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쾌변독설
신해철.지승호 지음 / 부엔리브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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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오버액션 맨

『우리는 황혼이 지는 절벽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자와 같다. 그래서 당장 굴러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위험하고 위태위태하고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인생 전체가 파탄 날 위험도 감수해야 되는 놈들이다.』- 298p

수많은 광신도와 동시에 수많은 안티를 가지고 있는 뮤지션. 1988년 한국 대중 음악계에  불벼락같이 등장해 이후 20년 동안 25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뮤지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철저한 프로 근성,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집요한 탐구정신으로 발표하는 앨범마다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는 음악계의 천재이자, 이단아. 바로 신해철을 평가하는 수식어들이다.

서평을 쓰기에 앞서 일단 내가 신해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때문에 그에게 그 어떠한 이유든지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글 읽기를 여기에서 멈춰주길 바란다. 물론 넥스트와 신해철의 광신도는 아니기에 근거 없는 숭배와 찬양은 없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신해철은 분명 이야기할 것이 많은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윗글은 신해철이 평소 후배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이라 한다. 물론 신해철이 저렇게 부드럽게 말했을지는 알 수 없다.
“씨바, 좆나게 해도 그 절정을 잡을까 말까하는 것이 음악이야. 알간?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간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지 않을 거면 당장 때려치우고 딴 짓할 궁리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 야그를 알아묵겄냐. 이 썩을 종자들아~”
이러지 않았을까?^^ 
 

 

신해철은 일단 음악을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 그건 그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짓이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평소 슬리퍼 질질 끌며 동네 만화방이나 피시방을 기웃거리던 건달은 사라진다. 철저한 프로정신, 그리고 실험 정신으로 그는 매번 새로움을 창조한다. 때문에 그의 앨범들은 시대를 앞서 가는 명반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수많은 이들에게 혹평을 받는다. 그는 한국 음악사에서 신해철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엑, 그런 걸 자기 입으로 어떻게 얘기를 해요. 알아도 얘기 못 하고, 몰라도 얘기 못 하죠. 한국 음악사에 있어서 저의 의미는 얘기할 수 없지만, 제 개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죠. 제 세대, 제 또래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팝매니아, 그들 중에서도 헤비메탈에 경도되어 있던 한 명한테 우연히 실제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닥치는 대로 휘두른 거지. 정말 제가 무한궤도서부터 지금까지 음악을 만들어온 과정들을 보면 이건 총기 난사예요.(웃음) 레드 제플린과 딥퍼플과 주다스 프리스트와 비틀즈를 사랑하고 경배하던 그 수많은 아이들 중 한 명에게 정말로 총이 주어진 거예요. 어, 이게 내 손에 들어왔어. 어떻게 해. 난 아마추어로 밴드를 하면서 내 음악을 한 번 녹음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 군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인데요. 저한테 주어진 총의 기종 이름은 우지 기관총도 아니었고, K-1 소총도 아니었고, 시퀀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총기 난사를 했죠. 발라드야, 펑크야, 테크노야, 메탈이야 하면서 쿠하하하, 이쪽에 총 갈기고, 저쪽에도 갈겼는데, 또 총알이 들어오네요. 그래서 신나게 놀았죠. 그랬더니 제 세대에서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오, 씨발 누가 하나 했더니 니가 하는구나, 오냐, 기특하다’하는 거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시기했던 해죠. ‘하필 왜 저 덜 떨어진 새끼한테 저런 게 주어졌을까?’하고.”(웃음) - 251~252pp

이걸 겸손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역시 또라이~큭큭” 이래야 하는 걸까. 암튼 신해철은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조리 다 해보려고 작정한 뮤지션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동안 발표한 앨범들(물론 넥스트를 포함한) 모든 그의 앨범들은 다양한 장르의 실험으로 가득하다. 그의 저주받은 걸작이라 평가되는 《monocrom(1999)》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그만큼 노력하고 또한 노력하는 뮤지션이다. 일단 그 부분이 내가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이다. 사실 지금 가요계를 보면 날로 먹으려는 인간들이 좀 많은가. 아니 그 전에 뮤지션인지, 예능인인지도 구분이 모호하다.(도대체 예능인은 뭔 뜻이냐? 노가리 잘 까고, 쉰 소리 잘하는 이들의 총칭?) 붐이 가수인가? 쇼 게스트 전문인가? 아 이렇게 말하면 붐 열 받겠구나.^^ 열심히 하세요. 

