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 - 진정한 협객의 귀환!
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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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는 다른 폭염으로 전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덩달아 런던올림픽으로 인해 뜬눈으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니, 이번 여름은 여러모로 참 뜨거웠다고 할 수 있다.

 

밖을 거닐면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어지간하면 책이 손에 잘 안 잡히는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독서는 계절을 따지지 않고, 책이 주는 즐거움은 온도와 상관없이 언제나 즐겁다.

 

지금처럼 더운 날씨엔 주로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만화나 무협지가 좋은 예이다. 물론 이 장르들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탈이지. 예전 학창시절, 만화방에서 밤늦게까지 무협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 늦은 밤 아줌마가 끓여주는 라면의 그 기막힌 맛은 여전히 내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던 무협의 세계, 그리고 만화가 전해주는 다양한 상상의 몸짓들은, 지금처럼 메마르고 그다지 재미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전히 큰 힘을 전해주고 있다.

 

《무림수사대》는 《마이 러브》로 잘 알려진 작자 이충호의 작품이다. 워낙 그림이 좋고 내용도 탄탄하기에 그의 작품은 일단 기대하게 만든다. 무림수사대 역시 그런 기대를 전혀 저버리지 않는 수작이다.

 

무협과 현대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축을 적절히 섞어 새로운 무협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무림수사대는 권선징악이라는 무협물의 기본 정석을 따르면서도 때론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이 시대의 어두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긴, 차라리 피바람이 몰아치던 무림의 세계가 어쩜 지금보다 더 깨끗하고 적어도 치사하지는 않았을지도.

 

주인공 모지후는 친형과 같이 따르던 선배 이현과, 그의 동문인 서연우를 만나며 우정과 사랑이 오가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풀어지기도 전에, 이현과 서연우는 참혹하게 살해당하는데. 그들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애쓰는 모지후. 그리고 그를 돕는 무림수사대. 연이어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과 놀라운 진실. 모지후는 과연 이 모든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충호 작가의 작품은 ‘성장’이 큰 줄거리를 형성한다. 여리고 어리석은 젊음이 점차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와 함께 조금은 커가는 스스로를 느끼기도 한다. 단순한 무협의 틀에서 벗어나 주인공 모지후가 차츰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눈물겹지만 아름답다.

 

또한 작품은 적지 않은 어록들이 인상적이다. “진실은 양날의 검, 어설프게 마주섰다간 상처만 남게 된다”등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많다. 탄탄한 문학적 소양과 감성을 지닌 그이기에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책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나보다는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정의는 결국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대한 적들과 마주한다. 이는 무협소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패턴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더욱 큰 메시지를 전해준다. 과연 이 시대의 모지후는, 이 시대의 백운은 존재하는가.

 

여전히 만화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하찮고 건방진 것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잘 만들어진 만화는 그 어떤 고전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충호 작가의 또 다른 감동을 기대한다.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그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그 능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마천이 《사기》〈유협열전〉에 ‘협객’을 묘사한 글이다. 세상이 천박하게 변해버려서일까. ‘협객’을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졌다. ‘협객’ 근처에도 가기 힘든, 나약한 책상물림으로서 이 시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떨리는 펜으로 질문을 던져볼 밖에.

“어지러운 이 세상을 바꿀 진정한 ‘협객’은 어디에 있는가”

- 이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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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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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마음》《도련님》. 그동안 읽은 나쓰메의 작품들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 그야말로 일부분만을 읽었을 뿐이다. 때문에, 여전히 나쓰메 소세키는 나에게 많은 궁금증과 또한 감동을 주는 작가로 남아있다.

 

《한눈팔기》는 소세키가 자신의 과거를 재료로 하여 쓴 소설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과 삶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입문서 같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의 만년의 작품들을 가리켜 그 자신의 문학적 투영이자 고백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자전적 색채가 명료한 것으로 알려진다.

 

소세키는 고령인 양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소세키가 두 살 때 다른 집의 양자로 보내졌다. 그 후 아홉 살에 양부모가 이혼함에 따라 생가로 돌아왔지만, 정식으로 그가 나쓰메 가에 복적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 되어서라고 한다. 그의 이런 어린 기억은 훗날 그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암울하고 우울하다. 이른 바 선진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주인공 겐조가 겪는 평범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상들이 펼쳐진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무식하고 고집불통인 아내, 갑자기 나타나 돈을 요구하는 양부모, 형제와의 전혀 행복하지 못한 관계 등, 추상적인 지적논리를 중요시하는 그에게 다가오는 삶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한 우울하다.

