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을 하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비교해 놓은 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국제기구나 정부 통계를 인용한 것이니 거짓은 없어 보였습니다. 뭐 물론 현 정부는 통계를 조작하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 더 나아 보이려 애를 쓰겠지만 말입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본다면 우선 1인당 국민총소득이 2007년 21,659달러였던 것이 2009년 17,175달러로 줄었더군요.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민생을 다 말아먹었다고 하던 게 누구였던가요. 혹시 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아니었나요?

 

국가채무 역시 2007년 3.6조 원 감소를 보였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지금까지 51조 원이 늘었습니다. ‘조’라는 단위가 상상이 가십니까. 실업률은 2007년 12월 3.1%에서 2010년 1월 5.0%가 되었고요. 책을 통해 씁쓸하게 느꼈던 청년실업은 2007년 7.5%에서 2010년 10%로 두 자리를 채웠네요. 축하드립니다.

 

아, 제 직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인데, 언론자유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발표한 것인데요. 노무현 정부 때는 31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예상되시죠? 69위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축하드립니다. 언론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 아니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아니 되겠지요.

 

그런데, 경제엔 전문가라는 분들이 왜 IT지수까지 이 모양일까요? 노 정부 때는 3위까지 올라간 순위가 지금은 16위네요. 위대하신 삼성과 엘지에게 책임을 떠넘기실 생각인지요. 뭐 암튼 씁쓸하네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형편없는 정부를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왜 하라는 서평은 하지 않고 이렇게 ‘노빠’스러운 글을 연타로 날리는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뭐, 제가 살짝 노빠라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지금도 블로그에는 김대중 대통령님과 함께 노짱의 추모 배너가 올라 있죠. 사이트가 자체적으로 내리지 않는 이상 제 의지로 내릴 생각은 영원히 없습니다. ‘노빠’라고 하시면 ‘노빠’ 맞습니다.

 

다시 한 번, 왜 제가 이런 이야기들로 글을 여느냐면,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은 후, 또 읽는 동안 가슴이 아릿아릿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수업을 제쳐가며, 식음을 전폐하며 사랑해야 할 나이의 젊음들이, 사랑마저 거부하고 움찔해야 하는 현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인식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조차 적응하지 못하는 청춘들을 만날 때의 무참함.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작가는 어린 나이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들의 젊음이 유폐되고 은폐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물론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들이 우울함을 반감시켜주고,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주지만, 결국 주인공들의 삶은 억지로 떠밀린 것을 자기 식으로 적응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비현실적 낙관주의, 혹은 염세주의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일탈’보다는 나아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네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서글픕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방황과 고통, 무감각과 회피 등이 모두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잘 났다고, 자타가 공인해주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고.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말입니까. 그 한 명이 그만 죽어버린다면, 1만 명의 사람들도 죽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 잘난 한 명을 위해 1만 명의 요구, 자유, 권리는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가요.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G20이란 별 쓰잘머리 없는 행사를 위해 전 국민들이 무시되었지요.

 

책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더 넓은 이야기,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가 안기는 너무 많은 괴로움 중 젊은이들을 압박하는 ‘먹고 사는’문제에 대한 혐오감이 일었습니다. 스멀스멀 기분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작품을 읽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작가 역시 깊이 없고, 사랑마저 잠식한 불안 앞에 마냥 움츠린 젊음만을 표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일어서는, 시대에 맞게 ‘진화해 나가는’청춘을 그리고 싶었을 테지요. 그렇게 저도 읽었습니다.

 

하지만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까요. 전 그들에게 마냥 ‘너흰 할 수 있어, 힘을 내’라는 응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100% 진화가 끝났다 해도, 여전히 사회는 그들을 단순 소모품으로 인식할 테니까요.

 

앞서 나열한 통계자료들이 결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고, 또 그 후과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한 정권을 온갖 방식으로 음해하고 비난하고 깔아뭉개며, 집권한 정권이 오히려 그보다 더 못한 짓거리로 국민들을 착취하는 꼴이 역겨울 따름입니다. 3년 째 예산안 날치기라는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추태를 부리고도, 북에 대한 안보정국으로 이를 슬며시 넘어가려는 후안무치한 정권. 이런 정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팔자 좋게 응원만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하고, 많이 부끄럽게 한 소설이었습니다. 읽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반성과 후회 역시 아주 쏠쏠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