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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나의 삶 나의 시, 백 년이 담긴 오십 년 ㅣ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고은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
그러므로 이승의 어느 골짝
저승의 어느 기슭
아니
밑도 끝도 모르는 우주 무궁의
어느 가녘에 대고
한마디 말씀이여
한마디 말씀과 말씀 사이 지언이시여
애면글면 구걸해오기를
어언 오십 년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 말씀의 귀신들이시여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
이제 나도 이런 구걸의 경지
함부로 터득하고 싶습니다
다만 내 행복은 도둑이 아니라는 것
내 불행은 그 언제까지나
거지라는 것, 이것뿐입니다.
당신께서 가장 높으십니다』
한 때, 아주 어린 시절. 시인을 꿈꾸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줄줄이 풀어놓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말이 말이 아닌 시대에서 그냥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를 짓는 것이 내 삶을 송두리째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겐 그렇게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하찮은 재주조차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은 시인에 대한 경외심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시를 온전히 읽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지만, 그래도 그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함이었습니다. 만인보의 까마득함과 현실에 대한 치열함 역시 존경의 한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인을 인터뷰할 수 있는, 아니 그 장소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비록 직접 그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흔한 기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그 날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고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숨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내가 자리하지 못한 그 인터뷰의 글을 나중에 읽게 되었습니다. 종교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인은 지금의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행태, 일부 교회들의 더러운 권력 놀음에 대해 “구역질도 아깝다”는 비판을 하셨습니다.
구역질도 아까운 인간들이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그들과 공범은 아니었는지, 감히 부끄러웠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분노를 증오로 바꿔 토해내듯, 때론 스스로의 부끄러운 자위행위로 글을 써오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뒤돌아 봤습니다. 내 글은 온전히 내 것이었나. 난 도대체 글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살았나.
짧은 시인의 강연과 질의·응답을 담은 이 책은 시인의 모든 것을 담으려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담담히 다가옵니다. 서울대에서 오랜 만에 괜찮은 행동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학교를 빛내기 위한 목적이 더 컸겠지만, 때론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세상과 사람들을 지켜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