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몰락
서보명 지음 / 동연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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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음의 문장에서 틀린 말이 있다고 생각하면 거수!

 

“대학이 현실, 그것도 체제를 섬기는 하부조직으로 전락했을 때, 대학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대학이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주장하는 자율을 밥그릇 싸움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이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을 대학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무엇보다 앞세우는 대학이 현재 가능할 것인가? 그런 가능성이 없을 때, 대학은 어디에서 존재해야 하는가?”

 

난 윗글 어디에서도 ‘태클’을 걸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대학이라는 이름 자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기업의 인력양성소 혹은 지사 정도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대학.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대학은 이제 대한민국 어디에도, 아니 이 지구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카고 신학교 교수인 저자는 한국인 1.5세대로 자신이 바라본 한국 대학의 현실에 충격을 받고, 과연 이 시대 대학은 어떠한 존재인지, 또 대학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책은 그 고민의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카이스트, 서울대학교 등 이른바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명문’에서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개개인의 사정이야 각자 다를 수 있다지만, 카이스트의 성적별 차등 등록금제, 전 수업 영어강의 등 경쟁의 정점에 오른 제도들이 학생들에게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했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대학은 해마다 등록금을 인상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물가 인상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라고 하지만, 곰곰이 따지고 들자면 물가 인상폭보다 항상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상된 등록금이 학생들에게 어떠한 혜택으로 돌아가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고통 받는 대학생들에 대해 무관심한 건 당연하다.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등록금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지만, 대학은 거기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한 사죄나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말만 대학일 뿐 강도나 다름없다. 결국 돈이 없으면 학교에 다니지 말라는 것이 그들 주장이다. 혹은 죽어라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으라는 개소리도 함께.

 

한국의 대학은 ‘한국적’이상과 가치를 채 발견하기도 전에 서구로부터 수입되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에 의해 수입되었지만, 일본이 서구에서 도입된 대학 체제를 가져온 것이니 같은 맥락이다.

 

전통의 대학은 저자의 말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를 섬겼다. 섬김의 대상이 없는 교육은 없었다. 기독교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탈종교라는 상징의 울타리 속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현대의 대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라는, 종교와 시장이라는 신이 서구 사회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대신하고 있다. 현대의 대학이 바로 그 시장의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전통의 대학이 기독교 신학에 의해 통제되고 학문적 당위성을 부여받았다면, 현대의 대학에선 비즈니스 신학이 그에 상응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신은 시장이고 그 시장의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 비즈니스 신학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은 결국 경쟁과 순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당최 그 기준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순위’를 위해 학교를 으리으리하게 확장하고, 기부금, 후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미국 등 신자유주의의 정점에 선 국가의 대학들과 한국 대학의 차이점은 다만 소비자로 전락해버린 학생들에 대한 자세다. 미국은 학생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학교 시스템을 바꾸고 교수들에게 압력을 가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여전히 학생들을 다만 조용히 돈만 내고 다녔으면 좋을 소비자로 간주한다.

 

자, 다시 묻는다.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진리의 상아탑이란 말을 헛소리로 치부한 대기업 회장은 자랑스럽게, 한국의 대학은 기업의 입맛에 맞는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건물들이 학교를 점령하기 시작하고, 스타벅스 등 다국적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런 곳에서 토론과 비판, 자유로운 철학이 가능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자, 이제 지금의 대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정답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이 이미 그 역할의 의미를 상실하고, 더 이상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대학의 밖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묻는다.

 

모르겠다. 과연 이 시대의 대학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지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대학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전체 사회의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모습을 곰곰이 살펴야 할 것이다.

 

대학생들이 고통에 겨워 스스로 죽어나가고, 대학은 여전히 건물 올리기와 산학협동을 강조하며 기업의 입맛에 맞는 ‘사원’ 만들기에 주력한다면, 단언컨대 더 이상 대학은 필요치 않다. 진정한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지,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한 번쯤 고민이 필요하다.

 

대학생, 대학생을 둔 부모, 신학자 그리고 대학 관계자 모두가 일독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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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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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언제나 세상의 모든 불의에 맞서

그대가 분노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다!

