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확 대실 해밋 전집 1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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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학창시절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건방지게도 한 번 읽은 책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읽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교과서를 2~3번씩 줄쳐가며 읽어야 했던 ‘고통의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후 생각해보면 기사나 여타 글을 쓸 때, 객관적 자료의 인용이나 특정인의 발언을 확인하기 위해 들춰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번 읽었다고 책의 내용이 전부 기억날 리는 만무하고. 생각해보면 그리 좋은 버릇은 아니다.

 

반면 때 늦은 서평을 쓰며, 어쩔 수 없이 두 번씩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책의 내용이 가물거리거나 반드시 소개하고 싶은 구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나도 별 수 없다. 다시 뒤적거리면서, 결국은 한 권을 통째로 다시 읽어버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붉은 수확]은 조금 다르다. 역시 두 번 읽긴 했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난여름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까칠하면서도 유머를 즐길 줄 아는 탐정 ‘나’의 말투가 너무나 그리워서, ‘포이즌빌’의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또 다시 내 머리를 흔들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대실 해밋은 미국 추리소설의 아버지, 미국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또한 역시 미국 추리소설의 대부인 레이먼드 챈들러가 극찬한 거장 중의 거장이기도 하다. 하드보일드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실 해밋. 그의 첫 작품이 바로 [붉은 수확]이다.

 

스스로 귀가 얇기도 하지만, 대실 해밋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일맥상통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이라는 점, 그리고 한 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출 수 없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100% 사실이었다.

 

1920년대 후반, 금주법과 시카고, 알카포네의 시대로 기억되는 그 때. 일명 ‘포이즌 빌’이라 불리는 도시 퍼슨빌에 도착한 탐정 ‘나’. 하지만 그를 초대한 의뢰인은 만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살인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점점 드러나는 퍼슨빌의 실체에 ‘나’는 당혹해 한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곧 퍼슨빌의 어두운 세계와 전면전을 선포한다. 자신을 환영해주지 않은 이 회색 도시에 그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보답하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음모와 살인 속에 왜 이 도시가 ‘포이즌빌’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나’는 느끼게 된다.

 

[붉은 수확]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음모와 배신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출판사의 요구에 의해 저자가 원작에서 폭력적 장면을 몇 차례 수정하여 넘긴 것이라 하니, 원작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 폼 잡지 않고, 또 건들거리며 구구절절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까칠함으로 상대를 당혹케 하거나, 혹은 다가오게 만드는 남자. ‘적당히’ 타협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남자.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받은 만큼 반드시 되돌려주는 남자. 대실 해밋이 창조한 ‘나’는 하드보일드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평가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쿨하고, 또한 독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연상되면서도, 동시에 대실만의 개성이 한껏 드러나기도 한다.

 

바바리에 중절모, 눈을 반쯤 가린 채 담배를 입에 물며, 회색빛 하늘을 등지고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 지켜야 할 것이 적기에 그만큼 더 많이 걸 수 있는 남자. 어설픈 동정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남자.

 

어쩜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남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지 모른다. 어설픈 마초나 시대착오적인 아저씨로 찍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대실의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미 잃어버린 남자들의 대책 없는 호기, 당당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어쩌면 이 시대 많은 남자들에게, 그리고 그런 올드맨을 기억하는 여성들에게 대실 해밋의 작품은 귀중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남자다움. 참 오해받기 쉬운 단어다. 당장 남녀차별적인,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라 비난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찌질한 시대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남자다움이란 인공호흡기, 방독면과도 같다. 그리고 진짜 남자다움이란 어설픈 마초와 근본부터 다르다. 끝까지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허세 속에 알맹이가 떡하니 들어 있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약자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불의 앞에서 쪼그라들지 않고, 쿨하게 맞짱 뜰 줄 아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온갖 추잡한 술수와 사기, 음모와 배신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사회에서 남자다운 인간은 찾아보기 정말 힘들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남자다운 여성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하다. 존경하고 싶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이들 중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 외출복 많은 분 빼고. 체르노빌하고 영변 스케일도 구별 못하는 분 빼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고 짓밟고 모욕하는 것들이, 사회의 지도층이라 떠드는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국민을 우롱하고, 국민을 바보로 여기며 철지난 공작이나 일삼으며 기생하는 것들에겐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인과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 모두 ‘포이즌빌’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이 망한 놈의 도시 때문에 정말 환장하겠어. 얼른 벗어나지 않으면 나도 여기 인간들처럼 피도 눈물도 말라 버릴 거야. (…) 여기서는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어. 처음부터 함정에 빠진 거야. (…) 이 망할 놈의 도시 때문이야. 포이즌빌이 맞아. 독의 도시라고. 날 독에 중독 시켰어.”

