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나의 조국 - 시사고전일지
홍경표 지음 / 에이치이엠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있는 중간에 책을 평가한다는 것이 조금 부적절하긴 하지만, 도저히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책이라 먼저 서평을 올립니다.

 

저자는 1954년 부산에서 태어났는데, 굳이 당시 부산이 피난지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직위를 얻으며 살아온 저자는 지금도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책은 동양 고전의 문장들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대동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려 만들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2005년 2월 10일 북의 6자회담 불참 선언 직후부터 2007년 4월 2일 한미FTA가 타결된 날까지를 그 범위로 정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입니다.

 

아울러 필자는 주로 조선일보의 기사를 인용하며 글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정 신문의 논조를 지지하기 때문에 이 신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참여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당시에는 비판적인 뉴스를 조선일보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벌써 책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시기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모든 자료와 언론의 다양한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민심의 목소리를 다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특정 언론의 편파적 기사를 바탕으로 글을 풀어가니 내용 역시 지극히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글 자체에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한겨레신문만을 텍스트로 하여 글을 풀어나갔다 해도 같은 지적을 받아야 합니다.

 

저자가 시기의 범위를 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듯 책의 내용은 북에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물론 조선일보를 기본 자료로 했으니 반북적 이데올로기와 냉전적 시각이 두드러집니다. 그렇게 글을 써내려가면서 동양 고전의 문장들을 인용합니다. 제 논의 물대기 식의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한정되고, 국제사회에 대한 시각 역시 편향적입니다. 북을 화해와 통일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정복해야 하고 우리가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어처구니없는 시각입니다. 지난 10년간의 화해협력 정책을 폄하하며, 북을 냉정히 바라볼 것을 주문합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원하던 이명박 정부는 과연 북을 냉정히 보고 있는 것일까요? 저자의 연륜과 학문적 소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안목입니다.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은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저자는 교묘한 줄타기를 서슴없이 합니다. 책의 내용 중 북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생명을 건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저자는 진보와 보수 어느 쪽에서라도 욕을 먹지 않겠다는 강한 줄타기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라는 대동사회는 구호에 불과합니다. 중용의 뜻을 아직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동양 고전을 그렇게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자는 북 인민들의 인권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도 지난 두 정권이 ‘퍼주기’를 통해 북의 군사력만 키워놓았다는 비상식적인 말만 되풀이합니다. 과연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을 네루라 착각하고 ‘세계사 편력’을 쓰듯 자만하여 자녀들에게 이 책을 물려주는 우는 범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무리 두꺼운 분량과 온갖 아름다운 고사성어들의 향연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언론의 자료를 통한 정확한 통계라 하더라도(물론 조선일보의 통계에 대해 전 심각한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 바꾸기에 달인이니까요) 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책은 누구라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활자 공해, 종이 낭비, 환경 파괴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대한 지나친 사랑과 자부심은 이처럼 무의미한 생산을 낳곤 합니다. 자기 과시, 지적 허영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국제정치학, 북한학, 통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전무해 보입니다.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 글을 쓴다면 최소한의 기본 상식은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자에게 기본상식은 조선일보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오류를 안고 태어난 셈입니다. 조선일보는 북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 제대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 드러내지 않을 집단입니다. 돈이 되거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저는 북한학을 전공했습니다. 저자는 의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감히 저자에게 의학에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다릅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전문가인양 행세하고 좀 아는 양 거들먹거립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실은 얼마나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모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 넘게 북을 공부하고 통일을 고민해왔지만, 함부로 북을 단정 짓는 무식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제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무례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민족문제에 대해, 남북관계에 대해 너무나 쉽게 비판하고 쉽게 단정 짓는 이들이 무참해 보이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를 한 수 아래로 깔보며 시작하는 대화는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한 대화는 없습니다.

 

진실이 담겨있지 않는 도움 역시 별다른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로 다가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의료라는 숭고한 직업을 택한 이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북을 바라보는 시각의 교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거창한 명분 보다는 이웃이라는 관점으로 북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제발.

 

그리고 너무나 건방진 이야기지만, 적어도 북에 대해서는 더 공부하시고, 글을 쓰더라도 쓰시길 바랍니다. 수많은 북 전문가들이나 혹은 통일운동, 대북사업을 하는 많은 이들이 보기에 저자의 글은 단지 안타까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아울러 북을 이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겐 더더욱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와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저는 지금 저자의 책 앞 부분 두 챕터를 이제 읽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다 읽고 난 뒤 지금의 제 아쉬움과 섭섭함이 가신다면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른 바 명문대를 나와 캐나다, 영국 등 선진국이라 말하는 서구에서 공부하신 저자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지식인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제 아쉬움과 섭섭함을 덮을만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저 책을 다 읽겠습니다. 비록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구절들이 계속 나타나지만, 참고 읽겠습니다. 이것도 대동사회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마저 다 읽고도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밝혀진다면.

