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일간의 트랙터 다이어리 - 열혈청춘 강기태의 트랙터 국토순례
강기태 글.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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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설픈 나이지만, 한 살씩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청춘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괜스레, 누구에게 탓할 것도 없는데, 내 청춘은 언제였는지, 그 시간을 너무 속절없이 보낸 것은 아닌지, 쓸쓸하다. 결국은 나의 시간이었고, 나만의 선택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살짝 삐치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조바심이란 것이 나에게도 생긴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10, 20대를 흔히 청춘이라 생각한다. 30대 역시 어쩌면 그 범주에 속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직 나는 청춘이라는 이름을 어색하게 받아들이면 안 될 터이다. 그런데 어느 새 마음은 이미 청춘이 아님을 시위하는 듯, 그래서 조금은 서글픈 지금이다.

 

오직 속도만을 강조하고 찬양하는 이 시대에 반발해,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슬로우 푸드니, 느리게 사는 지혜니 하며 다소 더딘 것이 실은 더딘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공감하고, 또 실천하고픈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기태라는 청년의 도전은 분명, 의미를 지닌다. 속세에서 판단하기엔 한없이 느려터진 트랙터를 타고 전국을 순례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이미 성실한 느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도전하는 것이 청춘의 특권이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 그렇다고 청춘이 아닌 족속들은 도전할 권리가 없다는 뜻은 아닐 터이다. 그만큼 요즘 젊은이들이 도전하지 않는다는, 다소의 비판이 담긴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처럼 매일 매일 감당키 어려운 도전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없지 않나 싶다. 생존 그 자체, 존재의 이유를 밝히는 자체가 이미 어마어마한 도전 아닌가.

 

저자는 트랙터로 남미를 횡단하겠다는 꿈을 접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전국일주라는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내기 위해 도전한다. 무모해 보이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노력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이고 성취이다. 그는 그러한 성취를 통해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순례의 여정에서 저자는 유명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 활동가 한비야, 최일도 목사 등. 하지만 그보다는 논과 밭에서, 강과 바다에서, 들판과 산에서 만난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더 가슴에 담긴다. 늙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묵묵히 땅을 일구는, 바다를 일구는 이들. 어찌 이들에게 하찮은 FTA 따위가, 그 무슨 법과 제도 따위가 간섭할 수 있으랴. 이들의 숭고한 노동을 기껏 자본의 단위로 매기는 이들에게 그 무슨 상식과 순리를 바랄 수 있으랴.

 

비록 반쪽이지만, 이 땅을 순례하며 저자는 많은 고독과 조우했으리라. 그리고 그 고독이 그를 생각보다 많이 자라게 했으리라. 비록 젊음의 객기라 하더라도,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해 벌인 한 판의 난장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약간의 공명심 때문이었더라도, 그의 트랙터 순례는 분명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에게 남으리라. 그거면 족하지 않나.

 

누구나 청춘을 맞이하고, 청춘을 보낸다. 누구나 희망을 꿈꾸고, 그 희망이 눈앞의 실체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비록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어떠랴. 우리는 제 알을 낳을 해변을 향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바다거북처럼, 그렇게 청춘을 맞고 또 보내는 존재임을. 우리의 여행 자체가 의미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이거늘.

 

저자와 같은 거창한 순례가 아니어도 좋다. 청춘은 도전하는 것이라는 그저 그런 이야기도 필요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청춘들은 뜨겁게 그것을 감당하고, 또한 견뎌내고 있으니, 모두가 자신 만의 그 무엇에 올라타면 되는 것이다.

 

어설프게, 가을이라고, 외로움을 초대하는 것 같다. 주책스럽다. 하지만 이것도 나에겐 그 어떤 특권이자, 선물이 아닐까. 청춘을 아쉬워하지 말고, 이 시간, 바로 지금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나에겐 더 이문이 남는 장사이리라, 이렇게 믿고 피식 웃었다.

 

한 청년의 트랙터 국토순례, 살짝 삐침과 또한 가벼운 유쾌함을, 그리고 문득 잊고 지냈던 어느 겨울 고성의 앞바다가 떠오르게 만든, 그런 시간이었다. 청년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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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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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용인의 한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네티즌들은 그 사진을 가리켜 꼴찌 없는 운동회라는 제목을 달아주었다.

