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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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평소 정치적 관점이나 인격적인 면의 호불호를 떠나 ‘근면함’ 하나 만큼은 정말 배워야 한다고 인정해마지 않는(!) 조갑제 선생께서 최근 영화 〈변호인〉에 대한 국민적 인기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또 그만의 근면함을 돋보이게 하는 책을 내셨다. 바로 《악마의 변호인 - 부림사건 변호인은 왜 악마 김정일의 변호인이 될 수밖에 없었나》이다.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다시 태어난 노무현을, 순식간에 ‘악마의 변호인’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독창성에 다시 한 번 지겨운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를 보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진실과 상식도 어떤 이들에겐 왜곡과 불의로 비쳐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부디 만수무강하셔서 더욱 더 기발하고 독창적인 책으로 자연 파괴와 역사 왜곡, 한반도 분단과 미국 패권 유지에 앞장서시길.

 

자, 책 이야기를 하자. 2013년 7월 말 만난 이 책은 순수! 정통! 한국형! 본격! 추리소설의 부활을 알리는 반가운 작품이다. 2010년 세상에 나온 책이니, 뒤늦게 만난 셈인데, ‘아니,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었음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라는 한탄을 절로 하게 만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현직 판사다. 아마 법조인으로서의 지식과 함께 평소 직업을 통해 얻게 된 다양한 경험과 사건들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가 무려(!) 대한민국에서 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느꼈을, ‘법과 정의의 한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멸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듯하다.

 

‘어둠의 변호사’로 불리는 사나이 고진. 그는 판사로 5년을 재직하던 중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떠나, 변호사 사무실도 개업하지 않은 채, 오로지 ‘뒷길’에서 들어오는 의뢰만을 맡아 자문과 해결을 해주는, 또 다른 세계의 해결사다. 그가 왜 갑자기 판사직을 그만 두게 되었는지, 또 왜 ‘어둠’속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는지는 이 작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차츰 그의 정체가 밝혀지리라 예상된다.

 

이런 독특한 이력의 남자 고진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인물이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이유현이다. 경찰대학 출신임에도 유독 현장 근무를 선호해 강력계 형사로 출발해 팀장까지 오른 그는, 말 그대로 ‘현장’ 스타일의 열혈 형사다. 사건이든 범인이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기에 ‘핏불 테리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며, 자연스레 콤비가 되어버린다. 어떤 점에서는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도 하는 콤비다. 하지만 홈즈와 왓슨 콤비와 이들과의 차별성은 분명해 보인다.

 

먼저 이들은 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다. 홈즈 선생은 그야말로 ‘앉아서’ 대부분의 사건을 풀어낸다. 100%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뢰인의 등장과 그의 이야기만으로 사건의 거의 절반을 풀어낸다. 솔직히 점쟁이 수준이다.

 

하지만 고진은 다르다. 그 역시 명석한 두뇌로 사건을 파헤치는 스타일이지만, 단 한 번에 범인을 지목하는 능력 따위는 없다. 이 작품에서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범인에게 다가간다. 애초 지목했던 이가 범인이 아님이 밝혀질 때는 충격과 당혹감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이유현 역시 왓슨과는 다르게 사건에 보다 깊이 관여하며, 고진의 추리를 현장에서 뒷받침하고 또한 증명해낸다. 그리고 때때로 고진과 충돌하며 그만의 추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화끈한 성격이, 왓슨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형 탐정의 부활을 알리는 ‘어둠의 변호사’ 첫 번째 사건의 배경은 ‘붉은 집’이다. 서울 외곽 우면산 기슭에 위치한 붉은 집. 그 곳에는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두 집안이 있다. 퇴역 장성 서태황 일가가 살고 있는 1층, 그리고 은퇴한 서울대 교수 남성룡 일가가 살고 있는 2층이다.

 

남성룡의 여동생 남광자의 의뢰를 받고 집을 방문한 고진. 하지만 처음 의뢰인이 꺼낸 이야기는 단순한 유산 문제였다. 이내 흥미를 잃은 고진은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곧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두 집안을 관통하고 있는 끔찍한 과거사. 그리고 고진은 곧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허황되고 엽기적인 이야기들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정작 정통 추리소설 본연의 미학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들이 즐비 하는 가운데, 고진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범인의 치밀한 트릭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고, 여기에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파헤쳐 끝내 범죄를 재구성하는 솜씨는 여간이 아니다. 한마디로 ‘납득’이 되는 성실한 추리소설!