 

오랜만에 동지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볼리비아의 뜨거운 밀림 속에서 마치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마친 후, 무려 10년이나 지난 뒤 태어난 저이지만 굳이 동지라고 부르렵니다.

 

사르트르는 동지를 일컬어 “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보냈지요. 여전히 동지는 쿠바의 영원한 형제이자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997년엔 동지의 유해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이송해 동지가 혁명의 그날 점령했던 산타클라라에 안장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죠?

 

한편 동지가 그토록 증오했던 제국주의의 원흉 미국에서도 동지의 인기는 놀랍도록 높습니다. 동지의 얼굴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동지의 치열했던 삶을 경배합니다. 물론 동지는 혁명마저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의 저열함에 치를 떠시겠지요. 저도 동감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동지의 티셔츠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동지가 1960년 겨울 방문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반세기가 넘도록 반목하고 있는 부끄러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시 동지가 김일성 광장에서 어린 여학생들과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사진을 인상 깊게 본 기억이 납니다.

 

동지, 동지가 떠난 뒤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세상은 온갖 불의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약자들을 억누르고 세상의 권력을 독차지한 이들은 여전히 자기의 배를 불리기에만 정신없습니다. 더러운 자본의 노예들은 여전히 썩은 정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혁명은 여전히 미래입니다.

 

때문에 더욱 동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력과 명예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또 다시 혁명을 위해 죽음의 정글로 뛰어 들어간 당신을…. 애써 동지를 폄하하려는 세상 모든 자본주의의 ‘개’들마저, 동지의 불굴의 투지와 헌신을 모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지, 동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제대 후 복학한 저는 왠지 이대로 졸업을 해버리면 너무나 허무할 것만 같았습니다. 때문에 제가 끄적거려왔던 잡문들을 모아 저만의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40부였던가요. 없는 돈을 탈탈 털어 만든 문집을 벗들과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혼자 뿌듯해 했었죠.

 

그 문집의 표지가 바로 동지였습니다. 그리고 표지 아래엔 동지가 했던 말을 담았죠. “Hasta La Victoria Siempre!”그렇습니다. “승리의 그날까지 영원히!”였습니다. 조잡하게 인쇄된 동지의 얼굴은 그러나 우뚝했습니다.

 

벌써 10년 전의 기억입니다. 전 그때 동지의 얼굴을 보며 무엇을 다짐했던 것일까요. 어떤 삶을 고민했던가요. 그리고 어떤 희생과 죽음을 각오했던가요. 볼리비아의 뜨거운 밀림은 아니더라도, 분단의 치욕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더욱 더 뜨거운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했던가요. 그것이 아니라면, 철저히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 땅의 모든 민중을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던가요.

 

그리고 지금의 전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요. 전 얼마나 패배했고, 얼마나 더러워졌으며, 얼마나 비겁자가 되었을까요. 이따금 동지에 대한 글이나 책이 나올 때마다, 동지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동지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전 왜 한없는 부끄러움과 외면을 반복해 왔을까요.

 

그렇습니다. 10년 전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동지는 제 삶과 행동을 규정하는 하나의 지침이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삶을, 치열한 열정을 따를 능력도 열정도 부족한 저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언제나 “만약 이 순간에 동지였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생각하곤 합니다.

 

네, 전 10년 전의 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10년 전의 저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분노를 가슴에 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저열함과 치열함의 숭고한 차이를 알고 있으며, 여전히 혁명을 꿈꿉니다. 모든 이들이 형제가 되어 총을 내려놓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세상. 불가능한 꿈을 꾸는 리얼리스트가 되고자 합니다.

 

당신의 삶을 간결하게, 그리고 동지가 살았던 그 시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을 알기 쉽게 소개한 이 책은 잠시나마 당신을 모른 척 했던 저에게 일격을 가했습니다. 삶이란 고개를 돌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분노는 허튼 웃음이나 회의로 감출 수 없음을 다시 느낍니다.