 

정치를 놀음으로 만드는 이들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윽박지르는 세상. 나도 [붉은 수확]의 ‘나’처럼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왕이면 쿨하고 멋지게 말이다.

 

“때로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가다가는 휘저어 놓는 것도 좋거든. 그러자면 두 눈을 크게 뜨고 살아남을 만큼 강해야겠지. 그래야 절정에 이르렀을 때 원하던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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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아빠 육아스쿨
아민 A. 브롯 지음, 김세경 옮김 / 황소자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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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핑계대고 미루고 미루다 종합검진을 받았다. 귀찮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고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뭐, 그냥 그랬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는 결과를 받았다.

 

역시 뭐, 별 다른 것은 없어보였다. 몸무게야 원래 바싹 말랐고, 이른바 헤비 스모커에 해당하는 놈이니 폐활량이나 위가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에 새로운 문장이 와서 박혔다. 대장암 표지자 수치….

 

이건 무슨 뜻이냐. 첨엔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으라는 전화를 받고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음,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2013년 3월 27일, 새 생명을 얻었다. 과분한 행복, 상상치 못한 기쁨이 다가왔다. 나를 보며 꺄르르 웃어버리는 또 하나의 생명 앞에서,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다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아빠였을까.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아빠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었던가. 갑자기 찾아온 대장암이라는 녀석 앞에 난 그렇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만약 내가 정말 암이라면 이제 첫 돌을 맞는 딸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난감하고 무참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다. 아빠라는 이름이 그저 출산이라는 결과만, 주어진 대로 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 누구나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착각이었다. 무지의 극치였다. 아빠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든 책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육아로 인해 삶의 방식이 바뀌어버린 아내에 비해 나는 아빠를 거부하고 여전히 ‘나’로 살아가려 했다. 때문에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그저 ‘나’로 살아가길 무심결에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희생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을 태산 같이 여겼다. 아이에게 살갑게 다가가고 웃어 보이면 그것이 ‘아빠’라고 생각했다. 그저 얼마 되지도 않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는 부모라고 믿어버렸다.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고, 오만이었음을 암이라는 녀석이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 책을 펼쳐들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자는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피아노를 샀다고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가졌다고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 나는 이처럼 단순한 진리를 몰랐을까, 아니 거부하려 했을까. 아이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 다가가야 함을. 내 삶을 송두리째 걸고 다가가야 할 순간도 있음을, 왜 몰랐을까.

 

당연하게도 그 어떤 것들도 눈에, 귀에,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다. 정의도, 진리도, 상식과 불의도, 그저 먼발치에서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깨달았다. 내가 온전한 ‘나’이길 원한다면, 이제 다시 ‘아빠’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닌, 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신이라는 존재가 분명 있다면,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셈이다. 여전히 나는 어리석고, 어린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졌다. 이젠 놓칠 수 없음을 느낀다.

 

2014년 3월 27일, 나의 딸은 첫 돌을 맞았다. 그리고 나 역시 아빠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여전히 어설프고 어리석은 아빠이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온갖 상처와 치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세상이지만, 이젠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책은 아이의 탄생 이후 첫 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보내야 하는지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통해 아빠가 어떻게 함께 성장하는지도 꼼꼼히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날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젠 후회하지 않도록 사랑하고 또 사랑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빠’인 ‘나’의 모습을 영원히 남겨줄 것이다.