 

달리기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이 몸이 불편한 친구의 손을 잡고 나란히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 친구들과 함께 달린 불편한 아이는 끝내 눈물을 흘린 듯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학부모들과 선생님들도 눈시울을 붉혔다고 소식은 전하고 있다.

 

사진과 글을 보는 순간,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울컥했다. 아이들을 무한경쟁에 도가니로 몰아넣어, 숨조차 쉴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이 미친 세상에서, 그럼에도 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어느 누가 여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을까.

 

교육은 그럴듯한 포장으로 언제 듯 폼 나게 보여 질 수 있지만, 결국 그 알맹이가 실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동안 우리 어른들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사육해왔으며, 그것을 스스로 사랑과 관심이라 포장해왔다. 매년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데, 감히 사랑이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른 바 SKY라 불리는 명문대에 다니던 학생이 교내에 대자보를 붙이며 자발적인 퇴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간택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학과 국가, 시장이라는 억압의 3각 동맹을 향해 던지는 작은 돌멩이의 외침이었다. 그는 자신부터 혁명하겠다고 외쳤다. 근원적 혁명은 자신의 행동으로,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의 뒤를 이어 무수히 많은 대자보들이 여러 학교에 붙었고, 2, 3의 돌멩이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자본과 시장 그리고 돈과 권력 앞에 맥없이 투항한 대학이라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또 가슴 깊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무엇인 진정한 행복이고 무엇이 인간다움인지. 그것은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의 외침으로 시작된 불길은 이미 꺼져버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을까. 여전히 세상은 굳건하게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자본의 벽은 언제나 그랬듯,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일까.

 

여기에 명쾌한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하지만, 그것 역시 확실치는 않다. 세상은 딱 그만큼 변한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정답은 여전히 아득하다.

 

하지만 난 여기에서, 분명 달라진 것이 있다고 믿는다. 야당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진보교육감 다수가 당선된 것은,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열망이 모아져 일어난 작은 기적이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세월호의 눈물 속에, 뉴타운 개발 공약 따위에 표를 던졌던 그 부모들이, 이제 아이들의 교육을 진보교육감에게 맡기고 있다. 이는 분명한 변화이자, 시작을 위한 시작이었다.

 

20103, 김예슬의 선언은 이와 무방하지 않다.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대를 스스로 뛰쳐나오며, 오직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선포는 많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숨을 돌릴 시간을 주었다. 행여 내 아이만 뒤쳐질까, 내 아이만 멈추어질까, 걱정하던 이들이 이제는, 내 아이와 우리의 아이들 모두가 더욱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그의 돌멩이는 생각보다 커다란 균열을 이 사회에 일으킨 셈이 되었다.

 

지금, 그는 나눔문화연구소라는 단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삶의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의 도전과 희망 찾기는 여전히 뜨겁게 진행 중이다.

 

문득, MB정권 초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미친 소 너나 먹어라’, ‘0교시 폐지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아이들은, 그 어떤 배후세력없이도 당차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의 아픔을 겪으며, 때론 어른보다 더 어른답게사회를 향해 외치는 또 다른 아이들을 바라본다. 친구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한 치의 의혹 없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하는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당찬지, 얼마나 슬기로운지 우리 전혀 모른다. 오직 줄서기와 무한경쟁만을 강조해 온 우리는, 아이들이 잠자코 어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착각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누구보다 또렷이 구분해 낼 줄 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보다 백배 슬기로운 존재이다.

 

나 하나 행동한다고, 나 하나 덤빈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지레 겁먹고 지레 포기하는 우리들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 용기 있는 이가 먼저 손을 들고 돌멩이를 던져도, 이를 비방하고 왜곡하기 일쑤다. 창피한 어른들이다.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들이다.