 

동지, 여전히 저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세상은 한없이 어둡지만, 그 속에서 뜨거운 횃불을 밝힐 수 있도록, 그 불쏘시개라도 될 수 있기를 기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가운 땅 위에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해 주세요.

 

서른 아홉이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동지. 아직 동지보다 많은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대가 살았던 그 치열함만큼 뜨겁게 세상과 맞붙어 보겠습니다. 약자를 억누르는 저 짐승 같은 권력, 그리고 그 권력 아래에서 일신의 안위만을 지키며 같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에게 굴복 당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동지.

 

태양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뜨거운 가슴을 찾아 헤맬 줄 알아야 한다.

그 길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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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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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콩고의 밀림지대에서 새로 발견된 영장류 보노보. 침팬지와 구별되는 이 동물은 기존 침팬지가 가지고 있는 습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내 주목을 받았다. 암컷끼리의 연대가 매우 강하고, 수컷이 암컷을 지배하지 못하며, 엄격한 수직사회가 아닌 평등한 문화를 유지하는 점 등이다.

 

또 보노보는 무리 내에서 병자나 약자를 소외시키거나 구박하지 않고 그들을 보살피고 끌어안는다고 한다. 아울러 성은 일방적 지배나 욕망해소의 수단이 아닌 상호적 기쁨과 유대를 위한 놀이가 된다고 하니, 인간보다 훨씬 낫다.

 

한 보노보 무리가 다른 무리와 충돌할 때에도 서로 전쟁을 벌이는 대신 애정표현이나 섹스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고 평화를 유지한다! 와우, 이쯤 되면 인간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집단이 아닌가.

 

저자가 보노보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정글과 같은 치열한 생존 투쟁의 장이 된 사회에서 공격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침팬지의 습성보다는 평화를 사랑하고 공존을 소중히 여기는 보노보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정글자본주의 시대에서 침팬지가 아닌 보노보가 되어 살 수 있는 방법. 타인을 꺾고 눌러야만 살 수 있는 ‘미친 경쟁의 장’이 아닌 서로 돕고 지켜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생의 장’을 만드는 길. 그 길에 나서야 할 진보의 방향 찾기. 저자는 바로 그 길을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다양한 우리의 문제들을 아우르고 있다. 보수과잉에서 보수폭발의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 진보가 진정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진보의 진보’를 위해 고민한다. 또한 정부가 마구 휘둘러대는 형벌권의 ‘과잉’에 대해 비판하고, 사형제도 폐지, 간통제 폐지, 행형 현실에 대한 비판까지, 저자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법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우리 안의 또 다른 타인으로 취급받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애정도 드러낸다.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인종차별주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탄압, 장애인 문제, 아동과 청소년 인권 문제, 여성 폭력과 한센병·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문제까지 반드시 고쳐야 할 우리 안의 ‘고정관념’을 깨버리길 요구한다.

 

순간순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대중들의 뛰어남을 볼 때마다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처 느끼지 못한 척 하면서도, 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대중. 국민을 멋지게 속였다고 생각하는 우둔한 정권에 대한 최후의 복수.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결국 드러나고야 마는 권력의 추악함, 부패, 폭력, 위선.

 

국민들은 결국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어떤 것이 불의이고, 어떤 것이 정의인지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해서, 국민들이 바보란 소리는 아니다.

 

현 정권의 온갖 유치찬란한 모습을 보면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정말 한심한 정권과 그것을 보고 비웃는 국민들. G20 세대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유행어를 퍼뜨리려 삽질을 하고,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알면서 거리거리에는 ‘식당 아주머니들, 직장인들, 택시 운전기사분들 (등등등) 당신이 서울을 빛낸 영웅입니다’이딴 장난질이나 친다. 그런 것 만들 돈으로 차상위 계층이라는 괴상망측한 이름으로 호명하는 이웃들이나 더 도와라. 찌질이들아.



영남권 신공항 공약을 백지화 해버리고, 이에 격분하는 국민들에게 “그럼 왜 대운하 공약은 지키라고 안 하느냐”며 오히려 삐친 척한다. 미친 것 아닌가? 지금까지 공약이라고 내걸고 지키지 않은 것이 신공항 하나뿐일까? 국민들이 다 기억 못할 것 같나? 반값 등록금, 부동산, 남북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빌어먹을 7·4·7 공약은 어디에 갔나.

