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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확 ㅣ 대실 해밋 전집 1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월
평점 :
예전 학창시절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건방지게도 한 번 읽은 책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읽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교과서를 2~3번씩 줄쳐가며 읽어야 했던 ‘고통의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후 생각해보면 기사나 여타 글을 쓸 때, 객관적 자료의 인용이나 특정인의 발언을 확인하기 위해 들춰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번 읽었다고 책의 내용이 전부 기억날 리는 만무하고. 생각해보면 그리 좋은 버릇은 아니다.
반면 때 늦은 서평을 쓰며, 어쩔 수 없이 두 번씩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책의 내용이 가물거리거나 반드시 소개하고 싶은 구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나도 별 수 없다. 다시 뒤적거리면서, 결국은 한 권을 통째로 다시 읽어버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붉은 수확]은 조금 다르다. 역시 두 번 읽긴 했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난여름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까칠하면서도 유머를 즐길 줄 아는 탐정 ‘나’의 말투가 너무나 그리워서, ‘포이즌빌’의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또 다시 내 머리를 흔들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대실 해밋은 미국 추리소설의 아버지, 미국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또한 역시 미국 추리소설의 대부인 레이먼드 챈들러가 극찬한 거장 중의 거장이기도 하다. 하드보일드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실 해밋. 그의 첫 작품이 바로 [붉은 수확]이다.
스스로 귀가 얇기도 하지만, 대실 해밋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일맥상통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이라는 점, 그리고 한 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출 수 없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100% 사실이었다.
1920년대 후반, 금주법과 시카고, 알카포네의 시대로 기억되는 그 때. 일명 ‘포이즌 빌’이라 불리는 도시 퍼슨빌에 도착한 탐정 ‘나’. 하지만 그를 초대한 의뢰인은 만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살인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점점 드러나는 퍼슨빌의 실체에 ‘나’는 당혹해 한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곧 퍼슨빌의 어두운 세계와 전면전을 선포한다. 자신을 환영해주지 않은 이 회색 도시에 그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보답하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음모와 살인 속에 왜 이 도시가 ‘포이즌빌’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나’는 느끼게 된다.
[붉은 수확]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음모와 배신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출판사의 요구에 의해 저자가 원작에서 폭력적 장면을 몇 차례 수정하여 넘긴 것이라 하니, 원작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 폼 잡지 않고, 또 건들거리며 구구절절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까칠함으로 상대를 당혹케 하거나, 혹은 다가오게 만드는 남자. ‘적당히’ 타협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남자.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받은 만큼 반드시 되돌려주는 남자. 대실 해밋이 창조한 ‘나’는 하드보일드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평가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쿨하고, 또한 독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연상되면서도, 동시에 대실만의 개성이 한껏 드러나기도 한다.
바바리에 중절모, 눈을 반쯤 가린 채 담배를 입에 물며, 회색빛 하늘을 등지고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 지켜야 할 것이 적기에 그만큼 더 많이 걸 수 있는 남자. 어설픈 동정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남자.
어쩜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남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지 모른다. 어설픈 마초나 시대착오적인 아저씨로 찍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대실의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미 잃어버린 남자들의 대책 없는 호기, 당당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어쩌면 이 시대 많은 남자들에게, 그리고 그런 올드맨을 기억하는 여성들에게 대실 해밋의 작품은 귀중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남자다움. 참 오해받기 쉬운 단어다. 당장 남녀차별적인,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라 비난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찌질한 시대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남자다움이란 인공호흡기, 방독면과도 같다. 그리고 진짜 남자다움이란 어설픈 마초와 근본부터 다르다. 끝까지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허세 속에 알맹이가 떡하니 들어 있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약자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불의 앞에서 쪼그라들지 않고, 쿨하게 맞짱 뜰 줄 아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온갖 추잡한 술수와 사기, 음모와 배신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남자다움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사회에서 남자다운 인간은 찾아보기 정말 힘들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남자다운 여성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하다. 존경하고 싶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이들 중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 외출복 많은 분 빼고. 체르노빌하고 영변 스케일도 구별 못하는 분 빼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고 짓밟고 모욕하는 것들이, 사회의 지도층이라 떠드는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국민을 우롱하고, 국민을 바보로 여기며 철지난 공작이나 일삼으며 기생하는 것들에겐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살인과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 모두 ‘포이즌빌’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이 망한 놈의 도시 때문에 정말 환장하겠어. 얼른 벗어나지 않으면 나도 여기 인간들처럼 피도 눈물도 말라 버릴 거야. (…) 여기서는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어. 처음부터 함정에 빠진 거야. (…) 이 망할 놈의 도시 때문이야. 포이즌빌이 맞아. 독의 도시라고. 날 독에 중독 시켰어.”
정치를 놀음으로 만드는 이들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윽박지르는 세상. 나도 [붉은 수확]의 ‘나’처럼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왕이면 쿨하고 멋지게 말이다.
“때로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가다가는 휘저어 놓는 것도 좋거든. 그러자면 두 눈을 크게 뜨고 살아남을 만큼 강해야겠지. 그래야 절정에 이르렀을 때 원하던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