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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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말부터 하고 시작하자. 이명박이란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수많은 것 중 하나인 용산참사를 만들어낸 것에도 우리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분명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거민들도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한 권의 책까지 만들었다”고. “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아니, 증명해도 믿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고.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 위 망루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타죽었다고 경찰은 말했지만, 시신 주머니에서 나온 라이터는 말짱했다. 시신도 전혀 불에 타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서둘러 지네들 맘대로 부검하고 지네들 맘대로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수사기록을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기억이 난다. 쓰레기 같은 공영방송에서 참사로 순직한 경찰관의 영결식을 보여줬던 것이. 거기에 있던 살인마는 눈물을 흘리며 부하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경찰들은 나름 무지하게 엄숙하게 영결식을 치렀고, 많은 이들이 비장한 눈물을 흘렸다. 흡사 전사한 군인을 추모하는 자리 같았다.

 

경찰의 순직은 물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난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의 죽음엔 그토록 가슴 아파하는 집단들이 정작 거기에서 숨져간 다섯 명의 철거민들에겐, ‘도심 테러리스트’운운하며 죽음마저 ‘철거’시켰기 때문이다. 아울러 죽은 아비의 아들은 성치 못한 몸으로 감옥엘 가야 했다. 자식이 아비를 죽였단 말인가.

 

그때도 지금도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잃은 건 여전히 변함없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그들의 죽음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아득하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 기껏 보상비 더 받겠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믿는다. 이 더러운 세상에 사람다운 사람이 드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가.

 

돈에 환장한 인간들은 결국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오로지 돈만 보이게 된다. 때문에 돈에 환장해 온 천지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명박 정권이 전혀 이상치 않다. 오히려 속으론 내심 응원하고 싶다.

 

용산의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아픔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기어이 망루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 용산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로만 알고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에게 불길은 옮겨 붙을 것이다.

 

당시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 참사를 불러왔던 경찰 수뇌부는 퇴임 후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다 낙선했다. 낙선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인간의 두뇌 속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기 전에 그에게 표를 던진 인간들의 두뇌부터 해부해야 마땅하다.

 

사두고 계속 외면하고 싶었던 책이었다. 6명의 작가가 담아낸 이야기들은 참혹하고 무참했다. 이 시대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이 더러운 인간들을 모조리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에 참으로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이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허명아래 자신들의 치부를 정당화하려는 쓰레기들이 있다. 허나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언제가 되었든 말이다. 시간을 끌다 편하게 죽으면 장땡 아니냐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쓰레기들을 끝내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한대성, 윤용헌. 이들은 열사도 도심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그저 가족들과 행복하게 오순도순 살고 팠던 우리네 이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것들이 오히려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테러리스트들이다.

 

이들의 소박한 삶마저 ‘철거’시킨, 경찰과 검찰과 정권에게 지옥의 저주가 내리길 바란다. 그리고 남겨진 분들, 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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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으로 가는 길 - 역사와 인문학의 세계 정원 순례
질 클레망 지음, 이재형 옮김 / 홍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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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정원’ 프랑스 파리 앙드레 시트로엥 공원의 조경을 맡아 화제를 모았던 원예가, 조경디자이너 질 클레망. 현재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를 거쳐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큰 영예로 알려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전 세계 정원 순례기이다. 생태주의 정원 이론가로 잘 알려진 그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니스트”라 불리기도 한다.

 

앙드레 시트로엥의 조경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이 공원을 통해 ‘움직이는 정원’이라는 혁신적인 정원 개념을 선보였다. 이는 자연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정원으로써, 정원사는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최소한의 역할로 조정자에 머무른다.

 

나에게 정원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인식되어 왔을까. 돈 많은 이들의 사치와 허영의 욕망을 채워주는 ‘보여주기 위한’장식품? 혹은 여전히 우리나라 정서엔 맞지 않는 서구의 단편?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내 생각의 편협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 지구 역시 하나의 커다란 정원이지 않은가. 그 아름다운 정원을 우리 멋대로 황폐화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저자는 아프리카 피그미족의 정착마을에서 ‘최초의 정원’을 발견한다. 그가 본 것 중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정원.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정원이기도 했다. 땅콩 세 그루와 카사바 다섯 그루, 바나나 나무, 토란 따위를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초라한 정원, 이것이 바로 유목을 그만 두기로 한 인류 최초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이어 그의 여정은 베르사유 궁전의 채소밭 정원, 인도네시아 발리의 수직정원, 장 자크 루소가 생을 마감한 에르므농빌 정원, 이름 바 ‘밤의 정원’이라 명명한 동굴들, 인도 잔타르 만타르의 ‘별들의 정원’까지 이어진다. 그가 바라보는 수많은 정원들은 모두 제각각 인류의 지혜와 이상이 담겨져 있었다.

 

그의 여행은 호주의 척박한 지역 록하트에서 잠시 멈춘다. 그리고 호주 원주민들이 정원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궁금증에 빠진다. 과연 왜 그럴까? 수년간 정원의 부재를 이해하지 못했던 저자는 《꿈의 비밀》이라는 노래를 통해 그 답을 비로소 찾게 된다.