 

저자는 법조인이라는 출신에 걸맞게 논리적이고 명확한 근거로 사건을 풀어내며,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본성을 표현하며 작품의 개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고진이라는 주인공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고진은 선과 악의 그림자를 모두 가지고 있는 ‘지킬과 하이드’ 그 자체인 것이다.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 중, 사법부의 공정성, 정의, 평등의 원칙을 신뢰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김용판 무죄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어느 새 체념하는 모습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만 명이 평등할 뿐이다.

 

영화 〈변호인〉이 많은 관객들을 울리고,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삼성과 거대 극장사들의 치졸한 모습에 분개하는 것도, 결국 이 땅에 평등과 정의가 사라졌음을 애도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뭐, 그렇다고 누구처럼 아예 좌절하거나, 체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출세와 생존이라는 과제 앞에 자유로울 법조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은 들지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에 대한 최근 판결과 같이 가끔은 정상적인 법조인도 존재함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용기를 얻고, 국민들의 응원으로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어떨까.

 

안다. 정치가 기업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대학이 기업이 주문하는 직원 양성소가 되고, 언론과 방송이 허접 쓰레기 같은 연예인 뒷공론이나 주절거리며 국민들의 머릿속을 죄다 공허하게 만들고 있음을. 그리고 점점 더 썩어가는 지구 앞에서, 오히려 더 파괴하고 더 소비해야 행복하다고 떠드는 기업의 노예, 하수인들이 전문가, 학자라고 떠들어대고 있음을. ‘무슨 무슨 심리학’ ‘긍정의 무엇 무엇’ 등으로 온갖 돈과 명예를 수거해가며,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세상이나 사회 구조가 아닌 바로 당신의 탓!’이라고 협박하는 작자들이, 행복의 전도사로 설치고, 그 덕분에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음을.

 

그렇게만 보면 이 망할 사회가, 세상이, 당장 내일 무너져도 전혀! 이상치 않다. 오히려 하루 빨리 멸망해야 한다. 이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돼지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돼지가 아니기에, 여전히 희망은 남는다. 공감과 연대의 본능이 여전히 남아 펄펄 숨 쉬고 있기에 희망은 유효하다. 그 희망을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는 것이 어떨까. 그냥 처박혀 울분을 토하거나 18!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살짝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작품 속 고진은 정의의 심판을 본인 스스로 내려버린다. 한계가 명백한 법과 제도 대신, 자신의 악마적인 두뇌로 범인을 응징한다. 많은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현재, 고진과 같은 행동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 있다. 터질 것 같아 보인다.

 

이쯤에서 다시. 로스쿨 제도를 만들어낸 참여정부의 한심함이 치명적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사법권력 세습, 법조권력 세습을 현실로 이뤄낸 그들이, 참 안타깝다.

 

에혀….

 

이 작품 이후 난 도진기 작가의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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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의 미스터리 북
이상우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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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구지책 중 하나인 잡지 제작을 하다, 파리(Paris)를 주제로 ‘포토 에세이’를 꾸미게 되었다. 전 직장 선배가 최근 유럽을 다녀왔는데, 함께 담아온 풍경을 싣기로 한 것.

 

사실 파리처럼 유명한 도시를 주제로 잡지의 한 꼭지를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다녀온 곳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많은 프로 작가들이 이미 작품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럴 땐 사람들에게 낯선 그 어딘가가 더 편하다. 그만큼 부담이 덜 하니까. 분명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만, 그래도 짐짓 허풍과 살짝의 ‘구라’도 가능하다.

 

선배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예술과 패션의 도시’ 파리로 방향을 잡으면, 그다지 폼이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헌데, 이 선배에겐 나름의 ‘컨셉’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안과 응원 그리고 희망’이었다.

 

파리라는 도시를 단순히 겉으로만 바라본다면, 자존심 센 파리지앵 그리고 수많은 유명 건축물들, 세계 패션의 중심,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똘레랑스’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그리고 시간의 결을 바라본다면, 파리는 단순한 패션의 중심도시, 예술의 도시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에펠탑’을 보자. 당시 ‘철골 덩어리 흉물’이란 비난을 받았던 이 탑은,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세워졌다.