 

정말 너무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디 조선일보를 보더라도 다른 신문들, 언론들도 함께 보시길 바랍니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닙니다. 매우 질 떨어지는 사기업일 뿐입니다. 언론이라 부르면 부르는 이의 격이 떨어지는 신문입니다.

 

어린 녀석이 너무 격하게 글을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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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2012-03-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 부터가 밥맛 떨어진다 싶어서 서평 좀 찻아 보았더니 역시나군요 ㅎㅎ

메틀키드 2012-03-2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색사랑 젊은 애인 향기문학 시선 3
임향 지음 / 도움이출판사(도우미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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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서평까지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데, 그냥 뭐…. 그렇습니다.^^

우선 제가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그야말로 MB 양심 만큼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 주시고.

 

시인은 우선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고요. 문학활동 분야를 보니 참 맡고 계신 직책이 많으신 분이네요. 회장, 부회장, 회원, 이사, 운영이사 등등. 바쁘시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집도 벌써 22권이나 내셨네요. 다작이 능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소설도 많이 쓰셨고요. 문학상도 네 번이나 수상하셨네요. 미술 분야에도 소질이 있으신 것 같고요.

 

시집을 읽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전 시를 읽을 줄 몰라서 일까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요.

 

음…사람은 저마다 동경하고 좋아하고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들이 있죠. 그 사람이 주변 인물이든, 혹은 연예인 이든, 아니면 역사적 인물이든 말이죠. 시인에게 그런 분은 탤런트 박신양이었습니다. 때문에 팬 카페에 가입을 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이렇게 그를 위한 시까지 쓰셨고요.

 

누구나 좋아하는 연예인은 한 두 명쯤 있겠죠. 저 역시 국내 연예인은 아니지만,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로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거나, 하셨던 고인들이죠.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여전히 감동하고 여전히 눈물 흘립니다.

 

전 그것과 시인의 시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신양을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시인의 시들이 하찮아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일명 ‘빠순이’라 불리기엔 시인의 연세가 지긋하시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뭐라 탓하거나 비웃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글이나 노래, 혹은 그 어떤 표현 수단을 이용해 발산하는 것은 건강한 모습입니다. 스토커나 정말 무서운 광팬이 되어 사회적 물의, 혹은 그 당사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보다는 백만 배 나은 모습이죠.

 

물론 시적 수준이나 이런 글들을 굳이 책으로 펴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저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 생각이 같고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로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출판의 자유 역시 함부로 침해할 수 없죠.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남을 헐뜯고 모함하고 비난하는 그야말로 ‘쓰레기’같은 책들에 비해서 전 오히려 시인의 순수하고도 온유함이 담긴 시들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박신양은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요. 나이에 상관없이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팬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거든요.

 

뉴스를 보니 고 박용하 씨의 일본 팬들이 일본 현지에서 추모 행사를 치렀다고 하더군요. 다른 이들이 보면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보기 좋았습니다. 아깝게 생을 마감한 고인이나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의 연기와 노래를 사랑했던 이들에겐 의미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을까요.

 

삶의 소소한 행복과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시인의 박신양에 대한 사랑과 애정, 그 건강함이 보기 좋았습니다.

 

문학적 수준이나 시의 완결성을 따지는 분들에겐 짜증나는 책일지 몰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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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가 되는 감사 노트
고도원 외 지음, 황중환 그림 / 나무생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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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아시는 주위의 분들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 까칠한 성격에 대한 우려와 함께 ‘긍정적인 생각’을 좀 하라는 말씀이시죠. 맨날 불평만 하지 말고, 세상에 좋은 부분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죠. 세상에 아름다운 그 수많은 것들에 대한 경외감과 겸손함.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전 정말 세상 모든 것이 보기 싫고 짜증만 나고 그럴까요? 에이, 그럴리가요. 저 역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조그만 존재 중 하나인데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다행인 것이 많은데요. 그럼요.

