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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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에 진정한 천재가 나타났음은 바보들이 모조리 결탁하여 그에게 맞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 조너선 스위프트

 

1976년,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1969년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이 남긴 소설 한 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 어떤 고난이라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던 중 뉴올리언스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던 작가 워커 퍼시에게 아들의 원고를 소개했다.

 

얼떨결에 묵직한 원고 뭉치를 건네받은 워커 퍼시는 첫 몇 페이지를 읽고 글이 형편없다면 더 읽을 필요도 없이 정중히 죽은 소설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출판이 어렵겠다고 말이다. 양심에 꺼릴 것도 없는 일이었다. 작가가 직접 홍보할 수도, 후속작이 나올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여타 출판사들과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 원고의 경우는 계속 읽었다.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처음에는 그만 읽어도 될 만큼 형편없는 원고가 아니어서 낙심한 채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짜릿한 흥미를 느끼면서, 그러다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흥분상태로, 급기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나는 읽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눈물 나는 노력과 작품의 비범함을 알아본 퍼시의 중재로, 결국 작가의 사후 11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소설. 바로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이다. 1980년 출판된 이 작품은 코믹 소설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81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2006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지난 25년 간 출간된 최고의 미국 소설’에 여섯 번째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제 이 작품은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저자 존 케네디 툴은 조용한 외톨이었다.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천재였지만, 가난과 고독,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걸었던 어머니와의 갈등도 그를 힘들게 했다. 사람들이 분명 인정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바보들의 결탁>은 그 어느 출판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런저런 수많은 절망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그는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바보들의 결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워커 퍼시나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선형 교수가 모두 인정하는 바, 그 어떤 장르로도 구분이 불가능하며,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특징이다. 그 어떤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독히 지독한(!) 캐릭터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소동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 역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나 역시 기존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정한 기준이랄까, 그것이 사정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솔직히 이렇게 불쾌하고도, 유쾌하게 읽은 소설이 있었나 싶다. 장담하건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작품은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시를 배경무대로 삼고 있다. 존 케네디 툴의 고향이다. 툴은 자신의 고향이 가진 수많은 매력과 어둠 그리고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지독히도 세밀히 묘사한다. 오직 뉴올리언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 문화, 방언을 생생히 전달한다. 역자가 도저히 옮길 수 없었던 뉴올리언스 특유의 사투리도 이 작품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다. 이를테면 우리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를 매우 성실하고 완벽하게 작품 속에 녹여낸 것과 같다고 할까. 작품을 읽으면 1960년대 뉴올리언스의 밑바닥 인생들, 그들의 치열하고도 가난한, 그리고 뜨겁고도 축축한 삶들을 느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외로이 투쟁을 벌여나가는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라일리. 중세를 흠모하고 타락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쓰며, 동시에 만년 백수로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참다못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드디어 취업전선에 뛰어든 그는 드디어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와의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과연 이 대책 없는 뚱보는 이 사회를 무너뜨릴 것인가!

 

책은 분명 어처구니없는 소동과 소극으로 범벅이 된 코미디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씁쓸함과 쓸쓸함이 함께 이어진다. 가슴이 저릿한 먹먹함도 느닷없이 덮쳐온다. 물론 이는 저자 존 케네디 툴의 쓸쓸했던 짧은 생이 작품과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었던 지난 해 8월이 아닌,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의 심정으로 다시 바라본 <바보들의 결탁>은 결코 같은 느낌으로 바라볼 수 없다.

 

온갖 소동을 일으키며, 뉴올리언스를 떠들썩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하나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이그네이셔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 속에서, 그들의 대화와 행동과 사건과 사건들 속에서, 나는 우습고도 슬픈 우리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슬픈 난장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지는, 그렇지만 무엇 하나 마음대로 화조차 낼 수 없는 상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하는지, 난감하고 어지럽기만 한 이 세상.