 

39만 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어떤가. 그 중 고작 10분의 1도 되지 않는 3만 5천점을 전시하고 있지만, 요놈들만 다 보려 해도, 60킬로미터의 동선을 15시간에 걸쳐 걸어야 하는, 이 넓디넓은 곳은 본디 왕궁이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왕의 궁전’은 역시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인민의 공동재산’으로 명의이전이 이뤄지게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단순히 큰 박물관이 아닌 프랑스 ‘문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전당인 것이다.

 

이렇듯, 파리를 상징하는 수많은 건축물들은 저마다 ‘피와 투쟁’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뿐 만 이랴, 지금도 파리는 하루 평균 3건 이상의 시위가 벌어지는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현장’이 아닌가.

 

선배는 파리를 통해, 서울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공화정은 단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처형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내전과, 구체제를 지키려 하는 유럽 왕정국가들의 도전을 이겨내며, ‘100년’에 걸쳐 이룬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프랑스를 보며, 수많은 어처구니들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오늘에 너무 비관하지 말자는 것. 우리의 피와 눈물이 담겨 있는 ‘민주주의’가,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역시, 언젠가 기필코 이뤄낼 역사의 진보 앞에 ‘잠시’일 뿐이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파리는, 더욱 더 그리울 수밖에 없다.

 

아니, 당최 ‘미스터리’ 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왜 생뚱맞게 프랑스 혁명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요상하게 바라보시는 분들 계시겠다. ‘내 맘이야!’가 아니라, 지난여름 읽었던 이 책이, 파리와 연결되며 나에게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시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은 한국 추리소설계의 원로이자,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우 작가가, 정통 추리물의 재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단편들과 추리소설 장르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글을 묶은 것이다. ‘세계의 명탐정 21인’을 담아, 독자들에게 유명 작가의 주인공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추리소설의 역사와, 이 장르가 여전히 탄탄한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를 나름의 시대적 근거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근면성이 돋보이는 책임엔 분명하다.

 

그런데, 왜 난 갑자기, 파리와 이 책을, 민주주의와 추리소설을 연결시키게 되었을까. 사실 내가 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우 작가의 글이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에서 다시금 의미심장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발달과 추리소설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달되기 전에는 과학적인 수사라는 것이 없었으며, 무고한 사람이 처벌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태어난 추리 소설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나치 독일과 파시즘 이탈리아는 이런 추리소설이 권력자의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추리소설 말살 정책을 썼다.

 

야만적인 정부와 무능한 경찰을 비웃어주듯 명쾌하게 범인을 검거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탐정의 활약을 그리는, 이 독특한 장르의 문학이 19세기의 민중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문학이요, 오락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기조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추리소설은 사회가 요구하는 문학이요, 오락으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다.”

 

이해가 차츰 가능해졌다. 내가 왜 유독 2013년, 추리소설․미스터리 장르에 심취했는지, 왜 MB정권 내내 〈CSI〉〈크리미널 마인드〉와 같은 범죄 수사물을 끼고 살았는지.

 

왜 나름대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자부하는 국가들, 그리고 거꾸로 겉은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 많은 국민들이 사회 정의에 목말라 하는 국가들에서 ‘명탐정’들이 많이 탄생하고, 또 형사물, 스릴러가 인기를 얻고 있는지,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실 이렇다 할 명탐정이나 멋진 경찰, 형사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장 떠올려보면, 〈공공의 적〉강철중 형사 정도? 또한 여전히 추리․미스터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못하다. 적어도 점잔을 떨며 고상한 순수문학을 운운하는 이들에겐 그렇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혹은 그 반동기를 겪으며, 조금은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구․일본 등 유명 작가의 미스터리물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고, 국내에서도 실력 있는 추리 작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글쎄, 아직은 무어라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느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사회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어떻게 뒤틀리고, 기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현 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친다. 이런 정부의 구호가, 왜 공허하게 들리는지, 아마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으리라.

 

소설과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음모와 비리, 부패와 범죄가 지극히 평범하게 ‘현실’로 다가오는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아르센 뤼팽과 같은 불멸의 캐릭터가 탄생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고독한 남자, 필립 말로나….

