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를 누를 때
야마다 유우스케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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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살기 참 팍팍한 곳이라는 사실은, 일단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갖가지 유쾌하지 못한 통계자료들이 이를 더욱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살률일 것이다. 특히 젊은 층에 경우 교통사고보다 높은 사망원인이 된지 오래다. 자살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국가의 오만함 역시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역시 젊은 층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언뜻 보면 우리보다 잘 살고, 치안이나 질서 등등 겉보기엔 훨씬 살만한 곳이라 생각하기 쉬운 일본. 그런데 왜 그리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까.

 

소설은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전개되지만, 결코 황당 그 자체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바로 자살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연구다. 이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생명에 대한 권리까지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발상.

 

젊은 층에 자살이 늘어나자, 일본 정부는 세금이 줄어들 것(!)을 심각히 우려해 결국 청소년자살억제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아이들을 고강도의 스트레스 환경에 두어 청소년의 심층 심리를 해명한다는 목적이다. 잔인한 국가의 무지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정부에서 무차별적으로 선택한 아이들은 다섯 살이 되면 심장 수술을 받게 된다. 물론 본인은 모른다. 그리고 수술 뒤 5년이 지나면 정부는 그 아이를 부모로부터 빼앗는다.

 

국가의 명령에 의해 강제 수용된 아이들은 하나의 스위치 장치를 받게 된다. 이는 스스로 언제든지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다. 바로 5년 전 아이들이 받은 심장 수술, 그 때 심장에 삽입된 장치이다.

 

아이들을 각자 독방에 갇혀 정기적인 진찰과 검사 등을 받으며 마치 죄수처럼 생활하게 된다. 하루 중 몇 시간만 아이들이 함께 모일 수 있으며, 바깥으로의 운동이나 산책도 센터 안에서만 허용된다.

 

차츰 아이들은 고독과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하나 둘 스위치를 누르게 된다. 바로 자신의 심장을 멈출 수 있는 버튼을 말이다.

 

주인공 미나미 요헤이는 바로 이 수용센터의 감시원으로 근무한다.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업무를 맡아야 하는 미나미. 그는 요코하마의 수용센터로 발령을 받고, 곧 그곳에서 4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에 아이들은 무려 7년 동안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버텨온 것이다.

 

조금씩 아이들과 친하게 된 미나미는 왜 4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지 않는지 알게 되고, 자신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바로 아이들을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탈출시키는 것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긴박감과 함께 우울감이 깔려있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박탈해버린 국가에 대한 증오와 가족,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이, 아련한 아픔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건 탈출과 이어지는 가슴 먹먹한 사건들은 도대체 정부, 국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회의를 낳게 한다.

 

어떻게 보면 자살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생사여탈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자기 권리일 수 있다. 인류가 진보하면 할수록, 정작 개인은 자유를 빼앗겨야 하는 모순 속에서, 자살은 인간의 마지막 저항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살마저, 국가의 발전과 영속을 위한 통제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그 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자살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순 없다. 이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결정이자, 책임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답지 못한 굴레 속으로 밀어 넣고 오직 집단, 국가, 정부를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시켜 버린 현대에서, 우리는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첫 페이지를 넘긴 뒤, 끝내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케 만든 소설의 힘은 글쓴이의 뛰어난 흡입력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살이란 행위,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힘도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

 

개인적으로 자살을 반대한다. 그 어떤 도덕적 명분과 이상을 들이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살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끝내 자살을 선택한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함께 그러한 자살을 막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한 냉정한 비판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순 있다. 하지만 결국 스위치를 누르게 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은 아니라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일본이나 우리나 늘어나는 자살을 궁극적으로 막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살예방본부 따위를 두어 허무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것이다.

