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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어진 현자 지셴린이 들려주는 단비 같은 인생의 진리
지셴린 지음, 이선아 옮김 / 멜론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1970년대 말. 베이징대학교 캠퍼스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은 모든 게 낯설었다.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들고 입학 수속을 밟기엔 너무 버거웠다. 마침 길을 지나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가방을 잠시 맡겼다. 일 처리를 하다 보니 가방을 잊었다. 아뿔싸, 점심시간이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가방 생각이 났다. 급히 되돌아가 보니 노인은 땡볕 아래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입학식에 참석한 신입생은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이 학교 주석단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지셴린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이었다.”
베이징대학교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일화의 노인이 바로 책의 주인공 지셴린 선생이다. 중국에서는 ‘국학대사’‘학계태두’‘국보’ 등으로 불린 중국의 지성이다.
빛바랜 중산복을 입고 한평생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대학자. 그는 평생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빈둥거리지 않는다’‘수군거리지 않는다’는 생활상의 삼불 원칙을 지키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2009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중국의 대학자. 모든 중국 인민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말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선거가 다가오니 여기저기 학자 출신의 정치지망생들이 보인다. 그들 중 몇몇은 훌륭한 인품과 지성으로 이미 인정받은 분들도 있지만, 석연치 않은 여러 스캔들에 시달려 온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지셴린 선생의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무엇보다 친 할아버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한없이 편안했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인생의 고난을 수없이 겪어온 선배의 따뜻한 이야기. 결코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한없는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의 따뜻함과 진중함을 느낀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생명을 잃을 뻔 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지 않을 때에도,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며 혹독한 세월을 견뎌낸 지셴린 선생. 그는 학문으로 구원을 찾았고, 또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스승이 없다고 개탄하는 한국 사회. 하지만 모든 것이 선생님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스승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은 이곳에서, 과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평등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마저 앗아가려 했던 어른들, 한 보수 정당의 선전 문구처럼 “전교조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며 고액 과외나 사설학원, 해외유학에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는 부모들. 이런 척박한 교육 환경에서 과연 지셴린 선생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을까.
지금의 중국은 분명,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아울러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못지않은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기나긴 역사는 쉽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요란하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조용한 시냇물처럼, 따뜻한 녹차 한 잔처럼 담담하게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넌지시 조언하는 지셴린 선생의 글은 그 자체로 중국의 힘이자, 인류의 가치가 아닐까.
10년의 고난의 세월동안 선생은 도연명의 시를 읽으며,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고 한다. 때문에 선생의 글에는 도연명의 시가 자주 인용된다. 그의 시처럼 우리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한 다음, 느긋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책이었다. 늦었지만 지셴린 선생의 명복을 빌고 싶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히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네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