 

김예슬의 대자보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이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김예슬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자보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폭발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출은 눈물 나게 고마워해야 하리라. 아직 우리 사회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책은 김예슬 씨가 대자보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포함했다. 그의 고민, 그의 문제의식, 그의 결심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잠깐은 을 돌려야 하리라. 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김예슬의 대자보에 이렇다 할 답장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쉼 없이 우리는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

 

아픈 친구와 함께 결승선을 함께 통과한 아이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아이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연대와 사랑과 눈물과 배려가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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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산림, 한반도를 사막화하고 있다
김성일.이동호 지음 / 스토리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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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 남북산림복구를 위한 협의를 위해 개성을 방문했다. 개성공단을 지나 개성 시내로 들어서며, 과거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한 북한 시민들의 차림새나 표정을 보고, 조금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픈 장면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중 제일 내 마음에 남았던 것은 가뭄에 시달리는 북한의 논과 밭으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냇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열심히 붓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전교생이 전부 동원되었는지, 수많은 아이들이 열심히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한창 뛰어놀고 또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고작 양수기 한 대만 있었어도 해결될 문제에 동원되고 있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졌다.

 

또 하나의 모습.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북한의 산은 나무를 찾기 힘들만큼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나마 대도시에 속하는 개성이 이럴진대 과연 지방으로 가면 얼마나 더 상태가 심각할까, 걱정이 앞섰다. 이러한 민둥산이 결국 홍수와 가뭄의 악순환을 낳는 근원이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고, 남북산림복구협력사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인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한반도의 산림자원은 본래 북한 지역에 더 많이 있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 침탈을 위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의 전체 임야 중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이전까지 일제는 우리의 산림자원을 무수히 수탈했는데, 이 역시 대부분 북한 지역의 산림이 대상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산림자원은 역시 북한이 남한보다 더 많았다.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흔들리며 북한이 외부에서 수입하는 에너지와 식량이 대폭 줄어들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산지개간을 통한 식량증산과 임산에너지의 확대공급을 위한 과도한 임목벌채가 이뤄지며, 북한의 산림은 점점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반대로 우리는 국가주도의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벌여 지금과 같은 울창한 산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녹화사업의 과정에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황폐화되었던 산림을 복구했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산림녹화사업을 추진하는 국가들에게 여전히 대한민국은 중요한 벤치마킹 국가이다.

 

저자인 김성일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는 식량 생산을 위해 산림을 마구잡이로 다락밭으로 개간하고, 이 때문에 대홍수가 일어나 토지와 농작물이 유실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1990년 전체 면적의 68%를 차지했던 북한의 산림은 15년 만인 200551%로 줄어들었고, 2010년에는 47%로 떨어지게 되었다. 20년 만에 북한 산림면적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이다. 훼손된 산림면적은 260ha 이상, 서울시 면적의 약 50배다. 지금도 해마다 축구장 13만 개 크기의 산림이 사라지고 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면적이다.

 

세계적인 산림학자인 저자는 북한 산림복원이야말로 통일 이전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 숙원사업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통일 후 천문학적인 환경, 농업, 산림, 인프라 복원비용을 감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황폐화된 북한산림이 복원되기까지는 최소 5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아울러 통일준비 사업 중 가장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말한다. 황폐화된 자연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긴 시간과 함께 인간의 끈기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북한 산림복원을 더 이상 식량원조사업이나 생태적 이슈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오히려 문제를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국제 외교적 문제로 인식하여 다자간 협력과 국제문제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이상 한 국가의 자연환경은 그 국가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중국의 황사로 인해 우리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일본의 원전 사고로 전 세계가 안심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개성에서의 그날 협의는 잘 진행되어 합의를 이룰 수 있었지만, 국내 정치적 문제, 북한 당국의 남한 정부에 대한 불신 등으로 실재 지원물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다시금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이렇게 양국이 다투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도, 북한의 산림은 더욱 더 악화될 것임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연은 임의로 분단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황폐화된 산림을 복구하는 것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필요치 않다. 남과 북 모두 한반도 구성원으로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책은 산림복구 사업의 시급성, 절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또한 호소이다. 북한산림복구사업,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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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백년 식당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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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고, 구입하는 버릇이 예전보다 많이 바뀐 듯하지만, 큰 뼈대를 이루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냥 맘에 드는 책을 집는 것. 대단한 기술도 내공도 필요 없고, 특히 나처럼 디자인이나 느낌에 쉽사리 흔들리는 얼치기 독서가라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이다.

