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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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결국 가장 꾸밈이 없는 글이다”

 

글쎄요. 그것도 장르 나름 아닐 깝쇼? 하다가는 맞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글 꽤나 쓰시는 분들이 주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란 충고였다. 그런데 이것이 에세이나 수필이 아닌 소설에도 고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소설가 못지않은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사 문학계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이들이 바로 기자란 양반들인데, 나 역시 꼴에 기자란 이름을 들이밀며 처음 글쓰기를 배웠다. 에헴, 그렇다면 기자가 쓰는 기사란 어떠해야 하느냐. 일단 어데선가 많이 들어본 6하 원칙에 따라 공명정대하고도 한 치에 꾸밈이나 거짓이 없게 써야 하는 것이 바로 기사렷다!

 

더구나 풋내기 기자에게 문장의 기교나 나름의 미사여구 따위는 가당치 않은 법! 그저 메마를 대로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글을 ‘기사’란 이름으로 써대곤 했다. 아하, 그 어찌 잊을쏘냐. 긴장과 하품의 무한반복이었던 그 시간을.

 

하지만 사실 이른 바 스트레이트 기사를 작성할 때 기교나 미사여구 따위는 들어설 공간이 없는 것도 맞다. 만약 사실 보도 위주의 글에 그런 번지 수 잘못 찾은 불순물이 첨가된다면, 으아! 생각만 해도 소름과 닭살이 공존하려 한다.

 

암튼 그래서 유독 새내기 기자나 나처럼 주제 파악 하지 못하고, 정신마저 혼미한 녀석들이 칼럼이나 비평, 분석이나 긴 호흡을 요하는 탐사보도 등등에 더더욱 관심을 갖곤 한다. 일단은 그게 더 폼 나 보이고, 자신의 하고픈 이야기들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님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만 콕 짚어서 인터뷰를 하던가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내 경험엔 그런 글들이 100배는 쓰기 어렵고, 마음도 상하기 쉽다. 또한 정말 실력이 요구된다. 허투루 썼다간 당장 밑천이 드러나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내공이 몽땅 털리게 된다. 한마디로 개망신 당한다는 소리.

 

난 행운인지 불행인지 첫 직장에서 단지 인원이 없다는 이유로 ‘기자의 눈’이란 꼭지를 맡아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운명을 맞았다. 지금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형편없는 글이었다. 당시 사장님께서 당최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런 글을 맡기셨는지. 참 송구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의 반전. 가끔, 아주 가끔, 당시 썼던 천둥벌거숭이의 같잖은 ‘꽥!’과도 같은 글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곤 ‘참,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녀석, 나름대로 호기도 있었구나.’ 느낄 때가 있다. 아이구,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지금 무슨 언론계에서 반세기 정도는 보낸 백발의 대기자나 논설위원인 줄 아시겠다. 언감생심 꿈도 안 꾼다.

 

계속 왜 또 끈질기게 딴 소리냐고 하시겠다. 소설 역시 솔직하게 쓴 작품이 ‘작품’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단서는 달린다.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또 작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것.

 

넬레 노이하우스는 내가 보기엔 ‘솔직하게’ 잘 쓰는 작가다. 그다지 똥 폼을 잡거나 괜히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지적 허세 따위를 부리지 않는다. 사실 그런 작가는 좀 지겹다 싶을 정도로 많지 않은가. 굳이 이름을 대자면……. 밑천 드러나니 생략.

 

특히나 《너무 친한 친구들》은 동네 이름과 등장인물을 한국식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숙한 내용이 전개된다. 뭐냐고? 정치계의 부패와 협잡, 그리고 약자에 대한 강자에 치사하고 더러운 범죄다. 대형 건설을 둘러싼 음모와 범죄와 부패! 대한민국에선 식상한 소재 아닌가! 또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비뚤어진 행각도 어데선가 많이 보고 들은 듯한 느낌이다.

 

어쩜 이게 바로 작가의 재능이자 근면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주변에서 흔히 듣거나 볼 수 있는 소재인 것 같은데도, 은근히 그 다음이 궁금하고, 또 결론이 궁금하고, 범인이 궁금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전 작업과 공부가 필요한 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감탄이다.

 

저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뒤틀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순간 범죄는 탄생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움직이게 된다. 범죄가 없다면 보덴슈타인 반장과 피아 형사는 실업자가 되겠지?

 

작품의 제목인 ‘너무 친한 친구들’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나름 생각해 봤다. 범인과 그 주변의 친구들? 아님 부정과 부패를 함께 저지르는 건설 마피아와 정치인? 아니면 서로를 점차 알아가는 타우누스 강력반 형사들?

 

글쎄, 어쩜 너무 친하기 때문에 상대의 허물까지 덮으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피차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피차의 법칙’에 충실한 인간들이 우리 세상엔 의외로 많지 않은가? 그리고 그 피차의 법칙으로 애매한 타인들이 부수적 피해를 입고 말이다.

 

부정과 부패, 타락한 권력과 인간의 욕망 등등은 당연시리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겠지만,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이야기 전개에 살짝 당황스러웠던 작품이다. 하지만 역시나 술술 읽히고 페이지를 휙휙 넘어가도록 만드는 힘은 대단하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작품이지만, 요새 참는 법을 느닷없이 새삼스레 배우는 중이라. 삼만 줄인다. 썰렁함을 줄이는 법은 이 담에 배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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