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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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인간은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협력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

 

일을 하고 있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불안한 시대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탄생한지 이미 오래고, 과연 내가 무엇 때문에, 왜 일을 하는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의 노동이 좋은 노동인지, 혹은 나쁜 것인지 생각할 여유는, 물론 없다.

 

역사상 가장 창조적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슈마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릇된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던 선구자적 인물이다. 현대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 죄악, 즉 종교화되어버린 경제성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정작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 되어 버린 인간의 본성, 행복을 되찾을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지금의 모순과 고통을 예언했던 특별한이였다. 그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죄악이 인간의 노동을 파괴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책은 그가 눈을 감은 1977년까지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했던 내용을 사후에 정리했다. 마치 강연장에 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대화체 그대로 책에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책의 곳곳에는 그의 성찰과 지혜와 철학이 빛을 발한다. 규모,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외눈으로는 그의 메시지가 다소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파국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고,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한 세대라 할 수 있는 30년을 훌쩍 넘겨 전해지는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이 뒤틀린 딱 그만큼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노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좋은 교육이란 무엇이어야 할까? 슈마허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지금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말년에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슈마허는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득 생각해본다. 지금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무의미하다못해 매우 나쁜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과연 그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인해 고통을 입을 이들을 생각해 봤을까. 우리 사회는 점점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고, 착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변태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우리는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로지 지식의 축적으로만 학생들을 평가하고 줄 세우는 시스템 속에서 과연 아이들은 자신의 공부가, 자신의 노동이 어떠해야 한다는 자각을 할 수 있을까. 오로지 타인을 누르고 올라서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현실의 공포가 더 강하게 그들을 억누르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 교육은 지금 정상일까.

 

정당한 노동이 천시 받고, 세습귀족들이 정직한 노동을 욕보이는 시대다. 가진 자들의 횡포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고, 그들에게 끝은 보이지 않는다. 대한항공 후진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대한민국 지도층, 지배계급의 본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그들은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마치 노예처럼 생각한다. 그런 이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는 것은 나름 아닌 우리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출한 정부 권력이다.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적정한 기술을 통해 결국 좋은 노동, 좋은 삶을 이뤄낼 수 있다는 슈마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단순하고도 명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물질의 축적과 소비의 무한한 반복으로 이 세상이 지탱될 수는 없다. 한 번 소비되면 다시는 재생될 수 없는 화석연료를 마구 낭비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속도를 더 내려한다. 흡사 지옥의 끝판을 보자는 것처럼 보인다.

 

매우 적긴 하지만, 더구나 지금과 같은 시대엔 더욱 찾기 힘들지만, 분명 더 나은 삶을 위한 지혜를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느냐는 온전히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슈마허의 철학과 사상이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메시지에 공감하고, 그와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어떻게 비관하든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파국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도저히 인간에게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해도, 멈춤 없이 생각하고 또 행동해야 할 이유다. 좋은 노동은 결국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전염성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다시금 진정한 노동으로 이끄는 시대, 임금이 아닌 노동 그 자체로 자신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진정한 교육. 그것은 우리의 손으로부터,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쉽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책임감과 고귀함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타인을 숫자로 평가하는 비정상적 사회에서 최대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우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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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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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명박 정권 5년을 돌아보면, 비단 그들만 빛나는(!) 업적을 거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대한민국을 살아낸 우리 모두가 몰라볼 정도로 커다란 성취를 이룬 5년이었다. 감히 자신할 수 있다.

 

우리는 연대의 소중함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억장이 무너지고 슬픔이 목에 차올라 컥컥거리며 눈물을 뿌리게 만든 정권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삶을 버렸고, 또 많은 이들이 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끝내 몸 둘 바를 몰랐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다. 연대의 소중함을,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는 이들이 하나 둘 모이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 꽤 많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정권에게 무너졌느냐, 우리가 패배했느냐, 이것은 어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대신 우리는 진정한 우리를 얻었고, 함께 어깨동무하고 웃으며 그들 앞에 섰다는 자체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끈질긴 희망 만들기에 시인 송경동이 있었다.

 

그야말로 온 몸으로 시를 쓴다는 표현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이.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어깨를 걸며 그 어디든 뛰어올라가 외치는 이. 시라는 것을, 글이라는 것을 종이 속에 갇힌 그 무엇이 아닌 펄펄 살아 꿈틀거리는 날것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불의에 맞서 싸울 용기와 힘을 전달한 이. 단 한 번도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보진 못했지만, 멀리에서 바라본, 그리고 전해지는 소식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시인 송경동이다.