 

물론 특정 저자나 출판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은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철수와영희와 같은, 좋은 책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나,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책들은 가능하면 챙겨 읽으려 한다.

 

그럼에도, 무작위 선택의 즐거움 또한 나에겐 놓칠 수 없는 순간이다. 이는 온라인 보다는 주로 오프라인에서 즐길 수 있는데, 생전 처음 만나는 작가, 작품을 우연처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꽤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주 운이 좋다면 꽤 괜찮은 작가와 작품을 만날 수도 있다.

 

모리사와 아키오는 그런 무작위 선택이 선사해준 특별한 선물과 같은 작가이다. 작가와의 첫 만남이 되어버린 <쓰가루 백년식당> 한 편으로, 이미 그는 나의 작가 리스트에 올랐다. 표지가 전해주는 따뜻함과 제목에서 전해지는 알 수 없는 포근함으로 무심코 집어든 책이다.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은 감동까지 전해준 아주 고마운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특별하고 무언가 강렬한 것들만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더 놀라워야 하고, 더 세어야 하고, 급기야는 더 엽기적이어야 한다. 적당한 예는 아니겠지만, 요즘 여성 아이돌그룹들이 경쟁하듯 옷을 벗어버리고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찾자면 심리학과 경제학, 정신분석학 등등이 동원되어야 할 테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것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슬픈 결과가 아닐까 싶다. 더 잘 팔려야 한다, 더 잘 눈에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결국 더 충격적이고, 더 비인간적인, 그런 방향으로 모든 것을 이끌어 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지치게 되고,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리 엽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반복되면 무감각해지고, 식상해진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의 마음만 더 메말라진다. 슬픈 현실이다. 이젠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는 이들이 바로 우리 현대인들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따뜻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리워한다. 옛 추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네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 전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 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최근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 작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떠올려보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평범한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 어떤 엽기적인 작품보다 더한 감동을 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중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읽었는데, 얼마나 공감하며 읽었는지 맞아, 맞아, 어머, 어머머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난 남잔데!

 

이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쳤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이 영화보다, 소설보다 더 영화 같고 또 소설 같기에, 다시금 원래 사람이란 동물이 그랬던 것처럼, 소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은 아닐까.

 

<쓰가루 백년식당>에서 내가 얻은 잔잔한 감동과 그리움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메밀국수집의 4대 장남 요이치,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 나나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박한 이야기는, 매일 매일 잔혹한 이야기와 그보다 더 잔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그마한 위로와 온기를 전해준다.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그들이 삶이지만,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바로 한없이 선량하고 평범한 우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그 흔한 악당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모조리 다 착하디착한 이들 뿐이다. 그렇다면 도저히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 착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작품은 재미있고, 또한 감동을 전해준다. 그렇기에 나는 따스한 위로를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이게 사람이고, 이게 사는 것이라고.

 

우연처럼 만난 모리사와 아키오라는 작가. 행운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아껴가며 하나하나 읽고 싶다. 그리고 이 작품이 전해준 것과 같은 따뜻함과 소박한 기쁨을 느끼고 싶다. 차가운 바람이 점점 더 움츠려들게 만드는 지금. 따스한 국수의 국물 맛과 같은 작품이었다. 아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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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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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이중적이다. 세상사람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중적인 것 아닌가, 라고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중적 인간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분명 이중적이다.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우선 마음이 꽤 물러 터졌음에도 짐짓 아닌 척 살아간다. 잔인한 장면을 차마 볼 수 없고, 공포영화는 아마 100% 혼자 볼 수 없을 만큼 겁이 많으면서도, 사람들과 있을 때는 꽤 강한 녀석인 것 마냥 행세한다. 그리고 가끔은 꽤 잔인한 척을 한다. , 그건 확신할 수 없겠다. 정말 잔인한 구석이 내게도 있을지 모르니까.