 

겐조는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끌어안은 채 막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가 생각하는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대신 그의 일상은 모두 불행하고 따분하고 때론 그의 수준에 전혀 맞지 않은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는 주변 이들이 모두 자신과는 맞지 않는,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도 별 수 없다. 자신도 이 구차한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작품 속에서 겐조의 머리를 지배하는 ‘어떤 목소리’가 묻는다. 너는 결국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겐조는 끝내 모르겠다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목소리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한다. “모르는 게 아니지. 알아도 그 곳에 도달할 수 없는 거겠지. 도중에 멈춰있는 거겠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소세키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좌절하고 고뇌한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확인하려 노력한다. 즉 스스로 과거의 철저한 인식과 검증을 통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인식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깨닫는다.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소한, 하찮은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고한 척, 잘난 척 떠든 바로 자신이 하찮았을 뿐이다.

 

주인공 겐조와 마찬가지로 소세키 역시 교편을 접고 전문 작가의 길을 나선다. 이는 소수의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직업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최초의 근대교육을 받은 당대의 지식인으로써 일본의 올바른 길을 위해 펜을 들기로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 전 일본인들이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른 바 일류 선진국이라 칭송받는 영국에서 느꼈던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과 끔찍한 자연의 파괴, 이를 발전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숭상하고 똑같은 길을 욕망하는 일본의 모습. 이는 소세키에겐 일종의 절망과 분노, 공포를 주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펜으로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이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의 한눈팔기는 바로 이러한 그의 소임을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과정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작품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의 정서는 물론 현대 일본인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일순간 정신적 공백에 빠졌던 일본인들의 당황스러움.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사라지지 않은 허기짐까지.

 

위대하고 숭고한 사상, 철학 역시 삶에서 이끌어진다. 모든 것은 하찮아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하찮은 것이 없다. 시간 낭비, 헛짓거리로 조롱받는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삶이자 인생이다. 그 어떤 것도 그렇게 그냥 흘러가는 것은 없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소함으로 시작해 그 사소함으로 고통 받고 절망하는 이들의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이 하찮아 보이더라도, 분명 삶임을 부정할 순 없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일본인들의 심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데,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은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이자 세계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 스스로 확인하는 기쁨이 크다.

 

“그렇게 간단히는 안 끝나.”

“왜요?”

“끝난 건 겉모양뿐이잖아. 그러니까 당신을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자라고 하는 거야.”

아내의 얼굴에 불만과 반항의 빛이 스쳤다.

“그럼 어떻게 하는 정말 끝이 나는 건데요?”

“이 세상에 진짜로 끝나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일단 항 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다만 다양한 형태로 계속 변하니까 남도 나도 느끼지 못할 뿐이야.”

겐조는 토해내듯 씁쓸하게 말했다. 아내는 말없이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래, 우리 아기 착하기도 해라. 아버지가 하는 말은 뭐가 뭔지 도통 못 알아듣겠네요.”

아내는 이렇게 말하며 몇 번이고 아이의 붉은 볼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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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남자는 늙지 않는다 - 근엄한 남자보다 가슴 뛰는 남자가 오래 살 수밖에 없는 젊음의 비밀
와다 히데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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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철이 없다’는 것이다. 이젠 하도 들어서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데, 다만 가끔 궁금했던 것은 과연 내 나이에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철이 든’ 것일까였다. 궁금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 어떤 이의 글에서 불쑥 튀어난 온 이 책 제목은 그야말로 나에겐 ‘구원투수’와도 같았다. 단박에 “거봐, 내가 잘못 된 게 아니라니까!”라는 안심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며, 과연 내가 여기에 부합하는 것일지, 조금 다른 차원의 ‘철없음’이 아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열정, 호기심,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내게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젊어 보이려 한다. 애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젊음이라는 열정과 아름다움, 그 치열함 슬픔을 누구든 거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쉬운 것은 마음이 늙어가는 것은 모르고, 오직 겉모습, 육체의 젊음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성형과 온갖 시술로 얼굴이 어색하게 젊어버린 여성들, 남성들을 보게 된다. 자신의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려는 그 안쓰러운 몸부림이 처량하게 보인다. 늙으면 늙는 것, 나이를 먹으면 먹는 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이들. 그것을 자본의 힘으로, 돈의 힘으로 되돌리려는 이들의 안간힘. 참 이건 아니다 싶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청춘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열정과 희망 그리고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믿음으로 언제나 젊게 보이는 이들. 그들은 비록 육체적인 나이가 들었을지는 몰라도, 언제나 우리에게 젊음의 활기를 전해준다.