 

평택 대추리에서, 용산 남일당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노동자들의 가족 앞에서, 그리고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김진숙 동지를 향해 가는 희망버스 속에서, 그의 시는 살아 꿈틀거렸다. 시인의 시는 단지 글로만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시가 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이의 시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또 다른 이의 시로.

 

꿈꾸는 자는 잡혀 가야 하는 시대. 그는 감히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새로운 사회와 인간의 연대를 위한 희망이었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하찮은 부속품이 아닌,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 노동자의 희망이었다. 거대 권력과 자본 앞에 한없이 무너지는 일회용품이 아닌, 저마다 우주를 품은 우리 자신 하나하나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 더러운 시대에 감히 꾸기 벅찬 꿈을 그는 끝까지 가슴에 품고, 시로 토해냈다. 때문에 그는 끝내 잡혀가고야 말았다.

 

책은 많이 아프다. 읽는 내내 숨죽이게 하고, 끝내 목울대가 아리도록 만든다. 그가 살아온 삶이 서럽고, 그가 시린 듯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는 이 세상이 서럽다. 수많은 송경동들의 외침이 아프고, 수많은 김진숙들의 외침에 귀가 먹먹하다. 이명박 정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권 앞에서 단지 서러운 몸뚱이 하나로 싸워온 이들의 그 눈물이 끝내 미치도록 아프다.

 

때문에 쉽지 않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 그가 드러내는 민낯의 세상, 더럽고도 기가 막히게 불의한 세상을 그대로 쳐다보기 두렵다. 하지만 진실에 눈을 감는다 하여, 이 억울함이, 이 죽음들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또렷이 우리 앞에 비친다. 때문에 살아남은 자는, 조금의 힘이라도 모을 수 있는 자는, 일어나 외치고 싸워야 한다.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에 대해 이의을 제기해야 한다.

 

한 편의 잔인한 블랙 코미디와 같았던 이명박 정권, 우리는 웃으며 싸우자고 다독였다. ‘쫄지마!’라는 말에는 그 어떤 슬픔도, 고통도, 패배도 그들로부터 받을 수 없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웃으며 싸우고, 키득거리며 저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웃들의,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는 결국,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우리는 그런 우리를 깨달았고, 이는 현재에도 이어져, 다시금 작은 눈을 반짝이며,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서로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겪으며 더욱 힘이 세졌다.

 

설상가상의 시대, 여전히 정답은 우물쭈물 거리는 시대, 세월호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크고 작은 아픔들이 여전히 백주에 폭죽 터지듯 우리 앞에서 춤을 추는 지금, 어쩌면 시인 송경동은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스러져야 할지도 모른다. 2011년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2년이란 실형을 선고한 현 정부를 보면, 그에게 또 얼마나 많은 고난이 닥칠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는 늘 그래왔듯, 연대의 소중한 끈을 부여잡고, 또 다시 시를 써내려 갈 것이다. 지금도,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온 몸으로 부여잡으며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시인 송경동. 불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은, 글쟁이는, 광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온전했다면, 저 거대한 자본과 거기에 굴종하며 기생하는 권력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아름다운 문장과 이야기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 시인.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나는, 그가 있어 눈물겹게 고맙고, 행복하다.

 

그처럼, 내 양심을, 영혼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기적이고, 이 세상엔 큰 복이다. 부디 아프지 마시라.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곳에 연대하러 가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그 간명한 마음들이 살아나면 좋겠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무슨 죄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냐고, 그리고 그게 무슨 그리 큰 어려움이냐고……. 국민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회적 자산들이 원래의 사람들 몫으로 나눠지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현대 민주주의가 그나마 실험된 게 몇백 년인데 계속 이런 내용적 봉건영주들의 시대를 가만히 놔둘 거냐고……. 이런 세상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더하기, 빼기의 단순 정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얘기할 거냐고 사람들이 마구 얘기하면 좋겠다.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던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다시는 조남호 같은 이들이 없게 만들겠다는 지역 희망의 연대운동들이 만개하면 좋겠다.

,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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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 - 직장인 자양강장誌
M25 편집팀 지음, 이고은 그림 / 미디어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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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장식하는 수퍼 울트라 들의 휘황찬란한 활약을 보며 분노하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당장 눈앞에 버티고 선 리틀 갑들 때문에 한없이 춥고 외로워지는 우리들.

 

너는 완생이고, 나는 미생이다백날을 떠들다가도 결국 상사에 대한 일심동체 모두까기 인형으로 또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들. 이런 웃픈현실 속에 등장하는 우리는 어쩜, 우리이기에 그나마 위로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 혼자만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기에.