 

너무 비약이고, 또한 별 상관없는 주제들을 끼워 맞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어쩔 수 없이 파리와 미스터리․추리소설을 연결시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추리소설, 미스터리는 나의 ‘즐겨찾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부디 이것이 사회적 현상이 아닌, 순수한 ‘개인적 취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 생각해보니 우리도 멋진 캐릭터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구나. 홍길동, 전우치, 임꺽정 등이 있지 않은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 맞겠지?

 

아무튼 참 다양한 생각을 뒤늦게까지 하게 해준 책이다. 즐거운 추억 여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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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사토 세이난 지음, 이하윤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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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고, 알보다 조금 더 큰 이들도 대충 파악했을 텐데. 그렇다. 난 겁이 무척 많은 녀석이다. 그리고 그만큼 눈물도 참 많다. 남자에게 눈물이 많다는 것은, 비록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만한 사유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닐만한 일도 물론, 아니다.

 

드라마를 보다 훌쩍거리고, 영화를 보며 징징 짜고, 책을 읽다가도 울컥하고. 암튼 참 실없는 녀석이다. 뭐 가끔은 울어주는 것이 정신 및 신체건강에 좋다고는 하더만. 그럼에도 창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을 쉽게 초과하니 말이다.

 

나를 사정없이 울컥하게 만드는 것 하나가 바로 ‘아이들’이다. 특히 딸아이를 얻고 난 뒤부터는 더 그런 것 같은데, 어린 아이들이 서럽게 울고 있거나, 혹은 애처로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볼 때면 참기가 힘들다. 난처하게 속상하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사회의 무관심과 어른들의 삐뚤어진 생각으로 학대받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잃게 되는 일들을 볼 때면, 정말 참담하고, 또 분노가 치솟는다. 모든 범죄가 나쁘겠지만, 특히 어린이 유괴에 내가 더욱 분노하는 이유다.

 

굳이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강조하지 않으시더라도, 지금 우리 시대가 과거 전쟁과 분단, 가난을 이겨내야 했던 때에 비해 차원이 다르게 살기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게 살아가는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다.

 

아이들은 언제나 해맑고 순수하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대한민국에서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미친’ 무한경쟁의 틈바구니로 빨려 들어가는 아이들은 곧, 웃음과 꿈을 잃어버린다. 그리곤 왜 그런지도 모른 채,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벗들을 경쟁자로 ‘재정의’하며 살아간다. 이게 비극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비극일까.

 

단언컨대 아이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공동체의 미래는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이들이 더 웃을 수 있도록, 더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다해 고민하고 또 바라보고, 사랑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니까.

 

사토 세이난의 이 작품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하다. 아동학대, 폭력이 가져오는 파멸적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철저한 배신, 그리고 가장 즐겁고 편안한 곳이 되어야 하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폭력의 기억은 피해자를 또 다른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제 식상할 정도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학대나 방치의 경험이 있는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면 훗날 자신의 아이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범죄와 비극을 초래한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유년시절을 살펴봐도, 100%라 할 수는 없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다. 부모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방치의 경험을 겪은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를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기 힘들다. 오히려 증오와 불신의 눈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다.

 

폭력의 악순환은 오늘 이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매년 수많은 아이들이 폭력과 무관심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안고 자라난 아이들은 또 다시 폭력을 되물림하며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비극이다.

 

작품은 10년 전 일어났던 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하고, 거듭되는 반전으로 결말을 섣불리 예상할 수 없도록 만든다. 뛰어난 능력이다.

 