 

책은 오랜 시간동안 노인전문종합병원에서 근무하며 매일 다양한 질환의 중장년층 환자를 돌보며 고령자 의학에 매진해 온 저자의 경험이 이끌어낸 흥미로운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감정이 먼저 노화하여 의욕과 자발성, 호기심이 저하되면 육체 역시 움직이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늙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뇌에서 감정 기능과 자발성, 의욕을 담당하는 전두엽부터 두뇌의 노화가 진행됨을 알았고,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더 빠르게 노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감정 노화가 육체의 노화를 촉진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감정의 노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저자는 욕망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 나이에 이건 영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싶어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아예 “나잇값 못 한다”는 말이 최고의 찬사라고 말한다.

 

아울러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었던 일에 눈길을 돌리라고 말한다. 화를 내는 것이 무조건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말도 전한다. 그리고 기존의 상식과 정해진 룰에 대해 가끔은 의심을 품는 것도 정신의 노화를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

 

저자는 자칫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쉽게 풀이해 설명한다. 아울러 정신 노화가 가져다주는 여러가지 상황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 번씩 생활에서 실천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글을 읽다 약간은 찔리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의 영광에 대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과연 그랬을까 생각해본다. 뭐 굳이 자랑할 만큼 영광스러웠던 기억이 없기에 대놓고 주접을 떤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스스로 냉정히 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과연 내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떠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이야기만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것 역시 정신의 노화의 일부분은 아닐까.

 

내 자신에 관대하고, 타인에게 인색했던 것은 아닐까. 내 아집과 독단으로 타인을 난처하게 한 적은 없었나. 난 타인에 대한 존중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물론 이건 비단 정신의 노화와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화는 두렵지 않다. 다만 잘못된 노화가 두려운 것이다.

 

책은 ‘근엄한 남자보다 가슴 뛰는 남자가 오래 살 수밖에 없는 젊음의 비밀’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그리고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 관조하지 말고 반응하라. 매사 들뜨게 행동하라”는 문장도 보인다.

 

결국 매사 넋 놓고 있지 말고, 들뜬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몸과 마음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맞고 틀리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들뜬 삶’에 대한 기대, 그 자체가 이미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들지 않을까.

 

젊고 싶은 이들, 늙기 싫은 이들. 나를 포함해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w, 그렇다면 먼저 멋들어진 사고 한 번 치자~! 그리고 멋쩍게 웃어버리고 다시 들뜬 마음을 간직하자. 세상이 아무리 그대를 열받게 해도, 지지 말자.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다. 외면하고 체념하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다.

 

재미있게 웃으며 살자.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 안이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노인에게 청춘이 존재한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었을 때 비로소 늙는다.”

 

- 사무엘 울만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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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전쟁
이경식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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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다. 그가 2012년 대선의 단연 중심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수년 동안 부동의 지지율 1위를 지켜왔던 박근혜를 위협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은 지금으로썬 그가 유일하다. 안철수가 기존의 모든 판을 뒤흔들고 있다.

 

안철수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원래 뛰어난 인물이었고, 경영자였기에 그에 대한 많은 이들의 존경이나 우호적 감정은 이미 존재해왔다. 하지만 정치인 안철수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더군다나 그가 스스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 아닌, 호명에 의한 부상이었기에 그 파급력은 더더욱 커졌다.

 

최근 발간한 자신의 대선 출사표 성격이 짙은 《안철수의 생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 사회, 정치를 알기 쉽게 풀어 쓴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사람들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안철수의 ‘정치적 비전’에 얼마나 관심이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 책은 《안철수의 생각》이 나오기 얼마 전에 발간된 책이다. 그리고 안철수와 일면식도 없는, 다만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인 전기 작가가 스스로 써내려간 책이다. 그는 안철수의 삶과 비전, 희망을 자신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결론지었다.

 

“21세기 계몽주의자”

 