 

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국민을 봉으로 알고 우려먹으려 하고, 정치적·자기 보신적 이해타산에 빠진 정치가·교수 나부랭이들·전문가입네 하는 사기꾼, 협잡꾼들은 ‘국민 바보 만들기’에 열심이다. 동시에 정부에 온갖 굴종적인 모습은 다 보이면서 말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정부 찬양 도서, 박정희 찬양도서, 박근혜 찬양 도서들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개인에 대한 지옥의 저주가 가득한 책들도 꾸준히 나온다. 소중한 종이를 그딴 미친 짓에 사용한다. 고은 시인의 말처럼 “구역질도 아까운” 인간들이다.

 

지칠대로 지친 국민들에게 진보는 희망을 줘야 한다. 그리고 막연함이 아닌 실질적이고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플랜을 보여줘야 한다. 반MB만 열심히 외친다고 국민들이 야당을 지지하진 않는다.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오지 않는다.

 

민주당 스스로 자신들도 한나라당과 별 차이 없는 엘리트주의, 귀족주의에 빠진 보수당 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을 인정해야 미래를 위한 변혁이 시작될 수 있다. 짐짓 진정한 진보입네 하며, 떠들어대도 100% 패배한다. 보수꼴통 짓은 아무래도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가며 더 이상 추억 장사를 해서도 안 된다. 그만 좀 써먹고 자체 개발을 해야 한다. 정책다운 정책 좀 내보여야 한다. 보궐선거에서 이렇게 눈치 싸움하고 놀고 있는데, 정작 총선, 대선이 오면 어쩔 셈인가.

 

저자의 책은 진보 진영이 풀어가야 할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다. 그리고 어떠한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게 해준다. 그 고민이 깊고 넓을수록 해법 또한 신중히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 또 흥분했더니, 배고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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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그리고 우리들의 대한민국 - 서구 이론을 넘어 우리 역사에 근거한 민족 이야기
민경우 지음 / 시대의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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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민족’이란 주제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정의내리는 이들이 있고, 또한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와 혼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각보다 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울러 민족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지켜나가야 할 보수집단들이 오히려 민족이란 이름 아래 무수히 많은 부정과 불의를 저질러온 우리 역사도 ‘민족’이란 이름을 거부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며, ‘철지난 유행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통일이라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간결한 문장으로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어 왔는지, 또한 시대별 민족주의는 어떤 모습을 띠어왔는지 소개합니다. 아울러 냉전 종식 이후 광범위하게 주장된 탈민족적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책 말미에 ‘진보적 대안과 민족주의’‘보수적 대안과 민족 문제’는 흥미로울뿐더러,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해방 이후 오직 미국만이 유일한 ‘신앙’이었던 우리가, 중국의 부상을 비롯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민족이란 명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찬찬히 생각하게 만듭니다.

 

애국심, 공공의식, 집단주의, 획일성 등 자칫 민족주의와 연동해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또한 민족주의 그 자체도 아닙니다. 순수한 한민족의 혈통을 따지며, 타 민족이나 혼혈인 등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순혈주의 역시 민족주의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일본에서 수입되어 온 사상과 철학으로 우리 민족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유학이 계급 상승의 일정 코스로 여겨지는 지금, 민족을 외부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찾자는 주장은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수많은 학자, 정치인들의 다양한 민족주의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긍정적인 모습은 적극 평가하고, 위험한 발상들은 경계합니다. 단순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 그 객관적 이유를 제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합니다.