 

단순히 재미로 읽기엔 조금 무거운 소설이었다. 일독을 조심스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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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 모범소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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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고로 고전을 읽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고들 합니다. 유명한 작가부터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이고, 아무튼 고전은 인류의 오랜 경험과 가치가 담긴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습니다. 여전히 고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적지 않은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주신 세계, 현대, 한국문학전집을 독파하지 못한 부끄러움도 여전히 남습니다.

 

때문에 틈나는 대로 고전을 읽으려 노력해왔습니다. 독서의 어떠한 기준이나 계획도 없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전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오래전에 마련했던 이 책을 순전히 우연하게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세르반테스에겐 참으로 죄송한 얘기지만, 전 아직도 《돈키호테》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간 반드시 읽겠다는 다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를 읽기 전에 이렇게 세르반테스의 다른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모범소설》은 제목처럼 인류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소설의 재미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까지 소설계를 풍미했던 이탈리아풍의 이상주의적, 목가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로의 전환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이 근대소설의 효시라 자부했다고 하니,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더불어 자신감 역시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작품은 12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1권은 6편을 담고 있습니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부터 〈고상한 하녀〉까지 무척 즐거운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스페인 문학의 문외한인 저로서는, 게다가 스페인 최고의 작가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소 지금 정서에 맞지 않는 표현과 시대 묘사가 책 읽는 속도를 방해했고, 조금은 따분함을 주었음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책을 읽는다면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12편 중 9편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모범소설》은 당시 단지 성적인 도구이자, 집안의 물건처럼 여겨지던 여성을, 당당히 결혼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커다란 운명 앞에 직면한 인간의 다양한 고뇌와 선택을 표현함으로써 실재 살아 숨쉬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정의의 승리, 그리고 순수한 영혼들의 이야기는 스페인 문학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여전히 고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돈키호테》에 대한 성급함이 다가옵니다. 어서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시 고전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과 삶의 교훈을 동시에 전해주는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 스페인 문학의 매력과 함께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참으로 ‘모범적인’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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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순씨를 부탁해 - 작은 풀씨들의 유쾌한 반란
박철웅 지음 / 봄풀출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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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농락하는 동안 정부는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고, 국민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미래는 똥으로 완전 뒤범벅이 되는 거예요.”

- 이동진의 《위트상식사전》중

 

과연 이 말에 어느 누가 자신 있게, “헛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랬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딱 저 정도 수준이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바쳐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발전시켜 왔지만, 딱 그들보다 몇 배되는 잡스러운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더럽히고, 악용하고, 망쳐 온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지난해 10월 26일, 박원순 시민후보는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상대 나경원 후보 측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들이라면 치를 떨만한 네거티브 공세와 온갖 추잡한 짓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장이 되었다. 이후 나경원 의원에게 돌아간 여러 가지 의혹들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었다면 도대체 서울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참, 이런 수준의 인간들도 정치인이네, 법조인이네 하며 거들먹거리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박 시장이 취임 후 지금까지의 서울시정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물론,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비판적 지지도 있고, 그냥 비판도 있고, 또 전폭적인 지지도 있다. 아직은 그가 오세훈 전 시장이 배설한 온갖 ‘똥’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지만, 곧 ‘박원순표’시정을 보여줄 것이다.

 

책은 순수한 자원봉사로 박원순 후보 진영에서 열심히 뛰었던 팬클럽 회원들의 ‘땀의 기록’이다. 글쓴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간 박원순’을 ‘인지(!)’하게 되고, 곧 그를 위해 자원봉사에 나선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이른 바 직업 정치인이 아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인권과 정의를 위해 노력해 온 시민 활동가다. 개인적 부귀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만한 능력과 지위를 가졌음에도 그는 공공적인 이익, 복지, 평등을 위해 노력해왔다.

 

전문적인 정치인이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정치에 전혀 문외한이 갑자기 의정활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 정치 경험이 있어야만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우스운 얘기다. 오히려 난 개인적으로 정치적 경력이 많다고 내세우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 더 더러운 냄새가 나고, 더 역겨운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신념이자 가치이다. 어떤 세상을 꿈꾸고 어떤 이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명확한 가치관이 이미 굳건한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본인이나 국민이나 국가가 행복할 수 있다.