 

빤한 미래에 신물이 올라오려 한다. 어찌어찌 덮고 어찌어찌 달래고 어찌어찌 윽박질러, 지금의 비극도 잊혀질 것이다.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일어서겠지만, 그로 인해 큰 손실을 입는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국민들은 다시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줄 것이다. 그것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이 어찌 슬픈 난장판이 아니겠나.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모르는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에게 온갖 아부를 떨며 연명하고 있는 벼슬아치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어찌 우습고도 슬프지 않겠는가. 언론은 더 이상 썩을 수 없을 정도로 썩었고,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국민들의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짜내려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국제화, 경쟁력, 국민행복시대를 말하고 있는데, 이 어찌 우습고도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무능하고 거기에다 부패하기까지 한 권력, 그 권력의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기생하는 언론, 지식인. 그리고 자식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 부모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죄인처럼 가슴 뜯으며 유가족들을 위해, 먼저 간 아이들을 위해 울고 기도하고 숨죽이고 있는 국민들.

 

지금 대한민국은 기가 막히게 우습고도 억장이 무너지게 슬픈, 개판, 난장판, 지옥이다. 이런 놀라운 시대에 <바보들의 결탁>은 어찌 보면 그저 무난한 코미디 한 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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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서울에게 서울이 평양에게
조동호 지음 / 동아시아연구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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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 이 두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각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상이한 이념 위에 세워진 두 도시는 지금껏 어떤 형태로 발전 혹은 진화해왔으며, 또한 어떠한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2002년 설립된 이후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학제적 연구, 국제학술교류 확대, 지식사회 네트워크 활성화 등에 노력해온 동아시아연구원에서 펴낸 『평양이 서울에게, 서울이 평양에게』는 도시 건축(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경제(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영화와 대중문화(김현경 MBC 기자/통일방송연구소장), 인간의 생애(이수정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두 도시의 미래(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등 다섯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서울과 평양을 비교·논의하고 있다. 아울러 지금보다 더 나은 서울, 더 나은 평양을 만들기 위한 두 도시의 ‘대화’를 시도한다.

 

책은 동아시아연구원 북한연구센터에서 북과 통일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학제 간 연구 시도한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또한 책은 단순히 서울의 논리를 평양에 이식하자는 이야기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평양의 변천과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상황에서 두 도시가 서로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무엇일지 고민한다.

 

이는 책에 참여한 다섯 필자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한국을 대안으로 삼아 북을 변화시키는 데에만 연구를 국한하지 말고 남과 북의 역사성을 모두 인정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통일은 일방의 승리, 일방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일은 남북 모두에게 새롭고 좋은 사회가 된다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 대박이다.

 

필자들은 통일의 과정이 결국 북의 주민들에게 변화에 대한 동의를 얻어가는 과정이 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현재 한국의 모습이 북한 주민에게 대안으로 제시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 역시 인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미래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은 단순한 두 도시 간 우열비교나 이분법적 접근에서 벗어나 각기 도시의 장단점을 평가하고 두 도시의 장점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많은 교류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평화를 전제로 한 공존이라는 목표 아래 끊임없는 소통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더 나은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두 도시의 대화.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고민한 결과인 이 책은 부족함과 아쉬움보다는 또 다른 방식의, 나아가 더 바람직한 형태의 공존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후속 연구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부디 이러한 논의와 시도가 더 많은 이들에게 정신적·학문적 자극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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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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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것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짧은 삶이나마 지금까지 숨을 쉬며 느낀 결론이다. 때문에 결과에 못지않게 그 과정이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만 좋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가 중요하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또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쉽게 용서한다. 가해자가 사과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용서와 청산은 얼마나 초라한가. 역사는 살아온 기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살아갈 힘이기도 하다.