저자는 안철수를 “자본 증식의 합리성이 모든 윤리와 생활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사회에서, 오로지 합리적인 이성에만 의지해서 개인의 행복 나아가 사회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계몽주의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안철수 본인이 “보다 나은 사회, 사람들이 현재를 살면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믿는다고 단언한다. 때문에 그가 정치에, 그리고 대권에 도전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반길 일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기성 정치권은, 새누리당을 포함한 기성 정치인들은 안철수가 두렵기만 하다. 아무런 정치적 경력도, 활동도 없었던 그가 오히려 기존 대선후보들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지지율에서 1위를 나타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과연 안철수가 왜 그리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여전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제발 거품이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이 일정하게 거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지금의 모습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국민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실망이 쌓여 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보수 세력들의 집권 이후 반세기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겠다던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에게 믿음과 행복을 주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경제적 박탈감, 어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이뤄낸 많은 성과들이 분명 있었음에도 ‘경제’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실패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집요하게 반대하고 저주했던 부자들이 덕을 봤다. 그들의 배만 더 부르게 해줬던 것이다. 비극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 되어줄 것으로 알았던 세력의 참담한 배신과 무능. 이는 결국 이명박 정권이란 괴물을 탄생시키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던 이명박은 오히려 더 큰 불행으로 다가왔다. 오직 돈에만(그것도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아닌 자신과 자신의 가족, 사람들의) 매몰되어 이 땅을 파헤치고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지독한 불의와 부패가 상식이 되어 갔고 정의와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그의 집권기는 말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정치권 중 대안으로 뚜렷이 보이는 이들도 없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박근혜에 가려져 야당다운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고, 진보정당의 프레임을 슬쩍 가져다 선거에만 이용했다. 제 잇속 차리기와 끼리끼리 행태는 새누리당 못지않았다. 박근혜 역시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침묵과 무지를 소신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숨기고 이미지 정치, 신비주의 정치에만 몰두했다. 정치 경력이 15년이 다 되어가지만, 박근혜의 정치철학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진보정당 역시 분열과 반목으로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고 말았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그 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들은 과연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케 만들었다.

 

결국 국민들은 기존 정치권에 대해 다시 한 번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극도의 환멸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 때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안철수였다. 그는 그렇게 시대와 국민의 요청에 의해 수면위로 부상한 것이다.

 

이제 국민들은 안철수를 강력한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본인 역시 스스로 원하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국민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바라는 복지, 정의, 평화가 이뤄지는 세상을 위해, 곧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런 안철수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삶의 선택들을 해왔으며, 어떤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고 소개한다. 그가 바라는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 왜 그가 21세기 계몽주의자인지 설명하고 있다. 같은 말들이 반복되는 모습이 나타나 다소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간 안철수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박근혜를 비롯해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등 대선을 향한 여러 잠룡들의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과연 그 사이에서 안철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혹은 스스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지,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분명, 신기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는 분명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민들에 의해 정치권에 호명된 사람이다. 그의 삶, 철학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사회에 대한 가치 등을 국민들이 인정하고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 실체다. 때문에 앞으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

 

최근 안철수의 언행불일치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원래 태생적으로 뻔뻔하고 혐오스러운 새누리당은 자신의 추악함을 생각지도 않고, 안철수 흠집내기에 한창이다. 보수 진영의 논객들 또한 저주의 화살을 쏟아 붓고 있다. 민주당 역시 눈치를 보면서도 안철수의 부상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한다. 눈물겹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안철수의 대응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자신에 대한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고, 신속히 받아들인다. 기존 정치인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신물이 난 국민들에겐 그마저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박근혜는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다. 당연하다. 박근혜는 능력이 없는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네트워크를 꿈꾸는 사람. 현실의 객관적 진리를 집단지성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내고 공유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안철수. 그의 꿈이 현실로 나타날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기존 정치권이 지금도 안철수를 단지 ‘거품’으로만 판단한다면, 글쎄…. 더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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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하라 - 99% 대 1% 월가 점령 인사이드 스토리
시위자(Writers for 99%) 지음, 임명주 옮김 / 북돋움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2011년 미국의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를 선정했다. 중동과 유럽 그리고 미국을 휩쓴 변화의 물결을 주도한 이들이, 그 어떤 위대한 정치가도 아닌 바로 ‘시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맘에 드는 잡지는 아니지만, 선택은 탁월하지 않았나, 아니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바로 그 시위자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이야기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어떤 영웅의 서사시가 아닌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 만들어낸(아주 오랜만에!) 위대한 행동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직접 변화를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선다는 것. 우리로서는 그리 특이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자명하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어느 위대한 정치인, 예를 들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셔서 나라의 살림을 위해 한 몸 다 바친 분이거나, 그 뒤를 이어 또 다시 군홧발로 민족을 짓밟은 머리 시원한 아저씨가 이뤄낸 것이 아니다. 절대.