 

때문에 박원순 후보의 유세 기간 동안 그를 둘러싼 수많은 비방 중 정치적 자질이나 능력에 대한 비난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였다. 그리고 시민들은 바로 그 점을 명확히 꿰뚫어 보았다.

 

박원순이 빨갱이라는 비난 역시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어버이연합이라는 집단은 아름다운 가게 앞에서 “원순이 이년, 연기나 할 것이지 무슨 정치냐!”하며 한 편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필요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그를 빨갱이로 규정하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직업도, 성별도 모른 채 말이다.

 

아직 우리 정치는 썩었고, 더럽고, 후졌다. OECD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룹 중에서도 아마 최하위일 것이다. 이명박과 같은 후안무치, 유일무이의 기업인을 대통령을 만들 정도로 우리 정치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듯, 이명박 시대는 새로운 국민들의 자각을 이끌어 냈고, 시민활동가 박원순을 서울시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저자와 같은 수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땀을 보탰다.

 

현재 야권연대가 삐걱거리는 모습이다. 분명 아름답지만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착착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아름답고 숭고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온갖 욕망과 추함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의 행위이자, 바로 그들을 위한 행위이다. 먹물 속에서 진주를 꺼내는 것이 정치라면, 손이 더럽혀질 각오가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먹물을 깨끗한 1급수로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진주를 찾을 수 있다.

 

전문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힘을 모아 박원순을 시장으로 만들었듯, 이제 총선과 대선에서도 수많은 민초들이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힘을 모을 것이다. 기존 정치권은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 선택에 따라 당신들의 존재 여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멍청한 짓거리는 그만 좀 했으면 한다. 지역주의, 패거리주의에서 이제 좀 벗어날 때도 되었다. 자신들의 입으로 계파 정파를 타파하겠다고 하고, 여전히 이 꼴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당신들의 헛짓거리를 모른 척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젠 좀 알자.

 

책은 박원순 시장 선거 과정을 통해 기존 정치권의 구태가 얼마나 견고한지, 그리고 순수한 이들의 선의가 어떻게 무시당하고,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향후 또 다른 박원순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분명 시사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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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간선언 - 증오하는 인간
주원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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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적어도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한 바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만약 그 어떤 존재가, 그 어떤 무엇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신념은 개성과 위치, 살아온 환경과 체험한 모든 것들에 따라 다르다. 타인에게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정작 본인에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 있다. 무참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소비다. 우리는 개인의 선택으로 일생 동안 소비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개인의 선택’은 참으로 비루하다.

 

자본이, 기업이 이미 권력을 장악한 지 오래인 시대다. 정치는 온갖 화려함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이미 빼앗겼다. 이제는 기업이란 이름의 권력집단이 국가를 통제하고 또한 착취해 나간다.

 

소설은 종교화 되어버린 기업의 실체를 보여준다. 참혹한 살인사건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자본과 기업의 노예가 되어버린 국가가 조우하게 된다. 국가는 기업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삼성, 현대 두 기업이 대한민국 경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이 자동차를 구입하든, 컴퓨터를 구입하든, 핸드폰을 구입하든 선택의 여지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하다못해 라면 한 봉지조차 우리는 강요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IMF의 환란 속에서 국가는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해가며 기업을 회생시켰다. 은행을 살렸고, 자본을 살렸다. 하지만 그 자본, 기업은 그러한 국민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기업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는 ‘신화’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만 모든 것이 평가받는 시대에 기업은 필히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교, 현대교가 이미 모든 종교를 압도하고 있다. 대통령조차 범접할 수 없는 자본의 힘 앞에 평범한 국민, 시민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시대는 자본과 기업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함께 지려는 이들은 찾을 수 없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다만 소비하고 다시 소비하는 존재일 뿐이다.

