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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분명 이중적이다. 세상사람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중적인 것 아닌가, 라고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중적 인간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분명 이중적이다.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우선 마음이 꽤 물러 터졌음에도 짐짓 아닌 척 살아간다. 잔인한 장면을 차마 볼 수 없고, 공포영화는 아마 100% 혼자 볼 수 없을 만큼 겁이 많으면서도, 사람들과 있을 때는 꽤 강한 녀석인 것 마냥 행세한다. 그리고 가끔은 꽤 잔인한 척을 한다. 아, 그건 확신할 수 없겠다. 정말 잔인한 구석이 내게도 있을지 모르니까.
또 나는 눈물겨운 것을 보기 두려워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고통 받으며, 상처받으며 살아가는지 잘 알면서도,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이 사회의 가슴 아픈 모습들을 직접 겪거나 그것을 담은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애써 피할 때가 많다. 참 비겁하고도 연약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결국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래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때가 오면(!) 어김없이 마시고, 웃고 떠들며 속으로 울 때가 많다. 가끔은 정말 주책없이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내 주제에, 내가 뭐라고,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내가 뭐 대단한 녀석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부당하게 억압받는 이들, 가난하다고 무시당하는, 업신여김 당하는 이들, 훨씬 어린 것들에게 무시당하는 어르신들, 그리고 학대 받거나 버림받는 아이들, 심지어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아이들. 이런 이야기, 이런 모습, 이런 소리를 보고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 뜨거움이 몰려옴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통이 차마 두려워서, 외면하고자 할 때가 적지 않았다. 겁쟁이, 비겁한 녀석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 독서 스타일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야 옳다. 온갖 즐겁고 웃기고 신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한 그런 책들만 읽어야 한다. 현실 따위는 닭에게나 던져 버리고, 온갖 꿈같은 이야기들만 봐야 한다. 그게 맞다.
그렇기도 하다. 소설 읽기가 두려울 때가 여전히 많으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소설들은, 너무 아프다. 최근에도 어느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빤히 소설임을 알면서도, 분노하고 아파하느라 혼이 났다. 일가족 모두가 자살하는 장면이었는데, 죽는지도 모르고 마냥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다.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소설을 못 읽어! 라고 화를 냈지만, 결국은 다 읽어 버렸다.
<불안증폭사회> 역시 읽기 불편한 책이다. 도저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숨김없는 그대로의 드러냄이 너무 불편하다. 왜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와 불안, 상처와 좌절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그 진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들은 내 가슴을 몇 번이나 찔렀다.
저자의 말이 맞다. 우리는 멸종되어가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고 매일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혼은 늘어가고 결혼은 줄어들고.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이리도 힘겨워 할까?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을까?
당연히 우리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큰 잘못이 있다.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 속 불안을 더욱 크게 증폭시키는 9가지 심리코드를,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단 하나라도 우리에게 치명적이지 않은 게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 불행 올림픽이라도 열린다면, 우린 세계 3위 안에 당당히 들어가고도 남을 상황이다. 또 상황 파악 못하거나, 일부러 하지 않는 일부 어르신들은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하며 전쟁과 가난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뭐가 불행하냐고 되물을 것이다. 뭐, 안타까운 모습이다. 왜 전쟁에 버금갈 만큼 많은 이들이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지는 그 분들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병드는 것은, 일단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마음의 병을 온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해석하고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만 본다면 지금도 40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전부 다 심신 나약자이거나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어야 한다. 모두 다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독한 폭력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개인이 아픈 것은 그 사회가 아프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심리학이 최근 주목받고, 힐링이 어쩌고 하는 것도, 사실 개인의 아픔과 절망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사기’에 다름 아닐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지극히 사기성이 농후한 이야기들이 잘 팔리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나마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주목하는 것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나가면 답은 영영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철저히 사회적 관점에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본다. 물론 개개인의 심성이나 삶에 대한 태도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정도의 폭력은 안 된다. 청춘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이 사회가 청춘들을 아프게 하고 죽여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닌가.
이중적인 나는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젠장, 내가 이런 책을 또 읽나봐라. 하지만 안다. 다시 읽을 것임을. 지독하게 잔인한 현실을 지독하게 똑바로 알지 못한다면 결국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현실에 기반 하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에 빠질 것이 빤하고, 현실을 외면한 채 마약과도 같은 자본주의, 상품화, 물신에 빠져 죽어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다가는 결국 그들도 내 고통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온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우린 이미 몇 번 가지고 있다. 때문에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저자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해야 한다. 끝을 위해서 말이다. 그 시작을 두려워하면 영원히 끝을 볼 수 없다. 그 시작을 위한 책이다.
난 이중적이지만, 나의 비겁함을 매일매일 인정하며 살아갈 것이다. 반전을 준비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