내가 락 음악을 사랑하는 것도 거의 같은 맥락이다. 락은 누구 하나의 힘만으로는 절대 절대! 만들어질 수도 없거니와 연주 자체가 불가능하다. MR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릴 수 없다는 소리다. 요즘은 립싱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이 되어있으니 좀 낫지만 조금만 과거를 돌이켜보라. 역겨움이 솟구친다. 내가 가요 프로를 잘 시청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짜증난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 국내 유일의 인터뷰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다니는 지승호가 총 7번에 걸쳐 신해철과 대화를 나눈 것을 옮긴 것이 이 책이다. 쓸데없는 지 잘난 척, 아는 척 하지 않고도 충분히 솔직하고 지적인 인터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승호는 『인물과 사상』그리고 기타 몇 권의 인터뷰집으로 내겐 친숙한 이다. 그가 신해철과 나눈 7번의 인터뷰는 역시나 재미있었고, 또한 단순한 농담 따먹기, 혹은 신변잡기가 아닌 진지한 이야기, 때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었다. 솔직히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그리고 멈춤 없이 읽은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지승호는 신해철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한다.
“그는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거침없이 다 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 반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왠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다. 그의 음악 여정을 살펴보면 그는 한 번도 쉽게 가려하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 나은 그 무엇을 찾으려 했다. 그 과정이 어느 정도로 고독하고 힘들었을지, 그리고는 무대에 올라 “씨바, 그림 구경왔어? 다 안 일어나?!!”하며 몇 시간동안을 뛰어다닌다. 미친 놈 마냥. 

〈페이퍼〉의 황경신 편집장은 신해철과의 인터뷰 후에 이런 표현을 했다.
“커트 코베인은 영웅이 되지 않으려고 목숨을 끊었고 서태지는 영웅이 버거워 떠났다. 혹자가 신해철을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또는 혹자가 신해철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마음대로 찬사하고 비난하는 동안 그는 ‘음악만 하면 되는 억세게 운 좋은 놈’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사는 거지’정도로 삶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신해철에 대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아는 사람은 시대를 통틀어 무척 드물다. 그리고 음악으로 길을 찾고 길을 만드는 사람은 도무지 독재나 강요가 통하지 않는 음악의 아름다운 특성 때문에라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당신이 알고 있던 신해철은 어떤 인간인가. 

- 한국 음반 시장의 몰락과 MP3

“저는 제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도, 착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종류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무사도’에 대한 로망이랄까, 그런 치기 같은 것들이 저를 이루고 있는 부분 중에서 꽤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 그런 책들이나 영화를 보면서, 제가 전쟁의 역사나 구체적인 어떤 전쟁의 전술론 이런 것까지 굉장히 관심 깊게 보는데요, 그 중에서도 저를 감동시키는 장면은 ‘죽을 줄 뻔히 아는 싸움’에 나가는 거였거든요. 예를 들면 다케다가가 멸망할 때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에서 다케다가의 유명한 기병대들이 시대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집 소총 대형에 의해서 전멸하지 않습니까? 이미 일진이 전멸한 것을 보고 마지막에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신들, 늙은이들이 칼과 칼을 맞대면서 “지옥에서 만나세”하면서 돌격하잖아요. 분명히 지는 싸움인데 나간단 말입니다.” - 14P