 

첫 생일 축하해. 아빠가 너무 사랑해.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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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의 어둠 - 2조 엔의 이익에 희생되는 사람들...
MyNewsJapan 지음, JPNews 옮김 / 창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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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금과옥조로 여기던 순서를 무시하고 이 책을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난 해 읽었던 책들을 순서대로 이야기해 왔는데, 당시 특정 장르의 책들을 무지하게 많이 읽은 관계로, 솔직히 스스로 서평에 지친 것이 있고, 또 최근 터진 뉴스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책의 주인공인 토요타의 몰락이 기정사실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명 ‘기레기’라 불리는 최근 우리 언론을 생각할 때, 이 책의 저자들인 MyNewsJapan의 용기와 근성을 칭찬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레기’는 다들 아시겠지만, 기러기가 아니라 ‘기자 쓰레기’의 줄임말이다. 요새 워낙 직장인 같은 기자들이 많아서리. 뭐, 난 이런 말 할 자격이 나름 있으니,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요새 참 ‘기레기’ 많다.

 

3월 20일 미국 정부가 토요타에게 1조 3천억 원이라는 살벌한 금액의 벌금을 부과했다. 2009년 발생했던 토요타 자동차의 급발진 사고에 대해 토요타가 제대로 관련 정보를 제공했는지의 여부를 그야말로 끈질기게 조사해 온 미국 정부가 토요타를 기소 유예 처분을 하지 않는 대신 벌금을 물리기로 한 것이다.

 

정확히 토요타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은폐해 왔는지에 대해 미국 정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 금액의 벌금을 물렸음에도 토요타가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에릭 홀더 미 법무장관은 이와 관련해 “토요타의 정보은폐의 심각성을 보면 정당한 처벌”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지난 2009년 샌디에이고의 한 일가족이 토요타의 렉서스를 타고 가다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토요타는 사고 이후 천만 대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자동차에 대한 리콜을 실시했고, 관련 정보공개를 지체했다는 이유로 6600만 달러의 벌금을 물어낸 바 있었다. 아울러 차량 소유주들에게 무려 10억 달러 이상의 민사 합의금을 지출한 상태였다.

 

이렇게만 보면 도대체 토요타는 당장이라도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09년 대량 리콜 사태에도 불구하고 토요타 자동차의 판매량은 크게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었다. 2013년에는 998만 대를 판매해 2년 연속 세계 판매 1위를 지켜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국내에서 토요타 자동차에 관련해 출간된 책들은 100여 종에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 낯간지러울 만큼의 표현이 가득한 토요타 찬양, 성공신화 소개 일색이었다. 기억력이 상당히 나쁜 나조차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창조경영’이란 말이 기억에 남는데, 혹시나 박 대통령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창조경제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닌가 심히 우려스럽기도 하다.

 

일본 역시 토요타에 관련된 책들은 대부분 성공신화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토요타가 어떻게 해서 세계 최고의 자동차 기업이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과 홍보 일색이다. 국내 ‘별 셋’ 기업에 대한 우리 언론이나 출판계의 찬양과 심히 닮았다. 그래서 더 역겹기는 하지만.

 

아니, 그저 자녀이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고 경영자가 된 이한테 무슨 혁신적인 ‘경영 스타일’이 있고, 또 그걸 심지어 왜 배우고 존경해야 하는가? 어2, 어3이 없을 뿐이다. 참.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 즉 독립 인터넷 신문 ‘MyNewsJapan’의 기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떳떳이 말한다. “우리는 토요타의 광고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진실된 모습을 밝힐 수 있다”고. 일본 유수의 언론매체들이 토요타로부터 ‘미움’받지 않기 위해 토요타와 관련된 부정적 기사들을 차마 쓰지 못한 상황에서 MyNewsJapan의 언론인들은 저널리즘과 정의를 향해 돌진하는 기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토요타를 성공신화의 롤모델로 삼고 구차해보일 정도로 칭찬하던 우리 언론이 토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 이후 마치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르쇠로 일관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토요타를 찬양하기 바빴던 출판계도 입을 다물었다. 이미 팔아먹을 만큼 책을 팔았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 무책임한 행동들로 인해 결코 존경받아서는 안 될 기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책임을 따져야 할까.

 

토요타는 그러나,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거액의 홍보비, 광고선전비를 퍼부어가며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사원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으며, 성능 자체의 결함이 존재함에도 숨기기에 바쁘고, 하청기업과 그 사원들을 쥐어짜고 착취해 자신의 이익을 끌어올리며, 해외지사 현지 근로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구조. 자, 떠올려보라. 과연 우리 기업들은 이러한 ‘어둠’에서 자유로운가?

