 낱낱이 파악한다. 당신이 사용하는 인터넷이 당신을 감시하고, 또한 규정한다. 당신이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책, 음반, 화장품, 액세서리, 전자제품 등등 모든 것으로 당신의 소비 수준과 소비 행태를 파악한다. 그런 통계는 모이고 모여 당신에게 언제쯤 어떤 물건을 광고하면 구매할 것인가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맞추어 광고 메일을 날린다.
국가권력, 또한 기업권력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감시한다고 당신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역전의 상황도 빈번하다. 개인이 개인을 감시하고 개인이 개인을 훔쳐보는 사례는 이미 일반화 되었다. TV엔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훔쳐보기’ 프로그램(리얼리티란 이름으로 포장한다)이 인기이고, 홈페이지,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정도로 보인다. 자신의 누드, 혹은 세미누드를 공개하는 홈페이지도 수두룩하다.
또한 우리는 휴대폰 등의 기기를 이용해 타인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타인을 찍고 감시하고 유포한다. ‘개똥녀’‘된장녀’등이 그 대표적 피해사례 중 하나다. 아무리 그들이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의사에 관계없이 그들을 찍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행위는 분명 범죄이다. 그것도 아주 죄질이 나쁜.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양의 사진과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그 중 어떤 이들은 죽일 놈 혹은 년, 어떤 이들은 완소남, 혹은 녀가 된다. 순서가 맘에 안들면 다시 바꾸겠다. 년 혹은 놈, 녀 혹은 남이 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시대는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 누가 대자적 존재이고, 누가 즉자적 존재인가. 과거 권력은 만인이 한 사람을 바라보도록 강제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오직 왕, 황제만을 바라봐야 했다. 오직 왕만이 대자적 존재요, 나머지는 영혼도 사고도 없는 돌과 같은 즉자적 존재여야만 했다.
이런 추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한다. 점차 권력은 만인에게 보여주는 방식보다 좀 더 진화한 방식으로 발전해 나간다. 넓은 광장에서 모든 시민들을 불러놓고 공개 처형을 통해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수많은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꿈꾸게 되었다. 이땐 보는 이가 지배자가 되고 보여 지는 이들이 피지배자가 된다.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판옵티콘의 죄수들은 중앙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이러한 방식은 또 다시 발전을 거듭한다. 발전이란 단어는 여기에서는 절대 긍정적 의미가 아니다. 하긴 발전이란 단어가 긍정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암튼 권력은 나병 환자의 격리, 페스트 질병의 관리에서 유레카(!)의 발견을 하게 되고, 그 이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민중을 관리, 통제하게 된다.
폭력과 압박보다는 자발적인 구속을 유인해내는 방법. 이는 현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휴대폰, 인터넷, GPS, cctv. 우리는 이미 사생활이라는 것을 박물관에 보내야 할지 모른다. 시선은 저자의 말처럼 권력이었다. 아니 지금도 권력이다. 그 권력은 이제 시선에서 앎으로 다시 정보로 진화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 새 우리는 500원 할인, 경품 행사,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우리의 사생활, 개인정보를 순순히 토해낸다. 옥션을 욕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회원가입을 한 순간 이미 우리는 위험을 각오한 것이다.
푸코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은 시선의 권력화, 시선의 진화, 권력의 보다 세련되어진 통제, 감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미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몰카(몰래카메라)에 익숙해진 우리는 점차 스스로 관음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싸움 구경,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 지금도 그럴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보다 은밀한 싸움, 은밀한 행동을 엿보는 것은 그 재미 면에서 최고를 달린다. 정작 치고 박고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이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그 재미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짐 캐리의 《트루먼쇼》를 기억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미 트루먼이 되었다는 서글픈 사실을. 때문에 저자는 말한다. ‘보는 눈’보다는 ‘우는 눈’을 주목했던 자크 데리다를. ‘보는 눈’이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눈이라면 ‘우는 눈’은 연민과 비탄의 따뜻한 눈이다. 국가가, 기업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보는 눈’을 온전히 버리고 ‘우는 눈’을 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래도 국가와 기업에겐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감시하고 훔쳐보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내가 대자적 존재인 것과 같이 타인도 대자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는 눈’에 대한 희망이 데리다만의 것은 아니리라.
상당히 난해할 수도 있는 여러 철학적 이론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나 같은 멍청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썼다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문장 곳곳에서 저자의 보수적 성향이 드러나지만 애교로 봐주겠다. 적어도 ‘이 세상 나쁜 것은 모조리 좌파 때문’이라고 주저리 주저리 거리는 찌질이 정치인들 보다는 나으니까.
보수도 진보도 알고 떠들었으면 하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난 모르니까 안 떠든다. 때문에 책은 알고 떠드는(감히 떠든다는 표현을 써서 심히 송구스럽지만) 당당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 같은 찌질이도 충분히 끄덕거릴 만큼 명백하다.
“내 귀의 도청장치”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사건이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