 

독일과 일본은 그런 점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 한때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차지하려 했던 두 국가는 패전 이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왔다. 독일은 철저한 과거 청산과 사죄를 통해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쳐 왔다.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먼저 살아간 이들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불행을 가져왔는지 솔직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한반도의 분단 덕분으로, 패전국으로 응당 받아야 할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왔다. 그리고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초라할 정도로 후진적인 정치 시스템을 지속해오며, 이젠 극우의 색채를 점점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과거를 정당화하며, 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 여전히 그들에게 독도는 자신들의 섬이고,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매춘에 참여한 여성들일 뿐이다. 그런 추악한 역사의식 안에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이런 뒤틀린 역사의식이 쓰나미나 원전 사고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일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는 여전히 독일인들의 마음 한켠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나치 시대의 죄악을 꺼내든다. 국민 전체가 집단적인 광기에 빠졌던 끔찍한 기억을 굳이 꺼내는 것은, 암울했던 그 시대가 여전히 현재에도 강한 파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단어. 이는 독일인과 독일인이 아닌 사람에게 각각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친일파와 매국노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처럼.

 

주지하듯, 독일은 나치 시대 당시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이들을 역사의 이름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또한 독일의 침공으로 만들어진 괴뢰 정부에 복무했던 이들을 끝까지 추적해 처벌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복수나 형식적인 법 집행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정의는 결국 불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봉선화>의 원작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의 저자 윤정모 작가는 연극을 소개하며 나치 시대 프랑스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프랑스가 처리했던 나치 부역자들이 생각났다. 조사대상자가 2백만 명, 사형이 약 7천명, 정치, 언론, 시인, 작가는 가중처벌까지 받았다. 그리고 대통령 드골이 대국민 선언을 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 지배를 받을 수는 있을지라도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의 올바른 청산과 정립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우리가 과연 시작부터 철저히 역사 청산을 올곧게 진행하며 지금까지 왔다면, 과연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났을까. 과거부터 철저히 뒤틀린 시작은 지금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깊은 슬픔>은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던 이들이 하나하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시작된다. 쉴 새 없이 긴박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진행과 그 사이마다 드러나는 추악한 과거는, 어제가 오늘을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결말을 장식하는 반전은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의 조국, 독일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저자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케 한다.

 

많은 유명인사, 사회인사들 중 여전히 뒤틀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악마와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그것을 비난하는 이들을 오히려 악으로 몰아 부친다. 악이 선을 짓누르는 모습이다.

 

모든 국민들이 슬픔에 빠져있다. 하지만 권력을 쥔 자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단지 숨죽이며 망각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세월호의 비극은 결국 대한민국이 만든 뒤틀림의 결과이다. 비극의 사이사이 마다 튀어나와 남은 자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악마와도 같은 언사를 내뱉는 일부 인사들 역시 어찌 보면 대한민국의 창조물이다.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대한민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기에, 스스로 국민임을 포기하고 이 더러운 땅을 떠나겠다는 희생자 부모의 절규. 감히 어느 누가 여기에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잘못된 역사는 잘못된 현재를 만들고, 미래마저 잠식한다.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 우리가 진심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선장, 승무원들을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 선박의 실재 소유주, 기업을 박살내는 것보다, 뿌리까지 썩어버린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말자.

 

“이제 절대 지금까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천 년이 가도 이 죄를 다 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더 심한 것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은 다시 똑같은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완전히 윤리 의식으로 자리 잡아 그를 괴롭히는 신앙을 저주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려 한들 소용없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지 않는 한 용서는 없다.” -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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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 가의 저주 대실 해밋 전집 2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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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슬픔과 간절함이 분노와 무력감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정부의 무능력, 그리고 선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속절없이 가라앉는 모습을 피눈물 흘리며 지켜봐야만 했다. 아니, 차마 볼 수 없었다.

