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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그리고 우리들의 대한민국 - 서구 이론을 넘어 우리 역사에 근거한 민족 이야기
민경우 지음 / 시대의창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민족’이란 주제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정의내리는 이들이 있고, 또한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와 혼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각보다 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울러 민족을 수호하고 정통성을 지켜나가야 할 보수집단들이 오히려 민족이란 이름 아래 무수히 많은 부정과 불의를 저질러온 우리 역사도 ‘민족’이란 이름을 거부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며, ‘철지난 유행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통일이라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간결한 문장으로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어 왔는지, 또한 시대별 민족주의는 어떤 모습을 띠어왔는지 소개합니다. 아울러 냉전 종식 이후 광범위하게 주장된 탈민족적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책 말미에 ‘진보적 대안과 민족주의’‘보수적 대안과 민족 문제’는 흥미로울뿐더러,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해방 이후 오직 미국만이 유일한 ‘신앙’이었던 우리가, 중국의 부상을 비롯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민족이란 명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찬찬히 생각하게 만듭니다.
애국심, 공공의식, 집단주의, 획일성 등 자칫 민족주의와 연동해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또한 민족주의 그 자체도 아닙니다. 순수한 한민족의 혈통을 따지며, 타 민족이나 혼혈인 등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순혈주의 역시 민족주의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일본에서 수입되어 온 사상과 철학으로 우리 민족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유학이 계급 상승의 일정 코스로 여겨지는 지금, 민족을 외부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찾자는 주장은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수많은 학자, 정치인들의 다양한 민족주의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평가합니다. 긍정적인 모습은 적극 평가하고, 위험한 발상들은 경계합니다. 단순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 그 객관적 이유를 제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합니다.
과거 독재정권은 ‘민족’을 무기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탄압과 착취를 합리화시켰습니다. 민족이란 이름아래 ‘개인’은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많은 이들이 민족을 거부하고 민족주의를 국수주의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족은 독재정권의 소유물일 수도, 한낱 수사로 치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그리고 우리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동포들이 해외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그들과 우리를 연결해줄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가 존재하는 한, 민족은 쉽사리 부정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란 이름으로 세계를 포용하고,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개정권의 선전 수단이 아닌 우리 모든 구성원의 ‘공통 분모’로 민족은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행여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다문화 가정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형태의 구성원들 역시 분명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온전한 ‘한민족’인가를 생각할 땐 여러 가지 다양한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민족주의’로 호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어와 정서와 혈통에 있어 공통 요소가 있다는 것이 민족 구성원의 요건이 될 터이지만, 그렇다고 혈통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그것만으로 구성원을 분리시키는 발상은 그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사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바 있습니다.
민족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정의한 이들에 저자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만약 민족이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과연 우리 모두는 언제 누구와 계약을 했다는 것일까요? 제 자신이 한민족이 되겠다고 서명이라도 했나요.
처참한 학살과 전쟁을 불러온 민족 우월주의와 민족주의는 엄연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세계의 다양한 민족문화를 달러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로 획일화하려는 무참한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과 가치는 더더욱 지켜지고 계승되어야 할 것입니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에세이 형식의 책은 많은 부분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도 가능합니다. 여러 학자들의 담론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더 높은 것은 아마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차원일 것입니다. 해외 800만 동포들을 이어주는 것도 민족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