 

책에는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다 결국 과로사한 사원의 아내가 외로이 거대한 맘모스 토요타를 상대로 싸우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여기에서 내가 삼성반도체의 황유미 씨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삼성반도체에서 어이없이 숨져간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외로이 싸워온 단체 ‘반올림’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영화 ‘또 하나의 약속’ 개봉을 하루 앞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대형극장들이 개봉을 취소했음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또 이를 모르쇠한 언론 혹은 ‘국내 모 기업에서 숨진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며 비겁하게 삼성의 이름을 ‘모 기업’으로 숨긴 ‘기레기’들의 역겨움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떠올릴 수 있겠나.

 

통제 없는 자본의 질주, 이는 결국 재앙으로 끝을 맺게 된다. 토요타의 사례는 극히 일부분일지 모른다. 우리는 더 큰 죄악, 더 큰 재앙을 바로 곁에 두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돈으로, 자본으로 묻어버리려 하는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가고, 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그레이트’한 리더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과연 희망은 있을까.

 

그리고 그런 자들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노예를 자처하며, 언론인이 아닌 충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기레기’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정의와 상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기본 중에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규제를 죄다 풀어버리기만 하면 과연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실현될까? 창조경제가 이뤄질까? 우리는 죄다 빌어먹게 행복해질까?

 

책은 패기와 정의감으로 뭉친 ‘기자’들의 피땀의 결과물이다. 진정한 탐사보도가 무언지, 그리고 진정한 언론의 역할이 무언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어쩜 이 책은 누구보다 이 땅에서 기자란 이름으로 밥을 빌어먹고 있는 이들이 먼저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토요타의 어둠을 바라보며, 삼성이, 그리고 우리나라 거대 재벌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그야말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의와 상식이 휠체어와 앰블런스에 실려와 법정에서 호화 병실로 슬쩍 혹은 뻔뻔히 대놓고 사라지는 이 땅에서, 어찌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여전히 이 땅에는 ‘정의롭게 사업을 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기업이 드물다. 아니, 극히 찾기 힘들다. 때문에 토요타의 어두운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지난 2013년 삼성전자는 228조 원의 매출, 36조 785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 책의 부제는 ‘2조 엔의 이익에 희생되는 사람들’이다. 부디 삼성전자의 228조 원을 위해, 36조 원의 영업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재벌들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더 많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재벌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책임을 져야 하고, 사과를 해야 한다. 빌어먹을 그것이 상식이고, 지랄 같은 정의다. 더 무얼 따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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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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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결국 가장 꾸밈이 없는 글이다”

 

글쎄요. 그것도 장르 나름 아닐 깝쇼? 하다가는 맞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글 꽤나 쓰시는 분들이 주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란 충고였다. 그런데 이것이 에세이나 수필이 아닌 소설에도 고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소설가 못지않은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사 문학계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이들이 바로 기자란 양반들인데, 나 역시 꼴에 기자란 이름을 들이밀며 처음 글쓰기를 배웠다. 에헴, 그렇다면 기자가 쓰는 기사란 어떠해야 하느냐. 일단 어데선가 많이 들어본 6하 원칙에 따라 공명정대하고도 한 치에 꾸밈이나 거짓이 없게 써야 하는 것이 바로 기사렷다!

 

더구나 풋내기 기자에게 문장의 기교나 나름의 미사여구 따위는 가당치 않은 법! 그저 메마를 대로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글을 ‘기사’란 이름으로 써대곤 했다. 아하, 그 어찌 잊을쏘냐. 긴장과 하품의 무한반복이었던 그 시간을.

 

하지만 사실 이른 바 스트레이트 기사를 작성할 때 기교나 미사여구 따위는 들어설 공간이 없는 것도 맞다. 만약 사실 보도 위주의 글에 그런 번지 수 잘못 찾은 불순물이 첨가된다면, 으아! 생각만 해도 소름과 닭살이 공존하려 한다.