하지만 작품은 뛰어난 미스터리로서의 재미와 함께 한없이 무거운 주제를 던지고 있다. 학대받는 한 소녀를 구해내기 위해 우리 사회는, 우리 이웃은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허술하기만 한 법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학대받는 소녀의 ‘눈’을 우리는 과연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슬프고도 충격적인 결말과 함께 책을 덮은 후, 다시 한 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물론 일본의 작가가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아이들에게 소금밥을 먹이고, 학대하고 방치해 끝내 숨을 거두게 한 사건들이 여전히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우리 모두가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오직 경쟁이라는 단 하나의 룰에 아이들을 가두어, 아이들의 소중하고 아름다워야 할 시간들을 잔인하게 ‘유예’시키는 우리는,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아동학대, 인권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체적 학대만이 학대가 아님을,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가 더 무섭고 끔찍함을,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따르는 사람 중에 나쁜 놈은 없어. 아무리 외면을 꾸며도 아이들은 전부 알아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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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 스토리콜렉터 10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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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게으름으로 인해 덕을 볼 때가 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대표작이 되어 버린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기 전에 작가의 ‘타우누스 시리즈’ 첫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이든 순서대로 해야만 속이 편안한, 별 도움이 안 되는 성격도 가끔은 쓸모가 있다(그렇다고 플랜맨 수준은 아니다. 원체 게을러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이어 노이하우스의 다른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올 땐, 솔직히 작가나 작품을 알지 못했다. 무엇에 정신을 쏟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또 다시 ‘추세’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다 한 여름(이 책을 읽을 당시는 2013년, 무려 더운 여름이었다), 어느 날 밤, 무심코 작품을 펼쳤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 작품을 말이다. 《사라진 소녀들》을 통해 독일 스릴러 작품을 접한 후 두 번째 ‘독일’과의 만남이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양면성과 추악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으로 높은 평가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굳이 사이코패스나 잔혹무도, 극악해괴, 기상천외한 살인마가 출연하지 않더라도, 스릴러의 정석을 충실히 따르며 쏠쏠한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다는 극찬도 곁들인다. 아마도 수많은 독자들이 작가의 ‘타우누스 시리즈’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독일의 지방 마인-타우누스 지역의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반. 반장인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과 이혼 후 복직한 여형사 피아 키르히호프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부장검사 요아힘 하르덴바흐의 자살 사건을 조사한다(누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 ‘대쪽 같다’고 하면 어쩐지 우습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전망대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장검사의 자살로 매스컴이 떠들썩한 와중에 두 번째 사망자인 이자벨 케르스트너에 대한 조사를 하던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곧 이 사건이 단순한 자살이나 치정 살인이 아닌 복잡한 음모의 시작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범인과의 두뇌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품은 독일의 한적한 지방 마을을 배경으로 지극히 ‘현실적으로’ 펼쳐진다.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한 사이코 범죄자나, 역시 동물 같은 직감으로 범죄의 흔적을 추적하는 셜록 홈즈와 같은 형사는 없다. 다만 부지런히 발로 뛰고, 수많은 용의자들을 대상으로 심문과 탐문을 반복하는 평범한 형사가 있을 뿐이다.

 

범인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다. 당장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이들도, 언제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조금 더 욕망적이고 조금 더 비인간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우리는 그들과 크게 다를까?

 

지극히 현실적인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사소함을 따라가는 것이 작품의 재미를 안겨주는 주요 요소이다. 조금 긴 미드를 보는 기분이랄까.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왜 한 순간 살인자로 돌변할 수 있는지, 그 내막을 확인하는 순간, 독자들은 충격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조금 어설퍼 보이기까지 하는 범인과 형사. 하지만 이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적절히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는 절대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저자가 자비를 들여 출판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절박함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 선택은 훌륭했다고 할 수 있겠다. 때로는 그런 무모함도 필요하지.

 

2014년의 첫 서평 임에도, 2013년 목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나의 게으름을 비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줄서 있다. 하지만, 어쩌랴. 서평마저도 순서대로 빠뜨리지 않고 써야만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이상한 놈이니.

 

그런데 정말 우연치고는 희한하다. 2013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이었다. 그리고 올 해 첫 서평이 《사랑받지 못한 여자》다. 감이 오시는가? 나에겐 참으로 행복하고도 가슴 아팠던 2013년을 뜨겁게! 안녕하고. 그렇게 맞이한 새해인데, 나는 ‘사랑받지 못한 여자’ 때문에 여전히 답답하고 안타깝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불행하다. 특히 그 여성이 아주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면 말이다. 이건 여성 비하적인 발언이 아니다. 지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한 여자 때문에, 역시 많은 이들이 불행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이하우스의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늘 비극은 헛된 욕망과 질투, 독단, 자기기만에서 시작된다. 타인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비극은 이제 더 이상 없어야 하지 않을까.

 

아기자기한 맛과, 때로는 어릴 적 《수사반장》을 떠오르게 하는 노이하우스의 작품이 좋다. 이후 순서에 맞춰 작품들을 읽어 나갔다. 아직 전부를 읽지 않았지만, 곧 백설공주에게 당도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언제 2013년을 졸업할 수 있을까.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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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사람 1 이타카
이수영 지음, Song, won seo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다. 특별히 싫어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별로 읽을 기회가 없었던 듯. 옛 추억이 돋아나는 만화방들을 이제 찾기 힘든 것처럼, 마음먹고 찾지 않는 이상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들도 가까이 접하긴 힘들었지 않았나 싶다. 뭐 결론적으로 내가 게을러서 그랬다는 소리.