 

“(땅 속에서) 쉬고 있는 정령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과연 어떻게 땅을 갈고 땅을 열고 땅에 상처를 입힌단 말인가? 호주 원주민에게 있어 서양이 이해하는 의미의 정원을 만든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정원. 우리에겐 논과 밭이 더욱 더 친숙한 땅의 이름일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경복궁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루 아래 설치된 저 놀라운 난방장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들을 “말하지 않고서도 편안함을 창시하는 우아한 방식”이라 감탄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그 우아함을 집요하게 파괴시켜버린 이들은 과연 누굴까?

 

그가 말하는 정원으로 가는 길은 인류의 미래일 수도 있다. 도시생활의 긴장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진정한 사상의 혁명을 일으키는 길. 그에게 정원은, 아니 우리 모두에게 정원은 ‘낙원을 추구하는’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비록 대수롭지 않고 국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는 지구의 전반적인 생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이제 정원사는 정원의 생산, 건축의 책임자 뿐 아니라 종들을 보호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이 비단 정원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닐 테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역사와 인문학의 세계 정원 순례”라는 부제가 딱 어울리는 즐겁고도 신비로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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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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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이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기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책임한 존재인지 분명히 일깨워주는 책이다. 책 뒷표지에는 “조종하려는 자와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자,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소개한다. 이 역시 선전이다.

 

우리는 24시간,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마저 수많은 선전 속에 포위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진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했던 저자는 ‘PR의 아버지’로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 연방공보위원회에 발탁되어 독일을 상대로 한 선전 전략을 펼쳤고, 전후 최초로 ‘PR 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대중심리학과 결합해 선전과 홍보에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홍보라는 분야를 과학, 산업으로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의 반세기 동안 435명의 의뢰인에게 홍보 자문을 해준 인물. 그의 리스트에는 대통령에서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명인사, 기업, 기관, 단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선전과 홍보의 고전이자,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읽고 있는 홍보의 교과서다. 히틀러마저 자문 요청을 했을 정도로 선전과 홍보의 귀재였던 저자는 타고난 열성과 근면함, 성실성을 바탕으로, 당시 비난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선전’이란 단어를 다시금 고결한 위치에 올려놓으려 노력했다.

 

아울러 책을 통해 정치, 경제, 교육, 예술, 사회단체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선전이 어떠한 역할과 도움을 주고 있는지 강조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금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는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정부, 또는 선량하고 합리적인 소수의 고결한 엘리트 집단이 나서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대중의 의견을 주조하고 조작할 때 비로소 원활하고 질서정연하게 기능한다고 굳게 믿었다. 때문에 그를 ‘민주주의의 암살자’라 비난하기도 한다.

 

원래 선전(propaganda)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22년이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급속한 확산에 충격을 받고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앙선전실’이라는 뜻의 포교성성을 신설했다. 그때 이후로 ‘선전’은 한동안 중립적인 의미의 단어로 쓰이다 제1차 세계대전기에 들어와 영미 정부의 전시 대국민 선전활동을 계기로 지금처럼 ‘음험한’ 색채를 띠게 되었고,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그런 의미로 굳어졌다.

 

저자가 생각했던 선전의 역할과 책임. 그것이 지금의 선전, 즉 자본주의의 총아로 자리 잡은 선전과는 분명 크게 다를 것이다. 하지만 책의 머리말을 쓴 마크 크리스핀 교수의 “선전을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들조차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 버네이스는 그러한 역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우리를 위해 만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그 역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처럼 이 책은 분명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재벌가의 자식들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영역마저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얼마 전 갔던 대형마트에서는 새우튀김마저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홍대 근처에서 처음 유행된 튀김 가게들을 먹어치우겠다는 발상이다. 분식과 제과, 피자 등은 이미 점령된 상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여기에 무감각하다. 그들이 퍼붓는 광고 속에 우리는 얼마나 강하게 저항할 수 있을까. ‘반값’이라는 단어에 무너진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선전은 자본주의의 총아이자, 바로 시민들을 위협하고 구속하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종교를 위해, 그리고 무의미한 전쟁에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처음 사용된 선전. 이제 선전은 우리 사회, 지구를 점령해 버렸다. 여기에 100%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 1%라도 선전의 가공할 위력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희망은 갑자기 찾아올 지도 모른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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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하서명작선 61
토마스 불핀치 지음, 김명희 옮김 / (주)하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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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아직 이윤기 님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지 못했다. 내 게으름의 탓이다. 살면서 참 자주 느끼는 건데, 내가 정녕 무지하다는 것이다. 당최 무지하고 무지하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아직 희미하기만 하고, 철도 들지 않아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곧 후회한다.

 

그 수많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른 바 남들 다 읽는 책을 안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치면 뭐 난 죽을 때까지 인간되긴 글렀다.

