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 1 이타카
이수영 지음, Song, won seo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다. 특별히 싫어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별로 읽을 기회가 없었던 듯. 옛 추억이 돋아나는 만화방들을 이제 찾기 힘든 것처럼, 마음먹고 찾지 않는 이상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들도 가까이 접하긴 힘들었지 않았나 싶다. 뭐 결론적으로 내가 게을러서 그랬다는 소리.

 

작가에 대한 사전의 정보나 지식이 없었다. 성별로 솔직히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서평들을 보았을 때, 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 와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니 어쩐지 여성일 것 같다는 심증이 팍팍 들기도 한다.

 

마약에 의지한 채 그저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노예 검투사 214번. 그는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지금 차디찬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사육되며,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치러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삶에 대한 강한 의문, 자유에 대한 목마름으로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도주 중 잘못 찾아 들어간 숲에서 야수 오쿠거를 만나게 된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인 214번과 오쿠거. 하지만 신은 공평하게도(!)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거두어가기 보다는, 딱 절반씩만을 가져가는데.

 

반인반수의 괴물을 떠오르게 만드는 214번의 모습. 그의 반은 야수 오쿠거가 차지하고 있다. 책의 표지를 보면 1권에서는 반쪽인 214번의 모습이, 2권에서는 역시 반쪽인 오쿠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 전혀 다른 생김새와 영혼을 가진 이들의 기묘한 동거. 이들은 서로를 죽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는 묘한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214번은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작품은 판타지 소설답게 전투와 마법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사와 신관, 여러 신들이 등장하며 작품의 배경을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한편 주인공 214번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여사제 키나는 그와 함께 죽음의 신을 모시며, 영혼을 빼앗긴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여정을 함께 한다.

 

작품을 통해 저자의 내공이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하이텔 판타지 동호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력을 살펴보면 수긍이 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의는 이 작품을 단순한 판타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기분 좋은 불편함을 선사한다. 누구나 눈앞의 달콤함에 현실을 잊고 결국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주인공 214번의 삶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 것은 전쟁이란 재난 때문이었다. 그가 끝까지 완전히 기억해 내지 못한 과거에는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통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읽는 이에게 또렷이 전달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선과 악, 죽음과 삶, 적과 동지. 어찌 보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구별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 정말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피해야만 할 죽음이며, 무엇이 기어이 살아내야 할 삶인지, 도무지, 지금도 제대로 모르겠다.

 

작품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스스로 삶을 움켜쥐고 나아가려는 214번의 처절한 분투가 담겨져 있다. 그의 치열한 여정을 함께 하며, 문득 지금의 나와, 지금의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얼마 전 화제가 된 대학생들의 ‘당신은 지금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떠오른다. 이처럼 이상한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안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14번처럼 단지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닐까. 외면과 비겁함, 두려움이라는 강한 적 앞에 무릎 꿇고, 찰나의 쾌락과 안전이라는 마약에 취해, 진정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외면하고, 혹은 스스로 죽여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은, 공평한 죽음, 공평한 삶을 누릴 권리를 온전히 가지고 있을까. 온전히 사람이 아닌, 오직 돈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살아있는 것일까. 안녕한 것일까.

 

214번과 키나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 데스가움의 사제가 되어 영혼을 잃어버린 괴물들을 다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해야 한다는 키나의 말은 나에게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 공평한 죽음. 과연 이 시대에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도대체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회자될지 두렵기까지 한 2013년이 저물어 간다.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무더위가 작렬하던 7월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춥다. 몸도 마음도.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면, 삶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기계적인 평등이나 억압적인 획일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주도권,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돈, 황금, 권력에 넘겨주고 말았다. 영혼마저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때문에 당장 철도노조 파업으로 인해 회사에 지각하는 것이, 철도가 민영화되어 우리의 권리가 날아가는 것보다 더 짜증나고 피곤하다. 노동자가 6000여 명이 잘리던, 그들의 생계가 당장 나락으로 떨어지던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인간이라면 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할, 자신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214번 만큼, 아니 더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슴 찔리고, 조금 아프지만, 꼭 필요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시대는 작품에 등장하는 악마나 좀비,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그 괴물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하지 않으면 없앨 수 없다. 그래서 214번과 오쿠거처럼, 우리는 한 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식과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이라는 한 몸.

 

괜찮은 작품이다. 다음 작품이 기대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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