 

암튼 그래서 유독 새내기 기자나 나처럼 주제 파악 하지 못하고, 정신마저 혼미한 녀석들이 칼럼이나 비평, 분석이나 긴 호흡을 요하는 탐사보도 등등에 더더욱 관심을 갖곤 한다. 일단은 그게 더 폼 나 보이고, 자신의 하고픈 이야기들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님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만 콕 짚어서 인터뷰를 하던가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내 경험엔 그런 글들이 100배는 쓰기 어렵고, 마음도 상하기 쉽다. 또한 정말 실력이 요구된다. 허투루 썼다간 당장 밑천이 드러나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내공이 몽땅 털리게 된다. 한마디로 개망신 당한다는 소리.

 

난 행운인지 불행인지 첫 직장에서 단지 인원이 없다는 이유로 ‘기자의 눈’이란 꼭지를 맡아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운명을 맞았다. 지금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형편없는 글이었다. 당시 사장님께서 당최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런 글을 맡기셨는지. 참 송구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의 반전. 가끔, 아주 가끔, 당시 썼던 천둥벌거숭이의 같잖은 ‘꽥!’과도 같은 글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곤 ‘참,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녀석, 나름대로 호기도 있었구나.’ 느낄 때가 있다. 아이구,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지금 무슨 언론계에서 반세기 정도는 보낸 백발의 대기자나 논설위원인 줄 아시겠다. 언감생심 꿈도 안 꾼다.

 

계속 왜 또 끈질기게 딴 소리냐고 하시겠다. 소설 역시 솔직하게 쓴 작품이 ‘작품’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단서는 달린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또 작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것.

 

넬레 노이하우스는 내가 보기엔 ‘솔직하게’ 잘 쓰는 작가다. 그다지 똥 폼을 잡거나 괜히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지적 허세 따위를 부리지 않는다. 사실 그런 작가는 좀 지겹다 싶을 정도로 많지 않은가. 굳이 이름을 대자면……. 밑천 드러나니 생략.

 

특히나 《너무 친한 친구들》은 동네 이름과 등장인물을 한국식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숙한 내용이 전개된다. 뭐냐고? 정치계의 부패와 협잡, 그리고 약자에 대한 강자에 치사하고 더러운 범죄다. 대형 건설을 둘러싼 음모와 범죄와 부패! 대한민국에선 식상한 소재 아닌가! 또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비뚤어진 행각도 어데선가 많이 보고 들은 듯한 느낌이다.

 

어쩜 이게 바로 작가의 재능이자 근면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주변에서 흔히 듣거나 볼 수 있는 소재인 것 같은데도, 은근히 그 다음이 궁금하고, 또 결론이 궁금하고, 범인이 궁금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전 작업과 공부가 필요한 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감탄이다.

 

저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뒤틀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순간 범죄는 탄생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움직이게 된다. 범죄가 없다면 보덴슈타인 반장과 피아 형사는 실업자가 되겠지?

 

작품의 제목인 ‘너무 친한 친구들’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나름 생각해 봤다. 범인과 그 주변의 친구들? 아님 부정과 부패를 함께 저지르는 건설 마피아와 정치인? 아니면 서로를 점차 알아가는 타우누스 강력반 형사들?

 

글쎄, 어쩜 너무 친하기 때문에 상대의 허물까지 덮으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피차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피차의 법칙’에 충실한 인간들이 우리 세상엔 의외로 많지 않은가? 그리고 그 피차의 법칙으로 애매한 타인들이 부수적 피해를 입고 말이다.

 

부정과 부패, 타락한 권력과 인간의 욕망 등등은 당연시리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겠지만,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이야기 전개에 살짝 당황스러웠던 작품이다. 하지만 역시나 술술 읽히고 페이지를 휙휙 넘어가도록 만드는 힘은 대단하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작품이지만, 요새 참는 법을 느닷없이 새삼스레 배우는 중이라. 삼만 줄인다. 썰렁함을 줄이는 법은 이 담에 배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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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전작 〈붉은 집 살인사건〉을 감동적으로(!) 읽은 후 바로 이어 접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이번에도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열혈 형사 이유현의 콤비 플레이가 빛을 발하고 있다. 전작이 여러 용의자 중 한 명의 범인으로 그 범위를 좁혀가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범인일 수밖에 없는(!) 한 명의 용의자. 그의 알리바이를 깨부수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사건의 대한 의문이나 범인의 트릭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실체를 규명하는 본격 미스터리 시리즈’라고! 출판사는 당당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 대한 서평에서 나 역시 이를 인정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의 실타래를 끈질긴 추적과 명석한 두뇌로 풀어가는 콤비 플레이는 페이지 넘기는 속도의 엑셀을 밟게 만든다.

