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커 (반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29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SF소설이라…. 평소 그리 즐겨 읽는 장르는 아닙니다. 뭐 그렇다고 특별히 피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워낙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 약간은 두려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득이》를 워낙 재미있게 읽은지라,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란 말에 주저 없이 책을 들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참 영악합니다. 청소년 소설, 혹은 SF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페이지마다 보여주는 것은 여지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니, SF에서 무슨 현실이야기냐고요. 그렇습니다. 저자는 미래 사회를 통해 바로 지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싱커〉라는 게임을 통해 ‘반려수’, 즉 자신이 함께 느낄 수 있는 동물과 연동되어 ‘신아마존’을 체험하는 미마와 부건 그리고 다흡. 이들은 지구상 유일한 청정구역인 지하도시 ‘시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험과 위기. SF의 모든 미덕을 갖춘 소설은 쏠쏠한 흥미와 함께 미래에 대한 조금은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과연 어떤 세상이 진보한, 살기 좋은 세상일까요? 새까맣게 더러워지고 때가 끼더라도, 흙으로 범벅이 된 발바닥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뛰어노는 아이들과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까지 노오란 버스에 태워져 이러 저리 끌려 다니는 아이들 중 과연 누가 더 아이다운,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스스로 땅을 일구며, 조금은 힘이 들더라도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 아픔에 대한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하나 하나 걱정해가며, 거기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돈과 시간을 퍼부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까요.

 

책은 말합니다. 인류가 꿈꾸는 진보, 이상향은 어쩌면 이미 경험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그것을 한심하게 저버렸다고요. 착각 속의 진보나 윤택한 삶을 위해서 말이죠. 우리는 그것이 행복이고, 또 잘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책의 또 다른 미덕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기실 얼마나 허약하고 또 엉터리인지 적나라하게 말해줍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 저자가 표현한 곳이 ‘시안’인지 ‘한국’인지,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세계’인지 헷갈립니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자치대 제복을 입은 노인들이 몰려온 것이다. 자치대는 1세대 노인들이 시안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그들의 노란 제복은 주름을 좍 편 반질반질한 얼굴만큼이나 호감이 가지 않았다.…“우린 지난 시대의 참상을 직접 겪은 사람들로서 너희들의 철없는 짓거리를 중지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여기 개인 면담을 한 사람들 없어? 교육국에서 이번 시위를 뒤에서 조종한 세력을 찾는 눈치야.”

“그런 게 어딨어?”

“없지만 없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거지. 그들의 사고방식으론 말이야.”

“설사 그런 세력이 있다 한들, 찾아서 뭐하게? 우린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을 뿐인데.”

“그 일 자체를 가지고 트집 잡진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겁주려고 할 거야.”

 

따지고 보면 당시 세계에 만연하던, 특히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던 질병들도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값싼 치료약과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을 거라고 부건은 말했다.

 

인간은 때로 진보란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것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과니 혁신이니 발전이니 하면서 정당화하죠. 그러한 허명 때문에 사라져야 했던 수많은 생명들, 그리고 함께 사라지는 많은 추억들은 단지 뒤떨어진 구습일 뿐입니다.

 

그 결과가 참 아름답습니다. 지구상을 온통 파헤친 덕분에 이제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을 보듬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극지방은 녹아내려갈 것이며 몰디브는 잠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재앙을 피할 순 없을 것입니다.

 

《싱커》는 미래 사회의 빛과 어둠을 그리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아울러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스스로의 의지’를 말합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더더욱 주눅 들어야 하는 지금의 우리들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칫 그 집단이 위험한 방향으로 치닫는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집단을 경계하되 그 집단의 올바른 전진을 위해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집단 역시 개개인의 모음뿐이니까요.

 

조금은 느슨한 이야기 전개와 다소 빤히 보이는 결말 등이 읽은 재미를 아주 조금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충분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아울러 지식은 단지 이해로 그칠 수 없다는 소중한 이야기도 고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려라
하다 케이스케 지음, 고정아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엄청난 추위가 성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고요. 성탄이 모든 이에게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소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뭐 그래봤자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나름 이것저것 잡식으로 책을 읽는 제가 최근엔 이상하게 소설에만 손이 가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세상 때문일까요.

 

《달려라》의 작가는 처음 만나는 이였습니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뜻이죠. 때문에 이 책 한 권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조금 이릅니다. 하지만 이 책 하나만 두고 보자면 그는 무척 꼼꼼하고 뛰어난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일탈을 꿈꿉니다. 그 일탈의 끝은 각자 다르겠지만,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한 번 쯤은 과감한 ‘궤도이탈’을 상상하죠. 특히 현대와 같은 그야말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 일탈이 고의든 아니든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아쉽지만 비난받게 됩니다. 물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을 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사회는 치밀하게, 어떠한 것이라도 일탈 그 자체가 타인에게 일정한 피해가 가도록 꾸며놓았습니다. 사실 그리 큰 피해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죠.