 

작가에 대한 사전의 정보나 지식이 없었다. 성별로 솔직히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서평들을 보았을 때, 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 와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니 어쩐지 여성일 것 같다는 심증이 팍팍 들기도 한다.

 

마약에 의지한 채 그저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노예 검투사 214번. 그는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지금 차디찬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사육되며,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치러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삶에 대한 강한 의문, 자유에 대한 목마름으로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도주 중 잘못 찾아 들어간 숲에서 야수 오쿠거를 만나게 된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인 214번과 오쿠거. 하지만 신은 공평하게도(!)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거두어가기 보다는, 딱 절반씩만을 가져가는데.

 

반인반수의 괴물을 떠오르게 만드는 214번의 모습. 그의 반은 야수 오쿠거가 차지하고 있다. 책의 표지를 보면 1권에서는 반쪽인 214번의 모습이, 2권에서는 역시 반쪽인 오쿠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 전혀 다른 생김새와 영혼을 가진 이들의 기묘한 동거. 이들은 서로를 죽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는 묘한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214번은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작품은 판타지 소설답게 전투와 마법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사와 신관, 여러 신들이 등장하며 작품의 배경을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한편 주인공 214번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여사제 키나는 그와 함께 죽음의 신을 모시며, 영혼을 빼앗긴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여정을 함께 한다.

 

작품을 통해 저자의 내공이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하이텔 판타지 동호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력을 살펴보면 수긍이 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의는 이 작품을 단순한 판타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기분 좋은 불편함을 선사한다. 누구나 눈앞의 달콤함에 현실을 잊고 결국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주인공 214번의 삶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 것은 전쟁이란 재난 때문이었다. 그가 끝까지 완전히 기억해 내지 못한 과거에는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통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읽는 이에게 또렷이 전달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선과 악, 죽음과 삶, 적과 동지. 어찌 보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구별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 정말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피해야만 할 죽음이며, 무엇이 기어이 살아내야 할 삶인지, 도무지, 지금도 제대로 모르겠다.

 

작품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스스로 삶을 움켜쥐고 나아가려는 214번의 처절한 분투가 담겨져 있다. 그의 치열한 여정을 함께 하며, 문득 지금의 나와, 지금의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얼마 전 화제가 된 대학생들의 ‘당신은 지금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떠오른다. 이처럼 이상한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안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14번처럼 단지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닐까. 외면과 비겁함, 두려움이라는 강한 적 앞에 무릎 꿇고, 찰나의 쾌락과 안전이라는 마약에 취해, 진정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외면하고, 혹은 스스로 죽여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은, 공평한 죽음, 공평한 삶을 누릴 권리를 온전히 가지고 있을까. 온전히 사람이 아닌, 오직 돈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살아있는 것일까. 안녕한 것일까.

 

214번과 키나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 데스가움의 사제가 되어 영혼을 잃어버린 괴물들을 다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해야 한다는 키나의 말은 나에게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 공평한 죽음. 과연 이 시대에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도대체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회자될지 두렵기까지 한 2013년이 저물어 간다.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무더위가 작렬하던 7월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춥다. 몸도 마음도.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면, 삶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기계적인 평등이나 억압적인 획일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주도권,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돈, 황금, 권력에 넘겨주고 말았다. 영혼마저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때문에 당장 철도노조 파업으로 인해 회사에 지각하는 것이, 철도가 민영화되어 우리의 권리가 날아가는 것보다 더 짜증나고 피곤하다. 노동자가 6000여 명이 잘리던, 그들의 생계가 당장 나락으로 떨어지던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인간이라면 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할, 자신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214번 만큼, 아니 더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슴 찔리고, 조금 아프지만, 꼭 필요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시대는 작품에 등장하는 악마나 좀비,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그 괴물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하지 않으면 없앨 수 없다. 그래서 214번과 오쿠거처럼, 우리는 한 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식과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이라는 한 몸.

 

괜찮은 작품이다. 다음 작품이 기대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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