 

다만 전 지금의 세상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 지금보다 조금씩 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부조리와 불의가 정당화되고 열심히 착하게 감사하며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 아닌,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이 땅, 이 사람들에 대한 모든 희망과 기대를 접었다면, 글쎄요. 아마 전 비겁하게 이민 따위를 고민하거나, 혹은 세상과 벽을 쌓고 숨어버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 하나 따위 어디 숨더라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만, 잘 돌아가는 세상에 살짝 기름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으니까요.

 

책은 매우 짧은 글을 담고 있습니다. 8분이 각자 ‘감사’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죠. 목사님, 수녀님, 스님, 신부님 등 종교인도 계시고, 시인, 출판인 등 여러 분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하며 사는 삶이 가장 부유하고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요.

 

전 그 중 원철 스님의 글이 와 닿았어요. “주는 것만 보시인 줄 알았더니 잘 받아주는 것도 큰 보시임을 이번에 다시금 알게 되었다”는 말은 제 가슴을 찔렀죠. 그런 경험이 많거든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길을 가다 어머니뻘 되시는 분이 건네주는 홍보물을 뿌리치며, 때로는 짜증내며 거절했던 기억, 또 물론 스팸성이 있긴 하지만 홍보 전화를 받고 신경질 내며 끊어버렸던 일들. 그 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그냥 받기는 쉽지만 잘 받기는 쉽지 않다. 잘 받는 것은 주는 이의 수고를 이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이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소통과 행복의 씨앗을 퍼뜨리게 된다. 이웃들의 사랑을 감사히 받는 마음, 자연의 혜택을 감사히 받는 마음, 다른 이의 좋은 의도의 손길을 감사히 받는 마음은 보시이며 행복의 길이다.”

 

서명운동에 동참해 달라는 손길을 뿌리치고, 이웃돕기를 호소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쳐버린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상대방의 손길을 외면하며 니가 받기를 원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며 살며 부지런히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다행입니다, 행복합니다.

이 네 가지 감·사·다·행은 우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감사다행을 상기하고 반복하면서 새긴다면 행운이 늘 함께 할 것이랍니다.

굳이 행운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 더 이상의 진리는 없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결코 웃으며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더럽고, 서러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힘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염려해주며,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다시 웃을 수 있습니다.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리입니다. 순리를 거역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일 테죠.

 

무엇보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힘을 내겠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그리고 사랑합니다.

 

책은 저자들과 함께 제 자신도 함께 써내려가는 형식입니다. 매일 매일 감사할 분들, 감사할 일들, 감사하고픈 것들을 부지런히 적어 내려갈 생각입니다. 아마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겠죠? 이래도 저래도 모두 다 감사하다는 생각. 하찮아 보여도 너무나 중요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한 책이고,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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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오세훈의 조용한 혁명
김미라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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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억울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는 노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를 사퇴했다면 오세훈 대신 한명숙 전 총리가 새로운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묻어난 비난이었다.

 

물론 옳지 않은 비난이었고, 뒤바뀐 분석이었다. 하지만 노 대표를 그 정도로 비난한 것은 그만큼, 한명숙 전 총리의 승리를 사람들이 바라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럼? 그렇다. 오세훈 시장을 원치 않았다는 소리다.

 

내가 이 책을 얻게 된 것은 지방 선거를 앞둔 얼마 전이었다. 당시 이름 좀 있다는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혹은 누구세요? 묻고 싶은 이들도 너도나도 자서전 비스무리한 것들을 마구 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충분히 예상했다. 오세훈 시장의 자랑이 듬뿍 담긴 책이 나올 것임을. 그리고? 나왔다.

 

뒷 표지에 추천사 비슷한 글들에서 먼저 기분이 상했다. 하나 같이 우울한 인간들이 오세훈 시장의 책을 추천하고 있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그리고 박경림. 박경림에겐 그리 유감이 없었지만, 솔직히 실망했다. 자신이 너무 머리가 좋다고 과신하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 난 오세훈 시장에게 이미 실망한 사람 중 하나였다. 자신은 아니라고 우악스럽게 우기겠지만, 그는 이명박 전 시장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 청계천 대신 광화문 광장을 만들고, 거기서 스노우보드 대회를 열만큼 개념 상실이다. 서울광장을 굳게 사수하라는 정부의 말에 덤비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쓸데없이 막대한 세금을 퍼부었다. 겉만 번지르르하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근시안적 태도도 실망이다. 보여주기를 싫어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상당히 좋아한다. 물론 오해였으면 좋겠다.

