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살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이 요즘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 아니,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 새삼 축복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만약 내가 겪고 보고 들은 것들이 평생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야 한다면, 끝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절대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왜 그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들은 한 두 개씩 남아있으리라. 그것이 좋은 것이든 혹은 반대이든.

 

최근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 중 아무런 감정 없이 혹은 조금이나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소식들, 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장면들을 본 후의 난감함은, 왜 점점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게 되는지 저절로 깨닫게 해준다.

 

그 중에서 최근 가장 잊고 싶은 소식들은 바로 이웃들의 자살이었다(물론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살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유독 이웃들의 자살이 무참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조금의 과장도 덧붙이지 않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향한, 무언가를 향한 강한 적개심과 살의를 느끼게 된다.

 

구성원인 국민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공동체,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계약에 어긋난다. 그따위 국가는 없어지는 게 낫다. 최소한의 인간 존엄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국가는 그야말로 공공의 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웃들이, 정말 살기 벅차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이런 지랄 같은 경우가 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침 튀기며 떠들던 인간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벌어지는 것일까. 규제개혁이 어쩌고 ‘Live Show’를 하며, 정작 일반 국민들의 삶은 관심 대상이 아닌 듯하다.

 

최근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철도노조 노동자의 이야기다. 남은 자들은 구차한 변명으로 그의 죽음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더럽고 더러울 따름이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찾자고 버둥거리는 나도 ‘참 한심하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부디 나의 형편없는 기억력이 더 이상 미덕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기분 좋은 일들, 아름다운 일들이 무진장 쏟아져,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싶어지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내 머리가 터질 때까지 기억하고 또 담아둘 것이다. 조금 먼저 간 이웃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이 작품은 전작 《붉은 집 살인사건》《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 바 있는 도진기 작가의 새로운 시도다. ‘정신’만 죽인다는 독특한 발상이 그야말로 신선하다. 아내의 가출로 인해 삶의 미련을 버린 남자 길영인이 ‘정신만 죽여 주겠다’는 정신자살연구소 이탁오 박사를 찾아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숨겨진 과거가 소개된다. 이탁오 박사와의 악연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의 ‘살짝’ 프리퀄이라고 해야 할까. 고진이 왜 법정을 떠나 어둠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전작들이 주로 두뇌 플레이 위주의 작품이었다면, <정신자살>은 그보다 조금 더 액션이 가미되어 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치열한 두뇌플레이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아울러 읽는 이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트릭과 반전은 ‘역시 도진기’라는 말을 절로 내뱉게 만든다. 고진 변호사와 이유현 형사의 콤비 플레이도 여전히 흥미롭다.

 

더구나 이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해도 충분히 흥행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본격추리소설이면서도 결말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이게 당최 뭐야~!’라는 살짝 황당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 역시 작가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진 ‘작전’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었다. 결말 부분이 영상화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쫙~!’ 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 이후 2~3권의 비슷한 장르의 도서를 더 읽은 후, 다시 본 궤도에 돌아온 듯하다. 물론 본 궤도 따위는 애시 당초 없었지만, 특정 장르에 대한 몰입에서 잠시 벗어났다고나 할까. 우연히 만난 대실 해밋, 넬레 노이하우스 그리고 도진기 작가 덕분에 나의 ‘제2의 백수기’가 그나마 무미건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당시 왕창 사들인 책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정신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지 않고(이 정부 들어 그런 위협을 정말 많이 느끼고 있다. 당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로봇처럼 살라고 강제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스스로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책들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도진기 작가는 체크리스트에 이미 올라 있다. 그의 또 다른 가공할(!) 작품을 만나고 싶다.

 

“자살이 꾸준히 있어온 만큼 그걸 막으려는 시도도 많았습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몸의 피를 조금씩 뽑아내면 자살하려는 마을을 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오랜 시간 목욕을 할 것을 권하기도 했고, 결혼을 통해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죠. 뒤마는 절제와 인내를 가져야 자살을 피할 수 있다고 제시했고, 베이컨은 수학에 몰두하라고, 디드로는 여러 가지 위험한 장난을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자기가 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거지요.”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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