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플래닛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트라우마’, 즉 ‘외상’이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충격을 일컫는다.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 이에 대하여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재경험’과 감각의 마비 상태 사이에서 동요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재경험’이란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외상 사건과 유사하거나 외상 사건을 상징하는 여러 단서에 노출되었을 때,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조금 생뚱맞게 쓰일 때가 많다. 그 예로 내가 지금 ‘인격수양 차원’에서 읽고 있는 오세훈 시장 홍보 책자 《조용한 혁명》을 보자면, 오세훈에게 ‘청계천 신화(!)’를 이룬 이명박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적절치 못한 단어 사용이다. 오 시장은 MB에게 어떤 상처나 충격을 입지 않았으며,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냥 이명박의 서울시 삽질화와 대규모 ‘무용지물’ 건설 성과에 조금 신경이 쓰였고, 차기 대선을 노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나도 뭔가 폼 나는 걸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고 기술해야 옳다. 헉헉, 더럽게 길다. 쓰고 나니.

 

아무튼 이렇게 무분별하게 단어가 쓰일 정도로 아직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는 익숙치 않다. 식자들이 유식해 보이려고 아무 문장에나 어거지로 쓸 따름이다. 단어에 대한 사용 수준이 이러니,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이들에 대한 이해, 공감, 도움은 더더욱 일천한 수준이다.

 

책은 말하고 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 지속되어 왔던 트라우마는 계속 무시당하고 억압받아 왔다고, 기득권이나 자칭 자신들은 ‘정상’이라고 믿은 세력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탄압하고 소멸시키려 했다고. 외상을 입은 이들에 대한 치료는커녕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매도해 버렸다고.

 

이런 오랜 억압의 굴레를 깨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끊임없는 투쟁과 ‘드러내기’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세속적 민주주의 설립과정에서 히스테리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을 정점으로 반전의식과 전쟁 신경증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여성들의 눈물나는 투쟁의 결과로 비로소 여성학대, 강간, 폭력, 유아기 학대 등의 문제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소 거칠게 설명했지만, 줄기는 틀리지 않는다. 결국 진보적 정치운동과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로 비로소 ‘트라우마’에 대한 ‘바로 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자본가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종 자체는 ‘일어나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한다. 본디 멍청하고 우둔한 존재들이 인간이다.

 

책은 때문에 트라우마에 고통받았던 수많은 이들의 증언이자,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이를 극복하려 했던 치료자들의 일기이며, 이 둘의 협력과정이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와 상처,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실수도 발생한다. 치료자와 생존자는 모두 상처받고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다시는 자아를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악의 소멸에 대한 철저한 믿음, 선에 대한 신뢰, 그리고 공통성을 가진 이들의 용기어린 행동과 ‘드러내기’는 진실된 마음으로 생존자를 이해하려는 치료자들과 함께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낸다. 다시 생존자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고, 과거를 통제하게 되며,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만큼 트라우마에 빈번히 노출된 이들이 있을까 싶다. 식민지와 분단, 참옥한 전쟁과 극심한 가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비인간적 몰입과 투쟁, 그리고 지금과 같은 물질주의의 팽배. 그 사이 인간적 끈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고, 타인의 고통은 내 카드 결제일보다 관심이 없게 되어버렸다. 사람 하나 죽는 거, 그 정도는 별로 관심도 없고, 대형 참사 정도 발생해 줘야, ‘아, 좀 죽었나 보다’ 할 정도다.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단순히 ‘운 좋은 이들’에 불과하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심각하다. 아직도 6·25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6월만 되면 살인 충동을 절제할 수 없어 몸부림 치고, 각종 영화, 드라마를 통해 대리 살인의 만족을 느낀다. 특히 그런 현상은 이번 정권 들어 더욱 심해 보인다. 최근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을 잠시만 보라. 못 죽이고는 못 견디겠다는 모습들이다.

 

아울러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라는 기가 막힌 이유로 베트남 살육전에 동참했다. 베트남의 대학살을 기억하는 참전 용사들은 때문에, 지금도 극심한 트라우마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자신의 살육을 잊지 못하고, 살해당한 이들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5·18의 학살, 이어지는 이라크, 아프간 파병. 끊임없이 트라우마는 재생산되며, 많은 이들을 ‘국가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고통에 빠뜨린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성수대교 등 다 헤아릴 수도 없는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절규는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하는 특집 다큐 프로에서나 만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가정 내에서의 폭력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어떨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는 전쟁 못지않은 심각성을 가지고 있다. 남편, 아버지의 폭력으로 육체와 영혼을 모두 잃어버리는 아내와 아이들. 만성적인 성적 학대와 폭력은 한 인간을 그대로 식물화 시킨다. 이런 엄청난 폭력, 범죄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했고, 알고 있어도 모른 척 했다. 유아기의 당한 성적 학대, 혹은 폭행에 대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그를 괴롭힌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그만 두더라도 이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노력도 우리는 그동안 외면해왔다.

 

강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기실 강간 가해자의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심각성은 더해진다. 최근 어린이 성추행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그리고 일부 미친 남자새끼들의 마음속엔 “강간은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안 당할 수 있다‘는 또라이 같은 생각이 남아있다. 사실 이 생각은 굳건하고 단단해서 어지간하면 깨기 힘들 정도다.

 

그럼 강간당하는 여성들은 모두 마조히스트인가.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트라우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상처받은 이들’이 다시 자신을 찾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말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이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은 들지만, 극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조심스러운 접근,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인정해 준다는 것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인간에 의해 끊어진 것은 결국 인간에 의해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착취하는 정치 세력들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을 ‘전쟁의 위협’‘반공주의’로 착취했고, 수도권 중심주의에 피해자들인 비수도권 사람들을 ‘지역감정’이란 이름으로 착취했다. 여성, 노동자, 청소년 모두 각자의 특성과 트라우마에 연결되어 이용당한 측면이 강하다. 이제 이런 더럽고 위험한 장난은 집어치우고, 진정 ‘자격이’ 있는 이웃이 되기 노력해야 한다.

 

저자의 말은 때문에 지극히 유효하다. 특히 우리에겐 말이다.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의 새로운 민주화 국가들의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진실에 대해 발언하고, 피해자의 고통이 완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인 장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덧붙여, 남아 있는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조직화된 노력이 요구된다. 최소한, 가장 큰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는 법정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정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피해자 집단의 무력한 분노는 곪아 터져 시간의 흐름조차 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선동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노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으나, 이렇게 고통받은 이들에게 집단적인 복수를 약속하면서 이 분노를 착취할 뿐이다. 외상을 경험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외상을 경험한 국가 또한 외상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며, 속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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