 

책을 쓴 저자는 물론 서울시에서 얼마간 일도 했으니, 시정에 대해 잘 알 수도 있겠지만, 시정백서를 거의 그대로 옮긴 듯한 문장들이 의외로 많았다. 일방적인 서울시 홍보, 오세훈 치적에 대한 용비어천가다. 솔직히 조금 역겹다 싶을 정도로 찬사를 늘어놓는다. 하긴 책을 만든 목적이 그러니 뭐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서민을 생각하고 환경을 중요시 하며, 서울시의 미래를 위해 당장 티가 안 나는 일을 묵묵히 추진한다는 것. 글쎄, 아이들 급식비를 땡겨다 서울시의 겉모습 치장하는데 쏟는 것이 정말 서울시의 먼 미래를 보고 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저자는 생각이 글러먹었다. 문장 곳곳에 잘못된 역사인식과 쏠림 현상이 보인다. 일부러 김대중 대통령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글들을 실어 ‘꼴통 보수’와의 차별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게 어쩌면 더 치사하고 보기 싫다.

 

“전임 이명박 시장이 역사적인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 유력한 대선주자로 비상하면서 이른바 ‘청계천 신드롬’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던 그 때,…”

 

“‘경쟁이 경쟁력이다’는 단순한 모토 아래 메스를 들었다. …새로운 인사 시스템을 시행한다는 말에 동요하는 직원들에게 그는 프리미어 리그의 예를 들며 우리 모두 프리미어 리거가 되자고 이해를 구했다. 오늘날 프리미어 리그의 경쟁력과 명성이 바로 ‘UP&DOWN’방식의 철저한 경쟁체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오 시장의 입장에선 주택 정책이야말로 시민들의 재산권, 삶의 질과 직결된 중대 사안으로, 결코 유마무야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시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한다는 원칙에 반대할 공무원이나 시민단체, 언론은 없을 것이고, 이제부터는 인내를 가지고 설득해 상호 합의를 이끌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도시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을 견인하는 시대인 만큼 그것은 국가 전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일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국무장관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헨리 키신저는…”

 

“Design or Resign!(디자인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라)”

이것은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가 1979년 첫 번째 각료회의에서 했던 말이다. ‘고질적인 노동자 파업과 영국병을 고친 정치인’이라는 평가부터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지향점에 따라 다양하지만, 이미 30년 전 디자인의 가치를 알아본 그녀의 혜안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내 생각을 말하자. 청계천 복원사업은 역사적이긴 하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대형 인공천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물을 가둬놓고, 그게 친 환경적이라고 떠드는, 전 세계가 조롱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분수’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경쟁이 경쟁력이라는 말은, 결국 시정이나 정치도 축구처럼 당장 성과가 나지 않으면 2군으로 떨어지고, 실력이 있는 놈들만 1부로 올라가는 시장주의에 입각해서 하자는 말이다.

 

시민들의 재산권, 삶의 질과 직결된 중대 사안으로 결코 유야무야 넘길 수 없는 것이 주택 정책이었기에 그는 용산에서 그 많은 철거민들이 타 죽어갈 때 침묵했을까. 시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한다는 원칙은 도대체 어디에 갔을까. 서울을 겉만 번지르르한 빈 깡통으로 만드는 것에 시민들이 동의했을까. 아이들이 밥을 굶고, 집값으로 선거가 뒤바뀌는 현실은 오세훈 시장에겐 ‘다른 나라 일’일까.

 

왜 도시의 경쟁력만이 국가 경쟁력을 견인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온 국토를 도시로 만들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될까. 쓸 때 없는 터치스크린을 돈 처발라 버스 정류장, 지하철 곳곳에 설치하면 우리나라가 디자인 대빵 멋있는 도시가 될까.

 

헨리 키신저가 얼마나 많은 국제분쟁에 개입했으며,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끼친 해악에 대해서 저자는 정말 모를까. 그가 국제 전범 수준이라는 사실도 모를까. 뭔가~!

그리고 하필 비유할 사람이 없어서 영국을 망국의 지름길로 인도한 대처 수상, 냉전의 전성 시대를 열어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간 대처 수상을 거론할까. 존경할 사람이 그리도 없을까.