 

이 나라의 모든 발전과 번영, 민주주의의 정착과 삶의 진전은 온전히 이 땅의 서있는 시민들, 시위자들의 힘이었다. 국민(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단어는 아니다)들이 죽어나가고, 죽어나가면서도 또 죽어라 일하고, 또 싸우다 죽어나가고, 이러면서 만든 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쓰레기란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라꼴이 참 한심하게 되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라가 그나마 건재할 수 있는 것은(그것도 MB와 같은 괴물을 만났음에도), 모두 다 시민들,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99%의 대중이 1%의 특권층, 권력, 자본에 맞서 싸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큰 감동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해야 했다. 당최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인들, 역시 그들도 별 수 없음을 말이다. 그들도 살아야 함을 말이다. 물론 잘잘못과 배경을 따지고 들어가면 그들이 그리 할 말이 많을 것 같진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괴물 같은 자본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돈의 환상, 소비의 환상에 젖어 있다가 이제 막 눈을 뜬 상태다. 그것도 정말 살기 힘들어진 계층부터 슬슬 말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뜻은 금융자본의 횡포와 특권층의 부패, 서민층의 끝없이 추락하는 삶의 질에 대한 정당한 분노였다. 지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미국보다 더 심각하게, 더 근원적으로, 더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선 왜 1대 99의 투쟁이 저렇게 불붙지 않았을까. 왜 소수의 대학생들만이 천막을 치고 외롭게 투쟁해야 했을까. 왜 그랬을까.

 

사회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덧없는 분석을 좋아라 하시는 분들은 또 구구절절 늘어놓을 테지만, 일단 무지한 내가 보기엔 우리는 지금 너무 지쳐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가공할 시스템 속에서 각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새 우리가 역사를 발전시켜 온 동력인 ‘연대와 분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해왔고, 또 연대해왔다. 이명박 정권 들어 자행되는 갖가지 희한한 꼴들 앞에 우리는 정당히 분노했고, 정당히 싸웠다. 하지만 그 치열한 분노가 채 꽃피기도 전에, 우리는 각자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각자 학교로, 직장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왜? 피곤하니까!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투쟁할 수 없었다. 인정하자. 기득권에 맞서 싸우려 한다지만, 우리도 우리 안에 기득권이 된 것이다. 반값등록금의 당연함. 육아, 교육, 복지 등 모든 문제는 누가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투표만 제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왠지. 그런데 투표도 제대로 안 한다. 드라마 〈추적자〉는 말 그대로 드라마고. 그런 피 끓는 분노와 정의감.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아줌마를 대통령으로 모시려 하고, 올림픽에서 오심 판정엔 핏대를 세우는데, 내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반칙엔 눈감는다. 오히려 내가 반칙할 기회가 없나 살펴보지.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기대한다? 우습다. 그냥 솔직해지자. 관심 없다고. 내일 지구가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사라져도, 오늘 내가 편하고 오늘 내 세금을 줄여주고, 내 재산을 늘여주고, 내 새끼들에게 더 특권을 줄 수 있는 집단에게 표를 던진다. 그리고 적당한 구실을 대겠지. 그들의 정책이 더 올바르다고.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우리는 아스팔트 보도블럭을 까고 투쟁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최루탄에 맞아 죽어간 이들이 몇인가. 고문 받다 죽어간 이들이 몇인가. 아예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영원히 실종 되어버린 이들이 몇인가. 월스트리트는 그야말로 애들 장난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이제 할 말이 그닥 없어지게 되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추악한 자본주의의 정글 속에서 이젠 지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꼴마저도 우리에겐, 이제 대단해 보일 정도가 되었다.

분명한 건 있다. 연대는 위대하다. 정당한 분노와 또한 실현가능한 희망을 위한 연대. 그 연대는 위대하다. 신촌에 있는 거 말고.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가능성, 그 분노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설사 그 문에서 지옥불이 뛰어 나온다 해도, 맥없이 착취당하고 억울하게 죽어나갈 순 없기에 다시 한 번 보도블럭을 뜯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어차피 연말에 멀쩡한 놈 뜯어낼 것. 소중한 곳에 사용하겠습니다.

 

세상은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다. 뛰어난 놈들이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덜 뛰어난 덜 탐욕적인 덜 비양심적인 나머지 99%가 열심히 세금내고 사기치고 도망다니고 대출금 이자 갚고 애 낳고 짜증내고 피곤해하면서 살아간다. 누구 말처럼 잡놈 정신이 충만한 평범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분노하면 그 어떤 뛰어난 정치학자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말 볼 만 할 것이다. 아마 정말 아름다운 완전히 다른 세상은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들의 피나는 자기 생존본능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데 푸훗~! 혁명은 느닷없이 어느 날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

 

좀 적당히들 해먹어라. 그러다 정말 죽는다. 와, 무서워.

 

우리는 짐승이 아니니까,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무서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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