 

정부와 잘난 언론의 지껄임처럼 국가가 아이들을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우린 세계 최고의 후진국이다. 또 만약 SNS나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음모론 중 단 하나라도 사실이 있다면, 우린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 속에 숨져 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외쳤을 ‘엄마!’ ‘아빠!’들의 숨쉬기조차 힘들 아픔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들이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할까. 여전히 구태와 권위와 이기주의라는 지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그 이유가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아이들만을 잃은 것이 아니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희망을 잃었고, 간절히 원했던 상식을 잃었다.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 우리의 권리와 권력을 위임했던 집단들에 대한 마지막 하나 남은 기대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진정 ‘정부’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집단이 되고 말았다.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기껏 ‘이것도 북괴의 소행’이라거나, ‘전라도에서 죽었으니 홍어들과 빨갱이의 합작품’이라는 저주의 굿판이 여전히 날뛰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무슨 희망 따위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사람임을, 차가운 바다 아래로 사라진 아이들 역시 같은 사람임을 망각한 이들의 저주를 무슨 마음으로, 무슨 눈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울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려갔다. 내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내 조카들과 다를 바 없는, 내 형제 누이와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선생님’이길 바랐던 이들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달려갔고, 기도했다. 더러운 국가의 졸개들이나 공권력의 하수인들과는 달리, 그리고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표를 구걸하는 쓰레기 같은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끝까지 사람이고자 했다. 그렇다. 이들은 사람이었다. 이들만이 진정 사람이었다.

 

닷새가 흐른 상황 속에서도 에어 포켓을 중얼거리며, 남아있는 이들을 절망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언론. 애초 저체온증의 무서움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안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야, 이제야 수온 이야기를 떠드는 것들. 이미 가라앉은 배안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에어 포켓을 주문처럼 외는 것들 앞에, 할 말을 잃는다. 이들을 진정 사람으로 봐야만 할까.

 

<데인 가의 저주>는 범인이 치밀한 계획으로 실행한 연쇄살인을 한 여인에게 뒤집어씌우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희생양이 된 여인은 자신이 정말 살인의 피가 흐르는 집안의 저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한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 그것은 그 무슨 저주가 아니었다. 단지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인간의 끔찍한 범죄였을 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13년 8월, 내가 이런 참혹함 앞에서 이 책을 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대실 해밋의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을,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먹먹함과 억울함, 분노와 무력감에 진저리치며 무심한 하늘을 바라볼 줄은 정말 몰랐다.

 

단 한 명의 억울한 죽음도 막아야 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다. 존재 이유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나 몰라라 하는 정부는 다시 말하지만, 없어져야 한다. 그 어떤 이유도 이유일 수 없다. 변명일 뿐이다. 치졸한 변명일 뿐이다. 부모들의 피눈물 앞에 그 어떤 변명도, 쓰레기일 뿐이다. 차디찬 바다 아래로 잠들어간 아이들의 18년 삶을 그 어떤 변명으로 보상하려 하는가. 아이들과 함께 잠든 선생님들의 눈물을 그 어떤 권력으로 입막음하려 하는가. 홀로 살아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 곁으로 간 교감 선생님의 마지막 사죄를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 잘난 신문과 방송으로 떠들려 하는가. 그 더러운 입을 이제는 닥쳐야 하지 않겠는가.

 

사고를 사건으로 만들어버리는 정부, 그리고 그 사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소리 없이 ‘작전’을 벌인 정치 집단. 이들의 무능력과 사악함을 기억하려 한다. 비록 아무 힘도 없는 필부에 불과해도, 기어이 기억할 것이다. 이들의 끔찍함을 기억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의 짐승 같은 행동과 생각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줄 것이다.

 

저주받은 집안의 비밀을 풀어헤쳐 나가는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소설 <데인 가의 저주>.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이 서평을 눈물로 기억할 것이다. 정작 저주를 받아야 할 이들이 누군지는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여전히 아이들의 외침이 들린다. 끝까지 기적을 믿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고작’이고 ‘기껏’이다. 2014년 4월의 아픔과 억울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말썽부리고 투정부려도 좋으니, 제발 기적처럼 돌아와라,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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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자살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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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이 요즘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 아니,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 새삼 축복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만약 내가 겪고 보고 들은 것들이 평생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야 한다면, 끝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절대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왜 그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들은 한 두 개씩 남아있으리라. 그것이 좋은 것이든 혹은 반대이든.