 

또 나는 눈물겨운 것을 보기 두려워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고통 받으며, 상처받으며 살아가는지 잘 알면서도,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이 사회의 가슴 아픈 모습들을 직접 겪거나 그것을 담은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애써 피할 때가 많다. 참 비겁하고도 연약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결국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래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때가 오면(!) 어김없이 마시고, 웃고 떠들며 속으로 울 때가 많다. 가끔은 정말 주책없이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내 주제에, 내가 뭐라고,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내가 뭐 대단한 녀석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부당하게 억압받는 이들, 가난하다고 무시당하는, 업신여김 당하는 이들, 훨씬 어린 것들에게 무시당하는 어르신들, 그리고 학대 받거나 버림받는 아이들, 심지어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아이들. 이런 이야기, 이런 모습, 이런 소리를 보고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 뜨거움이 몰려옴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통이 차마 두려워서, 외면하고자 할 때가 적지 않았다. 겁쟁이, 비겁한 녀석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 독서 스타일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야 옳다. 온갖 즐겁고 웃기고 신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한 그런 책들만 읽어야 한다. 현실 따위는 닭에게나 던져 버리고, 온갖 꿈같은 이야기들만 봐야 한다. 그게 맞다.

 

그렇기도 하다. 소설 읽기가 두려울 때가 여전히 많으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소설들은, 너무 아프다. 최근에도 어느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빤히 소설임을 알면서도, 분노하고 아파하느라 혼이 났다. 일가족 모두가 자살하는 장면이었는데, 죽는지도 모르고 마냥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다.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소설을 못 읽어! 라고 화를 냈지만, 결국은 다 읽어 버렸다.

 

<불안증폭사회> 역시 읽기 불편한 책이다. 도저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숨김없는 그대로의 드러냄이 너무 불편하다. 왜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와 불안, 상처와 좌절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그 진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들은 내 가슴을 몇 번이나 찔렀다.

 

저자의 말이 맞다. 우리는 멸종되어가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고 매일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혼은 늘어가고 결혼은 줄어들고.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이리도 힘겨워 할까?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을까?

 

당연히 우리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큰 잘못이 있다.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 속 불안을 더욱 크게 증폭시키는 9가지 심리코드를,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단 하나라도 우리에게 치명적이지 않은 게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 불행 올림픽이라도 열린다면, 우린 세계 3위 안에 당당히 들어가고도 남을 상황이다. 또 상황 파악 못하거나, 일부러 하지 않는 일부 어르신들은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하며 전쟁과 가난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뭐가 불행하냐고 되물을 것이다. , 안타까운 모습이다. 왜 전쟁에 버금갈 만큼 많은 이들이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지는 그 분들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병드는 것은, 일단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마음의 병을 온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해석하고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만 본다면 지금도 40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전부 다 심신 나약자이거나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어야 한다. 모두 다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독한 폭력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개인이 아픈 것은 그 사회가 아프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심리학이 최근 주목받고, 힐링이 어쩌고 하는 것도, 사실 개인의 아픔과 절망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사기에 다름 아닐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지극히 사기성이 농후한 이야기들이 잘 팔리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나마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주목하는 것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나가면 답은 영영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철저히 사회적 관점에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본다. 물론 개개인의 심성이나 삶에 대한 태도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정도의 폭력은 안 된다. 청춘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이 사회가 청춘들을 아프게 하고 죽여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닌가.

 

이중적인 나는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젠장, 내가 이런 책을 또 읽나봐라. 하지만 안다. 다시 읽을 것임을. 지독하게 잔인한 현실을 지독하게 똑바로 알지 못한다면 결국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현실에 기반 하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에 빠질 것이 빤하고, 현실을 외면한 채 마약과도 같은 자본주의, 상품화, 물신에 빠져 죽어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다가는 결국 그들도 내 고통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온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우린 이미 몇 번 가지고 있다. 때문에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저자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해야 한다. 끝을 위해서 말이다. 그 시작을 두려워하면 영원히 끝을 볼 수 없다. 그 시작을 위한 책이다.

 

난 이중적이지만, 나의 비겁함을 매일매일 인정하며 살아갈 것이다. 반전을 준비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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