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도 웁니다 - 마로니에 나무가 들려주는 한 소녀 이야기 날개달린 그림책방 7
이렌 코앙-장카 글, 마우리치오 A.C. 콰렐로 그림, 염명순 옮김 / 여유당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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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 안네의 삶은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안네. 무참한 어른들의 비인간적 야만 속에서도 안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책은 150년의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 숨을 쉬었던 한 마로니에 나무가 회상하는 안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안네가 최후의 2년 동안 숨어 살았던 공간.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뒤뜰에서 살았던 마로니에 나무는 그렇게 안네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안네는 바로 이곳으로 1942년 7월 6일 오게 됩니다. 그리고 1944년 8월 4일 독일 경찰에게 발각돼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베르겐벨젠 집단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너무도 짧은 삶을 살아야 했던 안네. 그리고 그러한 안네의 마지막 시간들을 지켜봐야 했던 나무. 나무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안네를 추억하고, 자신 역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2010년 8월 결국 벌목의 위기까지 넘겼던 마로니에 나무는 폭풍에 쓰러지고, 베어집니다. 안네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나무가 사라지고 나면, 이제 아무도 그 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넘어뜨리기 전에 내 몸에서 눈 하나를 떼어 낼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남긴 빈자리에 그것을 심겠지요. 그 눈은 똑같이 닮은 쌍둥이처럼 또 다른 나랍니다.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내리고, 양분을 빨아올리며 자라겠지요.”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안네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아이들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살육의 지옥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살인을 하고 또한 살해당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른은 결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때문에 어리석은 결정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영영 꿈일 뿐일까요.

 

답은 안네의 짧았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을 기억하고 또한 치열하게 삶과 싸워나갑니다. 그리고 인간을 믿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간들이 사라지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도 분명 자신의 빛으로 주위를 밝게 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이 천천히 사막으로 변하는 걸 본다 / 나는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를 듣는다 / 늘 귓가를 맴도는 이 거센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 우리마저 죽일 터이다 /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진다 / 하지만 하늘을 바라볼 땐, 모든 일이 잘 끝날 거라 생각된다 / 이 모진 시절이 가고, 다시 고요한 평화가 /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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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청춘 - 일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청년들의 고군분투 생존기
청년유니온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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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지들끼리 다 한다. 무슨 말이냐면 그동안 대학생을 비롯한 청춘들이(이 말에도 물론 모순이 가득하다. 대학생이 아니면 마치 정상적인 젊은이가 아니라는 듯한 상당히 문제 있는 어투다) 그동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가, 최근 반값등록금 문제를 시작으로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한마디로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렸다는 진단 말이다.

 

청춘들이 언제 죽었었나? 그러다 지금 다시 살아난 것인가? 그들을 좀비 보듯 매도하고 난도질하고 비아냥거리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것은 오히려 기성세대들 아닌가. 말도 안 되는 동정과 충고, 어설픈 꾸지람 등으로 그들의 기를 꽉꽉 눌러온 것이 누구였냔 말이다.

 

때문에 청춘들은 말한다. ‘너희들이나 잘 하라’고. 그 말에 선뜻 ‘이 놈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들은, 글쎄 내가 봤을 때 별로 없다. 일단 우리는 아름다운 대통령을 뽑지 않았나. 그것 하나로 솔직히 닥치고 있어야 한다. 왜냐고? 기업 살리기에 올인하신 대통령님 때문에 대학생 등록금 공약을 지킬 수 없으셨고, 4대강에 돈을 올인해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복지 문제는 배부른 소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청춘들은 너무 힘들고, 그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춘들에게 충고를 한다? 꾸지람을 한다? 밤길이 무섭다면 그런 대담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솔직히 좀 맞아도 싸다.

 

청년유니온은 최근 젊은이들의 인권과 직업권 나아가 세상에서 한 번 자기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친구들이다. 김영경 대표를 비롯해 몇 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실 청년들의 권리를 위해, 인권을 위해 뛰어주는 단체는 흔치 않다. 아마 청년유니온이 최초일 듯 싶다. 직업이 없어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들의 포부는 사실 당연한 것인데도,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웃기는 소리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 분들과 사회 곳곳에서 비정규직, 알바라는 이름으로 노동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 순간에 손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 우린 편의점, 카페, 주유소에서 어리바리하게 허둥대고 있을 테고, 중소기업은 멈출 것이다. 이른 바 고학력 알바들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고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한국을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다 만약 외국인 신부님들이 출산을 거부한다고 생각해보자. 상상이 가지 않는가. 우리는 맥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마운 분들을 폭행하고 살해한다. 미친 나라다.