 

책장에 고이 무셔두었던 이 책을 꺼낸 것은 그런 자책과 회의감에 몸부림 칠 때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나이 먹도록 그리스로마 신화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책장을 펼쳤다. 이 광대한 신들과 인간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읽은 후의 소감은? 음….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최근 샘 워싱턴 주연의 〈타이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직 2편까진 못 봤고, 1편만 봤다. 내용은 제우스와 다나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하데스에 맞써 싸우는 이야기다. 메두사를 죽이고, 결국 크라켄까지 죽인다.

 

하지만 책과 영화는 조금 다르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인 것은 맞지만, 크라켄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크라켄과 비슷한 괴물이 등장하지만,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그리스로마 신화는 아직까지 영화화될 만큼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한 재미있다. 우리나라도 조금은 그런 경향이 있지만, 유럽이나 서구에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모르면 바로 무식한 녀석으로 찍혀버린다. 이른 바 필독서이다.

 

허무맹랑하고 때론 너무 유치찬란하기까지 한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야 뭐 워낙 사대주의에 찌들어, 그리스로마 신화를 지적 허영심의 발로나 좀 아는 척 할 때 쓰는 인간들이 많지만, 분명 서구는 그렇지 않단 말이지. 그들은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든단 말이다.

 

내가 감히 책 한 권 읽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판타지가 많은 시간을 거쳐 내려오며 각 세대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또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울러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더 이상 씨알도 만 먹히는 판타지가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과 같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즐겨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출판되거나 소개되고 있는 영화, 문학 등이 얼마나 많은가. 하다못해 SF 분야에서도 그리스로마 신화는 적잖이 차용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단지 그리스와 로마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들의 상상력이 담겨,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하나의 공통 판타지는 아닐까.

 

때문에 그들의 신화만이 우수하다거나 우리는 왜 그런 것이 없냐고 궁시렁 거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따지지 말고, 그냥 보약처럼 챙길 책일 뿐이니. 그리고 이야기일 뿐이니.

 

이윤기 선생님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제대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일단 그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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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 & 에드가 모랭 지음, 장소미 옮김 / 푸른숲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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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는 평범한 시민, 아니 진보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감히 지금의 무참한 사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깜냥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만 했다 하면 또 다시 어느 계파, 어느 세력으로 몰아세울 테니까요.

 

하지만 벼랑 끝으로 떨어진 한국 진보 진영의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 말만은 반드시 해두어야겠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다고요. 그리고 그 기억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겠다고요.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로 이미 전 세계 지성들의 가슴의 파문을 일으킨 분입니다. 94세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진보를 향한, 정의를 향한 그의 외침은 서슬이 퍼렇습니다. 그리고 좌절과 회의에 빠진 이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죠.

 

작은 소책자에 담은 그의 진심은 세계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정책을 말합니다. 더 이상 성장과 분배에 대한 편 가르기 보다는 우리가 진정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도전해야 할 것들과 지양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무기력과 체념에서 벗어나 진정 다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주는 정치. 바로 그런 정치를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아주 오랜만에 좌파 진영에서 대통령이 뽑혔습니다. 그가 어떤 정치를 펼쳐 나갈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르코지가 망쳐버린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상식을 다시 만들어가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입니다. 거의 대세라고 굳혀 버린 독재자의 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 그리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진보진영은 무참히 스스로 무너져 갔습니다. 민주통합당으로 대변되는 중도적 성향의 보수 세력 역시 진정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만들어갈지는 미지수입니다.

 

지난 총선을 보면 국민들은 최선을 다한 반면 야권 세력은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껏 이미 고인이 된 노무현의 추억만을 재활용하며 아무런 대책없는 반MB만 외쳐댔습니다. 무조건 MB만 반대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은 정녕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착각이었습니다.

 

게다가 연대를 말하면서 분열을 조장한 정치인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오만은 하늘을 찔렀고, 반대로 사활을 걸고 단결한 보수 세력은 승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수많은 변화에 대해서도 야권 세력은 국민들에게 감사해야 마땅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넘지 못했던 벽을 이번 총선에 나선 정치인들은 넘을 뻔 했습니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야권에 던져준 표는 야권 정치인들의 착각처럼 노무현에 대한 추억과 일방적 묻지마 반MB 때문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쉽지만 스테판 에셀과 같은 노회한 혁명가,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귀감을 주는 혁명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나머지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국민을 무시하고 우습게 압니다.

 

원로 정치인이라는 사람들도, 또 민중 운동의 대부라는 이들도 역시나 무력합니다. 백기완 선생,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등 몇몇 빛과 소금 같은 분들이 계실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미 하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일어서 전진해야 합니다. 이대로 다가올 5년을 다시 박근혜, 다시 수구 세력들에게 넘겨준 다 해도, 순순히 헌납하듯, 갖다 바칠 순 없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결코 진보가, 민중이 허수아비가 아님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명박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온다 해도 끝까지 쫄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한 용기의 길에 스테판 에셀의 짧은 책자는 많은 힘과 생각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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