소위 대기업은커녕, 일정한 규모와 체계를 갖춘 곳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 하다. 기껏 전 직원을 딸딸 긁어모아도 10여명을 넘나드는 규모 속에서 일하며 부대끼며, 그렇게 살아왔다.

 

때문에 정말 본의 아니게 디테일엔 강하지만, 스케일엔 압도(!)당하며 살아왔다는 자체적인 평가가 가능하겠다. 그에 따른 장단점이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장점만 쪽쪽 흡수하며 살아왔다고, 스스로 세뇌하며 다독인다. 꼭 큰 조직에 있어야만 클 수 있는 법은 아니라고 우기면서. 하지만 내 키는 여전히 변함없이 짧다.

 

김대리-직장인 자양강장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카툰과 함께 우리네 소소함을 매우 소소하게 다독인다. 우리 삶을 그대로 스캔한 듯한 이미지들도 소박하게 빛난다. 매일 매일 사표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100% 공감 가능한 이야기들. 때론 살짝 찡해지고, 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여기에서 전해지는 위로는 공감동병상련이심전심이 만들어낸 극강의 하모니일 터. 미처 피하기도 전에 내 맘을 살며시 덮어준다. 차버리고 자면 배탈 난다며, 엄마가 덮어주던 꽃무늬 이불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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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당의 길 - 진보정치로부터 좌파정치로의 전환
금민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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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9, 통합진보당이 사라졌다. 정당 해산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일어났다. 우연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지 정확히 2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에게 감히 무모하게 저항하고 반기를 든 대가는 이처럼 참혹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시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사망선고를 내린다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다. 그 공기가 상당히 희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질식해 죽은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그 구분이 참혹하리만큼 애매하다. 물론 칼같이 진보와 보수로 누군가를, 어떤 집단을 구분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새누리당을 보수라 하기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을 진보라 하는 것도 모두 우스운 일이다. 전혀 보수 같지도, 또한 진보 같지도 않은, 그저 이익집단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정치 환경을 반세기 넘게 유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 안에서 진보 정치를 꽃피우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난관을 각오해야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지금껏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불가능한 도전을 멈춤 없이 지속했다. 통합진보당의 도전과 실패, 좌절 역시 그러한 무수히 많은 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때문에 통합진보당이란 이름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진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보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시 힘을 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책에서 저자는 진보를 버리고 좌파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좌파란 기존 진보 진영 내의 좌파를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 통합진보당 등이 일부 노동자를 대변했다면, 좌파당은 비정규직 노동자 등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내세운다. 좌파는 신자유주의 종식 이후 대안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나마 미약하게 존재하던 진보세력을 대변하던 통합진보당이 사라지려는 지금, 저자의 주장은 더욱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종식시킬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가 좌파당을 부르고 있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현재 야권 세력 중 진보라 불릴 수 있는 정당은 많지 않다.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등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 정동영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질 야권신당이 곧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 색깔을 보여줄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 모아도 그 세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야권통합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철옹성 같은 새누리당의 위세 앞에, 또한 기득권 지키기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모양새를 보면 야권통합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확실히 깨달았듯, 통합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획일적인 통합의 과정에서 더 큰 갈등과 분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거대 양당구조에서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우리 정치 지형에서 제3의 정치 세력은 언제나 소외되고, 또한 대선 등에서 야권에 힘을 분산시킨다는 억울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새누리-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양당 구도가 머릿속에 각인된 이들에게 제3의 정치세력은 언제나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양당구도 내에서 새로운 제3의 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경직되고, 또한 권력 지향적인 양당의 구태의연함을 깨버리고, 진정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다.

 

2012년 발간된 책은 당시 시점에서 2014년 말까지 좌파당을 건설하고 그 당을 반석 위에 세울 때의 과제, 전략, 경로 등을 담았다. 저자가 좌파당 건설의 시점으로 생각한 2014년 말에 오히려 통합진보당이 해산결정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이자, 시대가 낳은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진보를 넘어 좌파를 꿈꾸어야 할 시기에, 오히려 기존 진보세력은 붕괴된 모습. 여전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갈수록 신자유주의 시대가 불러올 파국이 눈에 보이고 있다. 양극화는 더욱 벌어질 것이며, 가계부채라는 시한폭탄은 더욱 빨리 째깍 거린다. 남북관계의 경색은 새로운 경제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절망감만을 안겨주고 있고, 어설픈 규제개혁과 위험한 부동산 정책도 파국을 앞당기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명박 시대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목격했다. 저자는 더 이상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케인스주의 등 기존의 해법으로는 소생이 어렵다고 말한다. 금융·부동산의 규제·과세와 주요 금융회사의 사회화를 통한 급진적·좌파적 방법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더 이상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치부되지 않는 지금이다. 진보의 싹마저 찍어 누르는 시대, 종북, 레드컴플렉스가 여전히 미쳐 날뛰는 지금, 과연 우리는 진정 노동자들을 위한 좌파당을 만들 수 있을까.