 

청년유니온의 소중한 분들이 우리와 똑같은 청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꿈도 이상도 다르지만, 한결같이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비슷하다. 이 미친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청춘이 청춘답게 산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할 것일까. 하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다.

 

숭고한 희망 따위,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 있다!” 따위의 글들은 많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그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래야 어설픈 충고 따위를 하지 않을 수 있고, 묵묵히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청춘들은 역사상 그 어떤 세대들보다 똑똑하다. 그리고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편의점에서 하루만 알바 해보라. 주유소에서 총잡이를 하루만 해보라. 장담컨대 당신은 이 기가 막힌 청춘들의 삶에 어이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고 이 정도의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놀라지는 마시라. 솔직히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나.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를.

 

생존을 위해 사랑을 유예하고, 꿈을 저당 잡히며, 대출 이자를 갚다가 청춘을 다 보내는 이들이 많다면, 분명 그 시대는 미친 것이고, 잘못은 사회에 있는 거다. 대통령님께서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도 다 해봤다!”며, 요즘 아이들이 나약하다고 말씀하신다. 정말 겁 없는 분이다. 대통령은 평생 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울컥거리게 하는 문장 몇 개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이제 더 이상 청춘들을 응원하지 않겠다. 다만 굳건한 믿음을 간직하고 함께 하겠다.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조화되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 인류는 비극을 맞이한다.… 한 달에 150만 원 버는 예술 노동자를 꿈꾼 어느 가수는 창작 활동에 대한 대가로 미니홈피 도토리를 받은 채 뇌종양으로 쓰러졌다. 촉망받던 영화작가는 밥과 김치가 없을 때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에게는 대학을 제외한 어떠한 삶의 가치도 허락되지 않으며 이런 아이들에게 대학에 들어가는 법을 가르치던 어떤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슬퍼한다. 꿈 많은 만화작가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편의점 한편에서 고객의 포인트 카드 소유 여부를 확인하며, 연인들은 굶어 죽을 수 없기에 그들의 사랑을 유예한다. GDP와 KOSPI가 인류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귀납적으로 도출되었다. 모두 다 죽었는데 그까짓 숫자 놀음은 대체 누가,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한없이 슬펐다. 이 따위 야만이 내게 허락된 현실이라는 사실이 서럽고 노여웠다. 절망의 끝에서 살아내기 위해 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상상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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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통곡하는 한
야엘 아쌍 지음, 권지현 옮김 / 반디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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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의 역사. 난 이-팔 갈등을 볼 때마다, 우리 한반도가 겹쳐졌고,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 정부의 왜곡된 시각과 교육이 역겨웠다.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 역시 적지 않았다. 세계의 진정한 ‘악의 축’ 국가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결국 죽음은 평등하고, 평화 역시 평등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을 제외한 평범한 국민들까지 모두 증오하고 혐오해선 안 될 일 아닌가. 이 책은 그러한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중함’이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을 든든한 후원자로 뒤에 둔 채, 온갖 비정상적 악행을 저질러 왔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평화를 빈번히 유린했고, 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의를 부르댔다. 내가 가장 혐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바로 정의를 부르대는 ‘불의의 세력’이다. 미국 등 서구 세력. 그리고 이스라엘이다.

 

종교의 신념으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는 것은 물론 정당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의 희망으로 수많은 이들이 살 곳을 잃고 생명까지 빼앗겨야 한다면? 그것이 정당한 일이 될 수 있을까. 돌을 던지는 청년들에게 총을 발사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신들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최근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결국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참상 아닌가. 인터넷을 보니 국내 일부 네티즌들이 노르웨이 테러범을 옹호했다고 하니, 이따위 것이 종교고, 신자라 부를 수 있을까.

 

예루살렘이 피로 물들고,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오늘의 현실을 어떤 종교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 들어 개신교 신자라는 자격으로 행해진 것들. 기억하기조차 싫은 것들 뿐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결코 좋을 수 없다. 히틀러 나치에게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민족이 타민족을 학살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면 이는 비극 중에서도 참극이다.