 

주인공은 예전에 선물 받았지만, 잊고 처박아 두었던 경주용 자전거 ‘비앙키’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다시 꼼꼼히 닦고 조립하죠. 그리곤 떠납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말이죠. 다시 같은 길을 달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합니다.

 

그의 신분은 고등학생입니다. 이제 한 해가 지나면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아직 섹스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동창회에서 만난 초등학교 친구가 자꾸 맘에 걸립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다시 만난 그녀는 몰라보게 예뻐졌습니다.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도 예쁘지만, 이유 없이 주인공은 옛 동창에게 맘이 끌립니다.

 

그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간 마다 문자를 보내고 답을 받습니다. 그리곤 다시 휴대폰을 끄고 달립니다. 점점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연장되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빼먹게 됩니다. 처음엔 불안했던, 또한 묘한 스릴을 느꼈던 결석도 차츰 이어지자 덤덤해지고 그는 그냥 달립니다. 그리고는 느낍니다. 자신이 살아온 반경이 얼마나 좁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말이죠.

 

책을 읽고 있으면 일본 도쿄부터 혼슈 지방 최북단까지 달리는 자전거 한 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지방마다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그리고 우리 땅을 이렇게 자전거로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무척 조심해야겠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운전 솜씨를 알기 때문입니다.

 

매우 꼼꼼하게 여정을 그리고 있는 저자는 분명 이 소설에 나온 코스대로 달려본 듯합니 다. 그리고 각 지방의 특색과 기후 변화 등을 세심하게 관찰했을 것입니다. 경험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문장들. 그 성실함이 돋보입니다.

 

달리는 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본능일지 모릅니다. 물론 이제는 기계를 빌려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자전거가 주는 매력은 여전합니다. 주말만 되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갑니다. 그들의 힘찬 페들링을 보면 저도 그렇게 달리고 싶어지죠. 몸이 근질근질하면서 말이죠.

 

책은 청소년의 ‘질풍노도 시기’를 표현하고자 했을지 모릅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나이, 무언가 불만에 가득하고, 표현하고 싶은 나이. 세상에 이유 없이 떠들고 싶은 나이 말이죠. 누구나 한 번 쯤 겪어본 그 시간. 당신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일탈을 꿈꿨었나요.

 

지금도 일탈을 꿈꾸는 이들, 지금도 젊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아련함과 왠지 모를 충동을 느끼게 할 작품입니다. 처음엔 생소한 일본 지명들의 나열로 다소 지루하다 느낄지 모르지만,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인공과 함께 달리고 있는 자신을 말이죠.

 

아, 주인공의 러브 라인이 어떻게 결말지어지는지도 흥미롭습니다. 약간의 반전, 기대해도 좋습니다.

 

나는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페달 회전이 쌓이고 거듭되어 100킬로, 1000킬로로 이어졌을 뿐이다. 음식물이 연료가 되어 몸을 움직인다. 그 단순한 공식은 달려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해가 떠오는 것이 너무 느려 ‘오늘’이라는 쐐기를 언제 박아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아침부터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반대로 움직인다니, 매우 자극적이었다.

“괜찮아아아~? 어? 괜찮아!”

 

※ 아, 눈에 거슬렸던 표현들, 먼저 동해를 ‘일본해’로 쓴 것. 그것은 작가가 일본인이니 이해한다고 쳐도, 북한을 이용해 이상한 비유를 한 것은 좀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북한 병사들은 총을 맞아도 달린다고.”와 같은 말. 정말, 그렇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대 후 복학한 뒤, 나는 여기 저기 휑하게 빈틈을 드러내는 학점을 보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입대 전 밴드 생활과 학점과는 별 인연이 없는 독서로 인해 학점을 따야 할 그 시간들을 탕진해버린 것이었다.