 

앞서 말했다. 온전히 내 생각이라고. 동의하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다. 오세훈 시장은 조금 억울할지 모른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말이다. 거의 떨어진 것과 같은 결과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시민들은 오세훈 시장을 버렸다. 왜 그랬을까. 책만 보면 오 시장이 서울을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단순하다. 그의 서민정책에 정작 서민은 없었기 때문이다. 종로 거리에 노점상을 쓸어버려서, 서울시가 깨끗해 질 수는 있어도 서민들의 삶이 깨끗해 질 수는 없다. 조금 지저분해 보여도, 왁자지껄 시끌벅적해도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더 낫지 않을까. 그가 장기주택 시프트를 만들어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어도, 용산 참사의 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그를 기억할 것이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도시가 진정으로 아름다워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이 행복해야 비로소 도시는 살아있는 것이다. 뉴욕, 런던이 아름다운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 중 과연 얼마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 도쿄는? 자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 등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의 국민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형편없이 낙후됐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행한가? 서울시가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인가?



오세훈 시장이 역점을 두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분명 개선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책의 내용처럼 그가 위대하지는 않다.(물론 위대하다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선거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오직 강남의 시장이었을 뿐이다. 서울강남특별구청장인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 천금성인가 누군가 하는 작자가 쓴 전두환 용비어천가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읽고 어이가 없어 웃은 적이 있다. 글쓴 새끼는 광주의 학살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군사쿠데타로 인한 불법적 정권 찬탈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검소하고 애국적인 젊은 장군으로 전두환을 묘사했다.

 

저자에게 아주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조용한 혁명》을 통해 천금성이 떠올랐고, 황강과 북악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해도, 국민들은, 시민들은 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성을 담고 있는지, 또 어느 정도 계산된 것인지.

 

오세훈 시장은 분명 대권에 도전할 것이다. 서울시장 다음 대권 도전.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아주 안 좋은 것들 중 하나다. 물론 그 전에도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에 도전한 인간들이 많았지만, 이명박은 성공한 케이스 아닌가.

 

서울이 대한민국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 대한민국에 서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일할 수 있는 서울시장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진정 서울시민을 위해 일한 서울시장도 아직 본 적 없다. 오세훈 시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른 것일지 모른다. 그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한 정책들이 성과를 거두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이 낯간지럽고, 살짝 역겨운 이유가. 선거를 앞두고 그럭저럭 잘 만든 홍보용 책자이긴 하지만, 서민들에겐 절대, 특히 서울에 살고 있는 강남 3구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에겐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오 시장 말대로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일하고 싶었다면, 이딴 책은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아무리 선거에서 질 것 같았어도 말이다. 그냥 자신의 든든한 강남 인간들을 믿지 그랬나.

 

가까운 지인일수록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때문에 저자는 오세훈 시장에게 그리 도움이 되는 사람 같지는 않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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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플래닛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트라우마’, 즉 ‘외상’이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충격을 일컫는다.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 이에 대하여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재경험’과 감각의 마비 상태 사이에서 동요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재경험’이란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외상 사건과 유사하거나 외상 사건을 상징하는 여러 단서에 노출되었을 때,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조금 생뚱맞게 쓰일 때가 많다. 그 예로 내가 지금 ‘인격수양 차원’에서 읽고 있는 오세훈 시장 홍보 책자 《조용한 혁명》을 보자면, 오세훈에게 ‘청계천 신화(!)’를 이룬 이명박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적절치 못한 단어 사용이다. 오 시장은 MB에게 어떤 상처나 충격을 입지 않았으며,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냥 이명박의 서울시 삽질화와 대규모 ‘무용지물’ 건설 성과에 조금 신경이 쓰였고, 차기 대선을 노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나도 뭔가 폼 나는 걸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고 기술해야 옳다. 헉헉, 더럽게 길다. 쓰고 나니.

 

아무튼 이렇게 무분별하게 단어가 쓰일 정도로 아직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는 익숙치 않다. 식자들이 유식해 보이려고 아무 문장에나 어거지로 쓸 따름이다. 단어에 대한 사용 수준이 이러니,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이들에 대한 이해, 공감, 도움은 더더욱 일천한 수준이다.

 

책은 말하고 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 지속되어 왔던 트라우마는 계속 무시당하고 억압받아 왔다고, 기득권이나 자칭 자신들은 ‘정상’이라고 믿은 세력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탄압하고 소멸시키려 했다고. 외상을 입은 이들에 대한 치료는커녕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매도해 버렸다고.

 

이런 오랜 억압의 굴레를 깨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끊임없는 투쟁과 ‘드러내기’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세속적 민주주의 설립과정에서 히스테리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을 정점으로 반전의식과 전쟁 신경증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여성들의 눈물나는 투쟁의 결과로 비로소 여성학대, 강간, 폭력, 유아기 학대 등의 문제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소 거칠게 설명했지만, 줄기는 틀리지 않는다. 결국 진보적 정치운동과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로 비로소 ‘트라우마’에 대한 ‘바로 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자본가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종 자체는 ‘일어나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한다. 본디 멍청하고 우둔한 존재들이 인간이다.