 

최근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 중 아무런 감정 없이 혹은 조금이나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소식들, 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장면들을 본 후의 난감함은, 왜 점점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게 되는지 저절로 깨닫게 해준다.

 

그 중에서 최근 가장 잊고 싶은 소식들은 바로 이웃들의 자살이었다(물론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살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유독 이웃들의 자살이 무참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조금의 과장도 덧붙이지 않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향한, 무언가를 향한 강한 적개심과 살의를 느끼게 된다.

 

구성원인 국민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공동체,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계약에 어긋난다. 그따위 국가는 없어지는 게 낫다. 최소한의 인간 존엄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국가는 그야말로 공공의 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웃들이, 정말 살기 벅차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이런 지랄 같은 경우가 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침 튀기며 떠들던 인간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벌어지는 것일까. 규제개혁이 어쩌고 ‘Live Show’를 하며, 정작 일반 국민들의 삶은 관심 대상이 아닌 듯하다.

 

최근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철도노조 노동자의 이야기다. 남은 자들은 구차한 변명으로 그의 죽음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더럽고 더러울 따름이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찾자고 버둥거리는 나도 ‘참 한심하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부디 나의 형편없는 기억력이 더 이상 미덕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기분 좋은 일들, 아름다운 일들이 무진장 쏟아져,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싶어지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내 머리가 터질 때까지 기억하고 또 담아둘 것이다. 조금 먼저 간 이웃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이 작품은 전작 《붉은 집 살인사건》《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 바 있는 도진기 작가의 새로운 시도다. ‘정신’만 죽인다는 독특한 발상이 그야말로 신선하다. 아내의 가출로 인해 삶의 미련을 버린 남자 길영인이 ‘정신만 죽여 주겠다’는 정신자살연구소 이탁오 박사를 찾아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숨겨진 과거가 소개된다. 이탁오 박사와의 악연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의 ‘살짝’ 프리퀄이라고 해야 할까. 고진이 왜 법정을 떠나 어둠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전작들이 주로 두뇌 플레이 위주의 작품이었다면, <정신자살>은 그보다 조금 더 액션이 가미되어 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치열한 두뇌플레이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아울러 읽는 이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트릭과 반전은 ‘역시 도진기’라는 말을 절로 내뱉게 만든다. 고진 변호사와 이유현 형사의 콤비 플레이도 여전히 흥미롭다.

 

더구나 이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해도 충분히 흥행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본격추리소설이면서도 결말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이게 당최 뭐야~!’라는 살짝 황당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 역시 작가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진 ‘작전’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었다. 결말 부분이 영상화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쫙~!’ 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 이후 2~3권의 비슷한 장르의 도서를 더 읽은 후, 다시 본 궤도에 돌아온 듯하다. 물론 본 궤도 따위는 애시 당초 없었지만, 특정 장르에 대한 몰입에서 잠시 벗어났다고나 할까. 우연히 만난 대실 해밋, 넬레 노이하우스 그리고 도진기 작가 덕분에 나의 ‘제2의 백수기’가 그나마 무미건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당시 왕창 사들인 책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정신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지 않고(이 정부 들어 그런 위협을 정말 많이 느끼고 있다. 당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로봇처럼 살라고 강제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스스로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책들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도진기 작가는 체크리스트에 이미 올라 있다. 그의 또 다른 가공할(!) 작품을 만나고 싶다.

 

“자살이 꾸준히 있어온 만큼 그걸 막으려는 시도도 많았습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몸의 피를 조금씩 뽑아내면 자살하려는 마을을 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오랜 시간 목욕을 할 것을 권하기도 했고, 결혼을 통해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죠. 뒤마는 절제와 인내를 가져야 자살을 피할 수 있다고 제시했고, 베이컨은 수학에 몰두하라고, 디드로는 여러 가지 위험한 장난을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자기가 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거지요.”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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