 

책은 이런 이스라엘의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결국 ‘적’이기 때문에 화해하고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전혀 틀리지 않다. 적을 말살하고 학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청년 사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파리에서 고국으로 떠나고 결국 그 곳에서 삶을 마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장을 팔레스타인 소녀에게 기증하며 새롭게 태어난다.

 

우린 적이라 불리는 동족과 총칼을 맞대고 있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북쪽의 우리 민족이 굶어 죽거나 백기를 흔들며 투항하기만을 기다린다. 우리가 과연 이스라엘 극우파와 뭐가 다를까. 이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인가. 이따위 모습이 백의민족일리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따위 민족의 일원이기를 거부한다.

 

결국 적이기 때문에 함께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모두 머리에 뿔달린 악마가 아님을 깨달았다면 그들과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5·24조치 이후 최초로 정부가 북의 밀가루 지원을 승인했다. MB정부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부디 이것이 새로운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나쁜 평화도 좋은 전쟁도 이 세상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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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상처가 나에게 말한다 - 나하고 얘기 좀 할래?
울리케 담 지음, 문은숙 옮김 / 펼침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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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인가.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의외로 내게 그런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혼잣말이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림. 그것은 긴장할 때나 느긋할 때, 잠을 자기 전이나 열심히 일을 할 때 어느 때고 갑자기 이뤄지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솔직히 거기에 대해 그 어떤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누구나 유년 시절을 겪는다. 그리고 누구나 그 시절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 시절이 행복했건, 불행했건, 지우고 싶은 지옥 같았던 시간이어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깊숙이 각인된다. 그 때의 악몽이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 때 내 안의 숨어있는 또 다른 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솔직히,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난 약간 유별스러울 정도로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한다. 몇 번이나 싸움이 날 뻔 했고, 난 비정상적일 정도로 흥분하곤 한다. 내 아이가 아닌데도, 난 참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는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인양 묵인되어 온 역사가 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지 않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강요당한다.

 

부모들은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 학업이나 이밖에 의무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 자체가 학대라는 사실은. 아이들은 그런 유년시절을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할 것이고, 이는 극심한 정신적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책은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며, 자신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묵혀있는 상처를 치유하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 길은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심리학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게 책은 어렵지 않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성공이나 명예, 돈이나 체면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줬다.

 

결국 인생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가 핵심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행복은 물질로 충족시킬 수 없다. 때문에 다시 안도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살아왔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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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나의 삶 나의 시, 백 년이 담긴 오십 년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고은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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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이승의 어느 골짝

저승의 어느 기슭

아니

밑도 끝도 모르는 우주 무궁의

어느 가녘에 대고

한마디 말씀이여

한마디 말씀과 말씀 사이 지언이시여

애면글면 구걸해오기를

어언 오십 년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 말씀의 귀신들이시여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

이제 나도 이런 구걸의 경지

함부로 터득하고 싶습니다

다만 내 행복은 도둑이 아니라는 것

내 불행은 그 언제까지나

거지라는 것, 이것뿐입니다.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

 

한 때, 아주 어린 시절. 시인을 꿈꾸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줄줄이 풀어놓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말이 말이 아닌 시대에서 그냥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를 짓는 것이 내 삶을 송두리째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겐 그렇게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하찮은 재주조차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은 시인에 대한 경외심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시를 온전히 읽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지만, 그래도 그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함이었습니다. 만인보의 까마득함과 현실에 대한 치열함 역시 존경의 한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인을 인터뷰할 수 있는, 아니 그 장소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비록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흔한 기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그 날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고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숨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내가 자리하지 못한 그 인터뷰의 글을 나중에 읽게 되었습니다. 종교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인은 지금의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행태, 일부 교회들의 더러운 권력 놀음에 대해 “구역질도 아깝다”는 비판을 하셨습니다.

 

구역질도 아까운 인간들이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그들과 공범은 아니었는지, 감히 부끄러웠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분노를 증오로 바꿔 토해내듯, 때론 스스로의 부끄러운 자위행위로 글을 써오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뒤돌아 봤습니다. 내 글은 온전히 내 것이었나. 난 도대체 글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살았나.

 

짧은 시인의 강연과 질의·응답을 담은 이 책은 시인의 모든 것을 담으려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담담히 다가옵니다. 서울대에서 오랜 만에 괜찮은 행동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학교를 빛내기 위한 목적이 더 컸겠지만, 때론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세상과 사람들을 지켜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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