 

책은 때문에 트라우마에 고통받았던 수많은 이들의 증언이자,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이를 극복하려 했던 치료자들의 일기이며, 이 둘의 협력과정이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와 상처,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실수도 발생한다. 치료자와 생존자는 모두 상처받고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다시는 자아를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악의 소멸에 대한 철저한 믿음, 선에 대한 신뢰, 그리고 공통성을 가진 이들의 용기어린 행동과 ‘드러내기’는 진실된 마음으로 생존자를 이해하려는 치료자들과 함께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낸다. 다시 생존자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고, 과거를 통제하게 되며,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만큼 트라우마에 빈번히 노출된 이들이 있을까 싶다. 식민지와 분단, 참옥한 전쟁과 극심한 가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비인간적 몰입과 투쟁, 그리고 지금과 같은 물질주의의 팽배. 그 사이 인간적 끈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고, 타인의 고통은 내 카드 결제일보다 관심이 없게 되어버렸다. 사람 하나 죽는 거, 그 정도는 별로 관심도 없고, 대형 참사 정도 발생해 줘야, ‘아, 좀 죽었나 보다’ 할 정도다.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단순히 ‘운 좋은 이들’에 불과하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심각하다. 아직도 6·25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6월만 되면 살인 충동을 절제할 수 없어 몸부림 치고, 각종 영화, 드라마를 통해 대리 살인의 만족을 느낀다. 특히 그런 현상은 이번 정권 들어 더욱 심해 보인다. 최근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을 잠시만 보라. 못 죽이고는 못 견디겠다는 모습들이다.

 

아울러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라는 기가 막힌 이유로 베트남 살육전에 동참했다. 베트남의 대학살을 기억하는 참전 용사들은 때문에, 지금도 극심한 트라우마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자신의 살육을 잊지 못하고, 살해당한 이들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5·18의 학살, 이어지는 이라크, 아프간 파병. 끊임없이 트라우마는 재생산되며, 많은 이들을 ‘국가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고통에 빠뜨린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성수대교 등 다 헤아릴 수도 없는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절규는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하는 특집 다큐 프로에서나 만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가정 내에서의 폭력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어떨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는 전쟁 못지않은 심각성을 가지고 있다. 남편, 아버지의 폭력으로 육체와 영혼을 모두 잃어버리는 아내와 아이들. 만성적인 성적 학대와 폭력은 한 인간을 그대로 식물화 시킨다. 이런 엄청난 폭력, 범죄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했고, 알고 있어도 모른 척 했다. 유아기의 당한 성적 학대, 혹은 폭행에 대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그를 괴롭힌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그만 두더라도 이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노력도 우리는 그동안 외면해왔다.

 

강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기실 강간 가해자의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심각성은 더해진다. 최근 어린이 성추행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그리고 일부 미친 남자새끼들의 마음속엔 “강간은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안 당할 수 있다‘는 또라이 같은 생각이 남아있다. 사실 이 생각은 굳건하고 단단해서 어지간하면 깨기 힘들 정도다.

 

그럼 강간당하는 여성들은 모두 마조히스트인가.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트라우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상처받은 이들’이 다시 자신을 찾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말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이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은 들지만, 극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조심스러운 접근,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인정해 준다는 것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인간에 의해 끊어진 것은 결국 인간에 의해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착취하는 정치 세력들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을 ‘전쟁의 위협’‘반공주의’로 착취했고, 수도권 중심주의에 피해자들인 비수도권 사람들을 ‘지역감정’이란 이름으로 착취했다. 여성, 노동자, 청소년 모두 각자의 특성과 트라우마에 연결되어 이용당한 측면이 강하다. 이제 이런 더럽고 위험한 장난은 집어치우고, 진정 ‘자격이’ 있는 이웃이 되기 노력해야 한다.

 

저자의 말은 때문에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우리에겐 말이다.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의 새로운 민주화 국가들의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진실에 대해 발언하고, 피해자의 고통이 완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인 장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덧붙여, 남아 있는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조직화된 노력이 요구된다. 최소한, 가장 큰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는 법정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정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피해자 집단의 무력한 분노는 곪아 터져 시간의 흐름조차 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선동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노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으나, 이렇게 고통받은 이들에게 집단적인 복수를 약속하면서 이 분노를 착취할 뿐이다. 외상을 경험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외상을 경험한 국가 또한 외상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며, 속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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