 

과거 독재정권은 ‘민족’을 무기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탄압과 착취를 합리화시켰습니다. 민족이란 이름아래 ‘개인’은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많은 이들이 민족을 거부하고 민족주의를 국수주의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족은 독재정권의 소유물일 수도, 한낱 수사로 치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그리고 우리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동포들이 해외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그들과 우리를 연결해줄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가 존재하는 한, 민족은 쉽사리 부정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란 이름으로 세계를 포용하고,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개정권의 선전 수단이 아닌 우리 모든 구성원의 ‘공통 분모’로 민족은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행여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다문화 가정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형태의 구성원들 역시 분명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온전한 ‘한민족’인가를 생각할 땐 여러 가지 다양한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민족주의’로 호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어와 정서와 혈통에 있어 공통 요소가 있다는 것이 민족 구성원의 요건이 될 터이지만, 그렇다고 혈통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그것만으로 구성원을 분리시키는 발상은 그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사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바 있습니다.

 

민족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정의한 이들에 저자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만약 민족이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과연 우리 모두는 언제 누구와 계약을 했다는 것일까요? 제 자신이 한민족이 되겠다고 서명이라도 했나요.

 

처참한 학살과 전쟁을 불러온 민족 우월주의와 민족주의는 엄연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세계의 다양한 민족문화를 달러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로 획일화하려는 무참한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과 가치는 더더욱 지켜지고 계승되어야 할 것입니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에세이 형식의 책은 많은 부분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도 가능합니다. 여러 학자들의 담론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더 높은 것은 아마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차원일 것입니다. 해외 800만 동포들을 이어주는 것도 민족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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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상용 지음 / 홍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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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여타 속 좁은 혹은 무지한 부류에 속하기에 평론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일 텐데 말이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에 대한 평론은 일단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때문에 제가 보기에 “아무나”가 평론이나 뭐 비판 등등을 해대면 일정하게 무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으악, 지금 생각하면 참 땀이 날 정도로 부끄럽고 주제넘은 생각이었죠. 평론을 ‘특권화’한다는 것은, 역으로 대중을 ‘한심한 바보’따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이 다분하니까요. 물론 그렇지만, 일정한 ‘공부’를 한 이들의 평론을 즐기는 기쁨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켜줍니다. 일단 자신이 실재 겪을 수 있는 이야기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경험할 수 없는 환상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영화가 가진 최대의 매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못가는 곳이 없고, 못할 것이 없죠.

 

그 과정에서 때론 일상의 짐을 잠시 잊고, 때론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을 키우게 됩니다. 좌절하고, 쓰러지고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떤 여정을 통과하는 지 어렴풋이 느끼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야기합니다. 거짓말, 웃음, 환상, 시간, 역사, 사이버, 관계, 세상의 어머니, 영웅 등을 주제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고, 평가하고, 예찬합니다. 일단 광범위한 그의 지식과 날카로움이 돋보입니다. 저 같은 평범한 이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영화의 속살을 친절히 소개합니다.

 

책을 통해 이미 보았던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미처 챙겨보지 못한 영화들은 ‘꼭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첩에 꾹꾹 눌러 담은 영화 제목과 감독의 이름들이 보입니다. 특히나 히치콕 감독의 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은 반드시 다시 살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엄청난 제작비와 화려한 캐스팅으로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의 파괴력 앞에서 자국의 영화가 그나마 선전을 거두고 있는 국가는 인도, 일본, 이란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고, 역으로 영화가 신자유주의에 구속되어있는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영화는 더욱 소중합니다.

 

전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진보’가 되자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제 주위를 감싸 안았던 미국이라는 국가의 다양한 영향력이 무의식중 제 의식과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영화보다는 미국 영화가 훨씬 덜 부담스럽다는 사실 자체가, 제가 얼마나 미국의 문화에 적응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습성을 하지만, 억지로 털어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감추고 있는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또는 프로파간다를 간파하려 진땀을 빼며 보느냐는 물론 다르겠지만, 전 그 두 가지를 영원히 병행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 둘을 나눈다는 것은 별 의미도, 재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 시대를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좌절을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은 구석도 하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반성, 그리고 현재에 대한 처절한 드러내기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 영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정당한 관음증 환자임을 자부할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별로 없습니다. 엿보기가 재미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우리는 그 엿보기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난해하지 않고, 즐겁게 영화 속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습니다. 저자의 바람대로 더 자주 글을 통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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