 

때문에, 복학 후 수강해야 할 과목은 1, 2학년에 이미 마쳤어야 할 필수과목들이 여럿 있었고, 할 수 없이 빽빽한 시간표를 짜야만 했던 것이다. 제대 후 나름 철이 들었다는 생각도 나의 빈틈없는 시간표 작성에 일익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모하게 도전한 과목이 하나 있었으니, 이는 필수과목도 아니요, 전공과목도 아닌 엉뚱한 ‘소설창작론’이었다. 국문과의 수업이었고,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주섬주섬 책들을 챙겨 나와 강의실에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수업의 교재는 따로 필요치 않았다. 돌아가며 학기 말까지 단편 소설을 하나씩 지어내어 이를 수업을 듣는 학우들에게 돌리고, 본인은 간단한 요약이랄까, 아니면 소설을 쓰게 된 동기 따위를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교수님은 점잖게 내용을 듣고 계시다가, 이따금씩 한 마디를 툭 던져 놓곤 하시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말 한마디를 받는 것은 쉽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자면 나의 도전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왜 소설창작론이란 전혀 엉뚱한 수업을 듣길 희망했는가 생각해보면 그 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김승옥이었고, 〈무진기행〉이었음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염치없고, 주제를 모르는 생각이었음은 물론이다. 다른 이도 아닌 김승옥을, 다른 소설도 아닌 〈무진기행〉을 읽은 후에 ‘아, 나도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말이다. 마치 이소룡의 발차기나 기기묘묘한 기합소리를 듣고 ‘아, 나도 쿵푸를 배우면 저렇게 될 수 있겠지’하고 생각한 것과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하지만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다고 기억된다. 다른 학우들의 기상천외한 소설들 - 물론 몇몇은 도대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 포르노 소설이거나, 염세를 넘어 거의 자살을 종용하는 것들이어서 나를 주눅 들게 혹은 감탄하게 했지만 -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 역시 소설을 한 편 장만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고, ‘차근차근’ ‘미리 미리’라는 단어와 당최 친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심히 낭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모험적으로 선택한 과목에서 좋지 않은 학점이 나온다면, 나의 전체적인 학점 평균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이런 모험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두움마저 깃들어가는 것이었다. ‘고민이닷, 고민이야~’하며 담배를 뻐끔거리고, 소주잔을 들어 올려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날이 이어졌다.

 

결국 애꿎은 원고지를 무수히 잡아먹고 난 다음에야, 함께 자취하는 녀석의 숙면을 수차례 방해하고 난 다음에야 꾸물꾸물 소설 한 편을 내놓을 수 있었다. 제목도 거창했으니, 〈그 작자와의 하루〉였던 것이다. 내용도, 주인공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아 나에게도 아직 수치심이란 남아있단 말이냐. 차마 입으로, 글로 이를 표현할 수는 없도다.

 

나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감정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학우들의 반응과 교수님이 던지실 한 마디를 기다리며…. 아, 첨가하자면 난 그 수업의 유일한 타과생이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넌지시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가 있구먼….”

 

아, 천당에서 천사가 속삭인다면, 바로 이런 말일 것이다. 이어서 학우들도 재미있다는 듯 소설을 읽어 넘기고 있었다. 키득키득 웃어넘기는 학우들이 그렇게 어여삐 보일 수가. 그렇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즐거워야 하나니.

 

지금 생각해봐도 그 소설은 허점투성이였고, 참 허무맹랑했다. 내용도 어쩐지 심상치 않은 냉소와 비관, 그러다 결국은 급격한 긍정으로 흘러버리는 것이 영 형편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소설을 한 편 지어냈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었으니, 내 소설은 온전히 김승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문체, 그의 냉소, 그의 유머와 위트. 난 모든 것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소설이 아닌 김승옥의 소설을 지어낸 것이다.

 

그렇게 난 내 대학생활의 큰 부분을 그에게 의지했고, 그에게 감탄했으며, 그에게 절망하며 보냈다. ‘1960년대 작가’에게 지배당한 2000년대 청년. 세월은 때론 아주 부질없는 것이었다. 난 비로소 김승옥을 통해 소설을 읽었고,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이자, 절망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어디론지 구멍이란 것이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던 시절, 햇빛의 눈부심보다는 막걸리집 노오란 전등빛이 오히려 안심되던 시절.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연신 “요오것 봐라, 요오것들 봐라”를 따라하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넘긴 지금 다시 그의 소설을 꺼내든다. 다시 무진으로 떠난다. 그 충격적이었던 문장들, 그 스산한 안개와 같은 문체, 하찮은 인간을 더욱 하찮게 만들던 냉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시대가 바뀌어도, 아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굳이 믿어버리는 지금도, 역시 김승옥은 우뚝하다. 아직도 그의 냉소는 유효하다.

 

다시금 원고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다는 헛된 바람. 그동안 어줍지 않게 살아온 가당찮은 시간들이 허망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이야기하나 없겠소! 하는 배짱일까. 아니면 여전히 헛헛하고 여전히 마땅히 들어갈 구멍을 찾지 못했음일까.