 

 

이제 출판계에서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는 특정 마니아층의 한정된 애호를 넘어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왔던 영미권의 작품 뿐 아니라,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이 빠르게 소개되면서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몇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여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많다. 워낙 국내 추리소설 문학 시장이 작았던 점도 있고, 또한 신선한 신인작가의 작품들이 소개될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다. 더구나, 출판사들의 지극히 시장원리에 입각한 선택들이 국내 작가의 발굴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해외에서 이미 흥행성을 인정받은 작품을 위주로 번역해 소개해 왔기 때문이다. 즉 ‘돈’이 될 만한 작품만을 골라 시장에 풀어놓았으니,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작가들의 패기 넘치는 작품들이 설 자리는 왜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현직 판사 출신 작가라는 이색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작품은 단연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무지막지한 사이코패스나 블럭버스터급의 황당한 배경도 없이, 단지 범인과 탐정의 치열한 두뇌플레이에 초점을 맞춘 정통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는 점에서 반가움마저 다가온다. 또한 법조계라는 특정 분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지식들이 작품에 녹아들어 더 큰 재미와 사실성을 주고 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전작에 이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관통하고 있는 것 역시 치밀한 알리바이를 깨기 위한 싸움이다. 범인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트릭을 끈질긴 수사와 두뇌 게임으로 하나하나 부수어갈 때의 지적 쾌감은 독자들이 ‘고진과 이유현’ 콤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아울러 또 하나의 관통점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이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인간은 어차피 욕망의 노예임을, 그리고 그것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을 때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작품은 맨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역시 추악한 욕망의 전쟁터 그 자체일지 모른다. 겉으로는 짐짓 점잖은 척, 도도한 척 그리고 국가와 민족과 국민 어쩌구 하며 대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척 하지만, 결국 그들의 권력이 사라질 때, 그 추악한 욕망의 찌꺼기는 드러나고야 만다. 국민들은 허탈해하고, 분노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또 다시 그들에게 권력을 안긴다.

 

 

그렇기엔 난 지금 출판계에서 미스터리 추리물이나 형사물이 얻고 있는 광범위한 인기에 반가움과 함께 씁쓸함을 느낀다. 정의가 실현되고, 악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진리가 오직 활자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닌지, 이 비루하고 뒤틀린 세상에 절망하고 지쳐버린 이들이, 결국 소설 속 주인공의 활약과 악인들의 최후를 통해, 끝없는 정의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욕망에 유효기간 따위는 없다. 작품의 결말 부분 드러나는 범인의 실체를 통해 우리는 기막힌 반전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범인의 끝없는 욕망에 다시 한 번 경악하게 된다. 이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도 겹친다. 끝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하고, 또 채우고 나면 만족하지 않고, 또 다시 채우려 하는 이들. 그런 탐욕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고통 받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는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 그런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새 상대방의 욕망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치밀한 트릭 앞에 속수무책인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답답한 것도 없다. 그리고 반대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알리바이, 트릭이 보기 좋게 깨질 때, 느낄 수 있는 쾌감 역시 만만치 않다.

 

 

현재 나의 바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소박하다. 지극히 소박하다. 그냥 적어도 많은 이들이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그렇게 상식적으로 일들이 돌아가는 것. 바로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왜 이런 당연하고 소박한 바람이 이렇게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역시나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어둠의 변호사 고진, 열혈 형사 이유현을 찾는 것은 욕심일까. 정통 추리소설에 목마른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픈 책이다. 그리고 상식이 무너진 세상 앞에 극심한 분노와 실망을 느끼고 있을 권은희 과장에게 언제나 응원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대적 양심을 지키는 이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권력에 무릎 꿇고 굴종하는 이들은 조롱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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