 

제목은 우리가 과연 이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것 같다. 단지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 소비의 능력을 상실하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함께 소멸해버리는 지금, 기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창출이라는 명확하고도 순수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 그 기업은 이제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인 세포분열을 반복하고 있다. 과연 소비의 주체인 개인이 더 이상 생존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온다면, 기업은 개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짧은 분량의 소설은 그 어떤 반전이나 감동도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무한한 자괴감과 무참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자괴감, 무참함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우리는 진정 인간임을 포기해야 한다.

 

“민족, 정치, 시민, 정부, 행정 등의 개념을 신봉하는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지. 하지만 기업은 달라. 기업은 이윤 추구 집단이야. 사악해 보이고 게걸스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투명하지. 기업은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드시 기업의 종교화가 필요한 거야.

이 욕망이 또다시 자연, 짐승인 사람들에게 왜곡된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 신을 향한 욕망의 패러다임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 종교성이 성립되어야 하지. 단언컨대 종교적 근간을 적극 수용하는 기업은 약육강식의 질서 또는 계급의 최상층을 점할 수 있네. 흩어진 자연, 짐승인 사람들을 끌고 가며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임 인류의 참 모델이 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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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어진 현자 지셴린이 들려주는 단비 같은 인생의 진리
지셴린 지음, 이선아 옮김 / 멜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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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베이징대학교 캠퍼스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은 모든 게 낯설었다.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들고 입학 수속을 밟기엔 너무 버거웠다. 마침 길을 지나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가방을 잠시 맡겼다. 일 처리를 하다 보니 가방을 잊었다. 아뿔싸, 점심시간이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가방 생각이 났다. 급히 되돌아가 보니 노인은 땡볕 아래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입학식에 참석한 신입생은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이 학교 주석단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지셴린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이었다.”

 

베이징대학교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일화의 노인이 바로 책의 주인공 지셴린 선생이다. 중국에서는 ‘국학대사’‘학계태두’‘국보’ 등으로 불린 중국의 지성이다.

 

빛바랜 중산복을 입고 한평생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대학자. 그는 평생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빈둥거리지 않는다’‘수군거리지 않는다’는 생활상의 삼불 원칙을 지키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2009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중국의 대학자. 모든 중국 인민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말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선거가 다가오니 여기저기 학자 출신의 정치지망생들이 보인다. 그들 중 몇몇은 훌륭한 인품과 지성으로 이미 인정받은 분들도 있지만, 석연치 않은 여러 스캔들에 시달려 온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지셴린 선생의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무엇보다 친 할아버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한없이 편안했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인생의 고난을 수없이 겪어온 선배의 따뜻한 이야기. 결코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한없는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의 따뜻함과 진중함을 느낀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생명을 잃을 뻔 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지 않을 때에도,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며 혹독한 세월을 견뎌낸 지셴린 선생. 그는 학문으로 구원을 찾았고, 또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스승이 없다고 개탄하는 한국 사회. 하지만 모든 것이 선생님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스승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은 이곳에서, 과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평등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마저 앗아가려 했던 어른들, 한 보수 정당의 선전 문구처럼 “전교조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고액 과외나 사설학원, 해외유학에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는 부모들. 이런 척박한 교육 환경에서 과연 지셴린 선생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지금의 중국은 분명,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아울러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못지않은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기나긴 역사는 쉽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요란하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조용한 시냇물처럼, 따뜻한 녹차 한 잔처럼 담담하게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넌지시 조언하는 지셴린 선생의 글은 그 자체로 중국의 힘이자, 인류의 가치가 아닐까.

 

10년의 고난의 세월동안 선생은 도연명의 시를 읽으며,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고 한다. 때문에 선생의 글에는 도연명의 시가 자주 인용된다. 그의 시처럼 우리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한 다음, 느긋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책이었다. 늦었지만 지셴린 선생의 명복을 빌고 싶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히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네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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