 

소설가를 꿈꾸는, 이야기꾼을 꿈꾸는 이들에게 언제나 환희와 좌절을 주었던 작가 김승옥. 그의 글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지만, 결코 21세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21세기가 그의 글들을 두려워해야 할지니….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마침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고 서 있었다.

 

- 서울 1964년 겨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을 하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비교해 놓은 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제기구나 정부 통계를 인용한 것이니 거짓은 없어 보였습니다. 뭐 물론 현 정부는 통계를 조작하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 더 나아 보이려 애를 쓰겠지만 말입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본다면 우선 1인당 국민총소득이 2007년 21,659달러였던 것이 2009년 17,175달러로 줄었더군요.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민생을 다 말아먹었다고 하던 게 누구였던가요. 혹시 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아니었나요?

 

국가채무 역시 2007년 3.6조 원 감소를 보였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지금까지 51조 원이 늘었습니다. ‘조’라는 단위가 상상이 가십니까. 실업률은 2007년 12월 3.1%에서 2010년 1월 5.0%가 되었고요. 책을 통해 씁쓸하게 느꼈던 청년실업은 2007년 7.5%에서 2010년 10%로 두 자리를 채웠네요. 축하드립니다.

 

아, 제 직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인데, 언론자유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발표한 것인데요. 노무현 정부 때는 31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예상되시죠? 69위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축하드립니다. 언론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 아니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아니 되겠지요.

 

그런데, 경제엔 전문가라는 분들이 왜 IT지수까지 이 모양일까요? 노 정부 때는 3위까지 올라간 순위가 지금은 16위네요. 위대하신 삼성과 엘지에게 책임을 떠넘기실 생각인지요. 뭐 암튼 씁쓸하네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형편없는 정부를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왜 하라는 서평은 하지 않고 이렇게 ‘노빠’스러운 글을 연타로 날리는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뭐, 제가 살짝 노빠라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지금도 블로그에는 김대중 대통령님과 함께 노짱의 추모 배너가 올라 있죠. 사이트가 자체적으로 내리지 않는 이상 제 의지로 내릴 생각은 영원히 없습니다. ‘노빠’라고 하시면 ‘노빠’ 맞습니다.

 

다시 한 번, 왜 제가 이런 이야기들로 글을 여느냐면,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은 후, 또 읽는 동안 가슴이 아릿아릿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수업을 제쳐가며, 식음을 전폐하며 사랑해야 할 나이의 젊음들이, 사랑마저 거부하고 움찔해야 하는 현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인식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조차 적응하지 못하는 청춘들을 만날 때의 무참함.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작가는 어린 나이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들의 젊음이 유폐되고 은폐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물론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들이 우울함을 반감시켜주고,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주지만, 결국 주인공들의 삶은 억지로 떠밀린 것을 자기 식으로 적응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비현실적 낙관주의, 혹은 염세주의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일탈’보다는 나아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네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서글픕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방황과 고통, 무감각과 회피 등이 모두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잘 났다고, 자타가 공인해주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고.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말입니까. 그 한 명이 그만 죽어버린다면, 1만 명의 사람들도 죽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 잘난 한 명을 위해 1만 명의 요구, 자유, 권리는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가요.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G20이란 별 쓰잘머리 없는 행사를 위해 전 국민들이 무시되었지요.

 

책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더 넓은 이야기,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가 안기는 너무 많은 괴로움 중 젊은이들을 압박하는 ‘먹고 사는’문제에 대한 혐오감이 일었습니다. 스멀스멀 기분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작품을 읽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작가 역시 깊이 없고, 사랑마저 잠식한 불안 앞에 마냥 움츠린 젊음만을 표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일어서는, 시대에 맞게 ‘진화해 나가는’청춘을 그리고 싶었을 테지요. 그렇게 저도 읽었습니다.

 

하지만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까요. 전 그들에게 마냥 ‘너흰 할 수 있어, 힘을 내’라는 응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100% 진화가 끝났다 해도, 여전히 사회는 그들을 단순 소모품으로 인식할 테니까요.

 

앞서 나열한 통계자료들이 결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고, 또 그 후과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한 정권을 온갖 방식으로 음해하고 비난하고 깔아뭉개며, 집권한 정권이 오히려 그보다 더 못한 짓거리로 국민들을 착취하는 꼴이 역겨울 따름입니다. 3년 째 예산안 날치기라는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추태를 부리고도, 북에 대한 안보정국으로 이를 슬며시 넘어가려는 후안무치한 정권. 이런 정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팔자 좋게 응원만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하고, 많이 부끄럽게 한 소설이었습니다. 읽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반성과 후회 역시 아주 쏠쏠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이쿠, 이런! 왜 이제야 완득이를 만났을까. 이렇게 쿨하고, 순수하고, 또 착하디착한 아이를. 그리고 왜 이제야 똥주를 만났을까. 이렇게 바람직하고 멋들어진 선생을 말이다. 후회막급이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만났으니, 너무 좋다.

