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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ㅣ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평소 정치적 관점이나 인격적인 면의 호불호를 떠나 ‘근면함’ 하나 만큼은 정말 배워야 한다고 인정해마지 않는(!) 조갑제 선생께서 최근 영화 〈변호인〉에 대한 국민적 인기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또 그만의 근면함을 돋보이게 하는 책을 내셨다. 바로 《악마의 변호인 - 부림사건 변호인은 왜 악마 김정일의 변호인이 될 수밖에 없었나》이다.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다시 태어난 노무현을, 순식간에 ‘악마의 변호인’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독창성에 다시 한 번 지겨운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를 보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진실과 상식도 어떤 이들에겐 왜곡과 불의로 비쳐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부디 만수무강하셔서 더욱 더 기발하고 독창적인 책으로 자연 파괴와 역사 왜곡, 한반도 분단과 미국 패권 유지에 앞장서시길.
자, 책 이야기를 하자. 2013년 7월 말 만난 이 책은 순수! 정통! 한국형! 본격! 추리소설의 부활을 알리는 반가운 작품이다. 2010년 세상에 나온 책이니, 뒤늦게 만난 셈인데, ‘아니,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었음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라는 한탄을 절로 하게 만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현직 판사다. 아마 법조인으로서의 지식과 함께 평소 직업을 통해 얻게 된 다양한 경험과 사건들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가 무려(!) 대한민국에서 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느꼈을, ‘법과 정의의 한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멸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듯하다.
‘어둠의 변호사’로 불리는 사나이 고진. 그는 판사로 5년을 재직하던 중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떠나, 변호사 사무실도 개업하지 않은 채, 오로지 ‘뒷길’에서 들어오는 의뢰만을 맡아 자문과 해결을 해주는, 또 다른 세계의 해결사다. 그가 왜 갑자기 판사직을 그만 두게 되었는지, 또 왜 ‘어둠’속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는지는 이 작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차츰 그의 정체가 밝혀지리라 예상된다.
이런 독특한 이력의 남자 고진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인물이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이유현이다. 경찰대학 출신임에도 유독 현장 근무를 선호해 강력계 형사로 출발해 팀장까지 오른 그는, 말 그대로 ‘현장’ 스타일의 열혈 형사다. 사건이든 범인이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기에 ‘핏불 테리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며, 자연스레 콤비가 되어버린다. 어떤 점에서는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도 하는 콤비다. 하지만 홈즈와 왓슨 콤비와 이들과의 차별성은 분명해 보인다.
먼저 이들은 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다. 홈즈 선생은 그야말로 ‘앉아서’ 대부분의 사건을 풀어낸다. 100%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뢰인의 등장과 그의 이야기만으로 사건의 거의 절반을 풀어낸다. 솔직히 점쟁이 수준이다.
하지만 고진은 다르다. 그 역시 명석한 두뇌로 사건을 파헤치는 스타일이지만, 단 한 번에 범인을 지목하는 능력 따위는 없다. 이 작품에서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범인에게 다가간다. 애초 지목했던 이가 범인이 아님이 밝혀질 때는 충격과 당혹감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이유현 역시 왓슨과는 다르게 사건에 보다 깊이 관여하며, 고진의 추리를 현장에서 뒷받침하고 또한 증명해낸다. 그리고 때때로 고진과 충돌하며 그만의 추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화끈한 성격이, 왓슨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형 탐정의 부활을 알리는 ‘어둠의 변호사’ 첫 번째 사건의 배경은 ‘붉은 집’이다. 서울 외곽 우면산 기슭에 위치한 붉은 집. 그 곳에는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두 집안이 있다. 퇴역 장성 서태황 일가가 살고 있는 1층, 그리고 은퇴한 서울대 교수 남성룡 일가가 살고 있는 2층이다.
남성룡의 여동생 남광자의 의뢰를 받고 집을 방문한 고진. 하지만 처음 의뢰인이 꺼낸 이야기는 단순한 유산 문제였다. 이내 흥미를 잃은 고진은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곧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두 집안을 관통하고 있는 끔찍한 과거사. 그리고 고진은 곧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허황되고 엽기적인 이야기들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정작 정통 추리소설 본연의 미학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들이 즐비 하는 가운데, 고진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범인의 치밀한 트릭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고, 여기에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파헤쳐 끝내 범죄를 재구성하는 솜씨는 여간이 아니다. 한마디로 ‘납득’이 되는 성실한 추리소설!
저자는 법조인이라는 출신에 걸맞게 논리적이고 명확한 근거로 사건을 풀어내며,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본성을 표현하며 작품의 개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고진이라는 주인공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고진은 선과 악의 그림자를 모두 가지고 있는 ‘지킬과 하이드’ 그 자체인 것이다.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 중, 사법부의 공정성, 정의, 평등의 원칙을 신뢰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김용판 무죄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어느 새 체념하는 모습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만 명이 평등할 뿐이다.
영화 〈변호인〉이 많은 관객들을 울리고,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삼성과 거대 극장사들의 치졸한 모습에 분개하는 것도, 결국 이 땅에 평등과 정의가 사라졌음을 애도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뭐, 그렇다고 누구처럼 아예 좌절하거나, 체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출세와 생존이라는 과제 앞에 자유로울 법조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은 들지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에 대한 최근 판결과 같이 가끔은 정상적인 법조인도 존재함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용기를 얻고, 국민들의 응원으로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어떨까.
안다. 정치가 기업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대학이 기업이 주문하는 직원 양성소가 되고, 언론과 방송이 허접 쓰레기 같은 연예인 뒷공론이나 주절거리며 국민들의 머릿속을 죄다 공허하게 만들고 있음을. 그리고 점점 더 썩어가는 지구 앞에서, 오히려 더 파괴하고 더 소비해야 행복하다고 떠드는 기업의 노예, 하수인들이 전문가, 학자라고 떠들어대고 있음을. ‘무슨 무슨 심리학’ ‘긍정의 무엇 무엇’ 등으로 온갖 돈과 명예를 수거해가며,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세상이나 사회 구조가 아닌 바로 당신의 탓!’이라고 협박하는 작자들이, 행복의 전도사로 설치고, 그 덕분에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음을.
그렇게만 보면 이 망할 사회가, 세상이, 당장 내일 무너져도 전혀! 이상치 않다. 오히려 하루 빨리 멸망해야 한다. 이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돼지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돼지가 아니기에, 여전히 희망은 남는다. 공감과 연대의 본능이 여전히 남아 펄펄 숨 쉬고 있기에 희망은 유효하다. 그 희망을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는 것이 어떨까. 그냥 처박혀 울분을 토하거나 18!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살짝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작품 속 고진은 정의의 심판을 본인 스스로 내려버린다. 한계가 명백한 법과 제도 대신, 자신의 악마적인 두뇌로 범인을 응징한다. 많은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현재, 고진과 같은 행동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 있다. 터질 것 같아 보인다.
이쯤에서 다시. 로스쿨 제도를 만들어낸 참여정부의 한심함이 치명적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사법권력 세습, 법조권력 세습을 현실로 이뤄낸 그들이, 참 안타깝다.
에혀….
이 작품 이후 난 도진기 작가의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