 

희망은 언제나 곁에 있다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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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
로버트 F. 케네디 지음, 박수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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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12, 미국과 쿠바는 전격적으로 국교 정상화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정확히 1217일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던 1962년 이후 52년 만에 이뤄진 대사건이다. 향후 추이를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된 미국의 대 쿠바 봉쇄정책이 결국 실패했음을 전 세계 앞에 스스로 인정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196210, 미국과 쿠바를 둘러싼 미사일 위기는 인류의 멸망까지 불러올 수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당시 이른 바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 간 일어날 수 있었던 최악의 시나리오, 즉 핵전쟁은 분명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재앙, 종말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비극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전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위기의 중심에 있었던 양국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국교 정상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제 공식적으로, 세계 모든 국가 중 미국과 맞서고 있는 국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유일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폭발력과 진행 과정의 극적인 성격으로 일반적 외교 갈등을 뛰어넘는 특별함을 가지게 되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가 책과 같은 제목으로 제작되었고, 정치외교학 분야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평가는 다양하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과 냉철한 판단력에 대한 평가가 가장 많다. 그가 인류 공멸의 길이 될 수 있었던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은 분명 평가되어야 한다. 아무나 보여줄 수 없었던 용기를 보여준 탁월한 리더였다.

 

아울러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한 미 고위 인사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들의 뛰어남과 애국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의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 역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를 전해준다.

 

그러나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최고위 인사들의 의사결정 과정이 비밀리에 이뤄졌고, 그 안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 등 의회가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이라는, 그것도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선택 과정에서, 정작 의회는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오직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최고위 인사들이 모여 결정했다는 사실.

 

더구나 미소를 제외한, 여기에 쿠바를 포함시킨다 해도 초기 논의 과정에서 여타 국가들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 어떤 나라도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으며 후에 유엔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쿠바 사태를 밝히기 전까지 아무런 정보도 입수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례가 단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1994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할 준비를 거의 다 갖추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 맞닿아 있는 우리는, 당장 핵 참화를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무기력했고, 국민들은 전쟁 발발의 위기조차 제 때 느끼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우리의 상황은 그때보다 크게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증폭될수록 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가장 큰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다. 하지만 외교적 무능과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결국 우리 목숨을 남에게 일방적으로 맡기고 있는 셈이다. 광복 70주년이라는 말을 되짚어 보면 분단 70년이자,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70년이라는 말과도 같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미국과 쿠바의 역사적인 국교 정상화 개시 선언과 62년의 미사일 위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몇 가지 남겨준다. 먼저 뛰어난 리더십의 중요성이다. F.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 책의 저자인 로버트 F. 케네디와 같은 리더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리고 비록 적어도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선택한 오바마와 같은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의 리더들에게 말이다.

 

또 하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전쟁, 특히 핵무기가 사용되는 전쟁에 대한 권한을 대통령에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또한 현명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긴박하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대통령은 국회나 국민의 동의 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때론 현실적으로 국회의 동의나 관여가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을 미리 내릴 수도 있다. 이는 매우 어렵고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난해한 문제다. 어쩜 미국의 전쟁 역사는 이처럼 대통령과 의회 간 힘겨루기에서 누가 우위를 점했는가에 따라 결정된 것들의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권력 작동과 의사결정의 시스템을 두고 여전히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깊은 연구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떤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일지, 어떤 방법이 보다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 여전히 외교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창피한 우리 외교 수준과, 또한 리더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만드는, 동아리나 이익집단 수준의 우리 정부를 보면 한 없이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분명 우리 역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를 보면, 어처구니없게도 MB정권이라는 사상 최악의 정부에게 구관이 명관이라는 표현마저 사용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부질없는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살피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쩜 죽을 때까지 구관이 명관이라는 헛소리만 늘어놓다 멸망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가 원만히 이뤄졌음 한다. 미국의 굴욕도 쿠바의 항복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양국이 동등하고 공정한 모습으로 우호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그리고 미국의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며 밝혔던 내용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 쿠바북한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음을, 미국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한 번 개인적으로, 결국 2013년 서평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2015년을 덜컥 맞았다. 글쓰기의 두려움이 서평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녹이려 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그대로 두자니 얼어 죽겠다. 난처함도 상습이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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