 

그동안 완득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녀석이고, 또 정말 괜찮은 소설이라는.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 똥주와 완득이의 설전이 그대로 화면에 그려지는.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읽혀나가는 소설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완득이는 그야말로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완득이〉가 성장소설로만 읽힐 수는 없다.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가야할 문제들.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견, 지긋지긋한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 등 결코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을 너무나 유쾌하게 풀어낸다. 자칫 심각하다 끝나버릴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것. 그리고 결코 만만치 않은 감동까지 덤으로 준다는 것은 분명 미덕이다.

 

얼마 전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며 호들갑을 떨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 또 잘 생기거나 예쁘다는 이유로 갑자기 ‘떠버린’선수들의 이야기들이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짜증났던 것은 그 이후에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다. 아니 반응이나 있었나? 스포츠 뉴스에서 어떤 종목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는 단신이 잠시 나온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것도 선수의 이름은 소개되지도 않았다. 이 무슨 엿 같은 경우인가. 관심이 없으면 나올 필요도 없단 말인가.

 

이주 노동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개봉해서 쫄딱 망해버린 영화 〈방가 방가〉는 나름 진지하면서도 코믹하게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었다. 하지만 보시라. 역시나 영화는 외면당했다. 그렇다면 감독은 다시금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을까. 화끈하게 벗거나, 유명한 배우들 동원해서 본전치기는 될 만한 영화나 만들지 않을까. 그저 그런 영화들 말이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직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그냥 이곳에 와서 함께 살아가면 그들이 이웃이고, 그들이 ‘우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곳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마저 ‘우리’취급을 하지 않는다. 연말이나 뭐 그딴 시기가 오면 연탄이나 돈 몇 푼 쥐어주고, 그 앞에서 개폼 잡으며 사진 찍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엿이나 드시지.

 

그러니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폭력은 말 할 것도 없다. 만약 그대가 길을 가다 험상궂게 생긴 동남아 노동자를 만났다고 치자. 전혀 쫄지 마시라. 만약 그가 당신에게 시비를 걸거나 어떤 폭력을 휘두르려 한다면, 그야말로 그는 ‘생명’걸고 그 행동을 해야 한다. 왜냐고? 무조건 그는 추방될 테니까.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폭력 행사를 해도, 심지어 죽임을 당할 상황에 처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공권력’은 한국에 없다.

 

이런 유쾌하지 않은,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슈들을 〈완득이〉는 전혀 심각하지 않게 풀어낸다. 물론 책을 읽은 후의 당신은 그 전의 찌질이가 아니다. 어느 새 지나가는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게 보이고, 단지 ‘난쟁이’라고 장애인을 무시하는 인간들을 보면 짜증이 솟구칠 것이다. 저걸 확 밟아? 참으시라. 때려서 될 놈들은 애초에 그런 찌질이 짓거리를 안 한다.

 

너무 즐겁게 책을 읽었다. 내 인생의 ‘똥주’는 누구였을까 생각해본다. 다행히 난 중학교 때 똥주‘과’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자주 연락은 못 드려도, 근황을 알 수 없어도, 다만 그 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커다란 위안이 되는. 내게 이웃을, 사회를, 국가를 말없이, 유치찬란한 퍼포먼스 없이 보여주신 분. 그렇다. 내게도 ‘똥주’는 있었다. 물론 똥주처럼 ‘새끼야!’를 입에 달고 계신 분은 아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입에 담기조차 더러운 세상에서 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기 위해 일하고 있다. 항상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내 찌질이 같은 노력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정말 사람 사는 사회가 되는 데 코딱지만큼의 도움을 준다면, 난 아싸! 성공한 것이다.

 

정말 많은 이들이 완득이와 만났음 한다. 이 유쾌하고 멋진 녀석을 만나면 당신의 삶도 어쩌면 보다 유쾌해 질지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우리 주변에, 내 이웃에 완득이가 살고 있는지 예의 주시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러다 만약 만난다면, “야~! 밥 한 끼 먹자! 혹시 소주는 잘 하냐?” 물어볼 테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완득이, 완득이 어머님, 아버님, ‘난닝구’ 삼촌, 똥주, 윤하에게 고백한다.

 

사랑해~! 어우 쪽팔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