그는 이처럼 승부가 뻔히 보이는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이 여타 뮤지션과 그를 차별화시킨다. 그는 굳이 많은 손해와 비난을 감수하고도, 사회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문제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2002년 누구라도 이기리라 생각지 못했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그가 막상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한 첫 번째 행동이 청와대 앞에서 파병 반대 1인 시위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또한 그는 대마초 비범죄화 문제, 간통죄 폐지, 체벌 금지 문제를 비롯하여 사회의 민감한 문제(대부분 불합리성과 전근대성을 가지고 있는)에 대해 소수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MP3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확고하다. 2000년 내놓은 프로젝트 앨범 《Theatre Wittgenstein : Part1- A Man's Life》에서 신해철은 “다음 앨범을 만들 때 심각한 지장을 분들”이라며 “이 판 안사고 MP3 다운받는 분들과 그 파일 올려놓는 씹새끼들. 나는 흙 파서 판 만드냐?”라고 적고 있다. 또한 무릎 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는 “MP3 다운받아 음악 듣는 분들은 좀 닥쳐주셨으면 좋겠다”고 일갈했다. 역시 그답다.

그는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의 몰락 원인이 단순히 MP3의 등장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뮤지션의 문제, 환경의 문제, 정부의 책임 모두를 따져야 하지만, 정작 대중의 책임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중은 전지전능자 시점에서 좋네 나쁘네를 얘기할 뿐인데요. 자기들이 주도권을 쥐고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은 가지지 않는 단 말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이 이렇게 된 것에 대중의 책임은 없느냐고 했을 때, 대중들은 면책이거든요. 그러면서 전능자의 시점에 올라서서 야단만 친다구요. 싸가지 없게도.(웃음)” - 28p

“거기다가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속물근성, 수전노 근성이 있습니다. 예술비, 문화비 지출을 자기 인생에서 맨 마지막에 놓아버리잖아요. 예술이나 문화나 이런 걸로 인해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만족에 비해 사용하는 돈은 ‘최대한’ 아끼겠다는 건데요. 대중이 거기다 쓰는 돈을 ‘최대한’으로 아껴버리면 뮤지션이 죽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길거리 악사가 없는 이유를 저는 그렇게 얘기해요. 행정적인 이유로 길거리에서 연주를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연주를 해도 돈을 놓고 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외국 같은 경우 그런 룰이 묵계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준이 ‘반곡’이거든요. 거리의 악사 앞에서 노래를 들을 때 노래의 반 정도를 들으면 한 곡을 다 들은 것으로 치고, 최소한 동전을 내놓고 가야 되는 정도의 불문율이 대중에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 곡, 스무 곡을 들어도 한 푼도 안 내놓으니까 당연히 거리의 악사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죠. 거기다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태도, 연예 스타들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농공상 개념으로 따졌을 때, 재인-광대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있구요. 그러니 엔터테이너들은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인이고 우리가 아니면 너네는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고,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고, 너는 니가 표현하는 것으로 살고 있고, 나는 거기에 공감을 하니까 우리는 친구’라는 방식이 결코 자리를 잡지 못하는 거죠. MP3에서부터 최근의 성향까지 얘기하면 할 말이 더 많겠지만 이러한 ‘대중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을 안 하더라구요. - 30p

이밖에도 신해철은 날카롭게 대중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어쩌면 대담한 목소리일 수도 있다. 자신 역시 대중의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용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음악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상품, 듣다 지겨우면 버리는 상품 따위로 생각하는 풍토, 그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대중들의 잔악함과 오만함을 그는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음악을 하는 것, 그것이 꼭 대중성을 확보하고 빅 히트를 쳐서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영국에서 내가 배운 게 뭐냐 하면 밴드는 수단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고 생활이라는 거거든요. 밴드 생활을 하다보면 음악은 그냥 나와요. 그러니까 얻을 것도 얻어 보고, 누릴 것도 누려봤는데요. 나는 어차피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는데, 가장 외형적으로 성공할 형태를 취할 이유도 없어지는 거구요.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고 내가 즐거울 형태를 찾는 데다가 주력하게 되는 거죠. 이 음악이 생활로서 나에게 가능하게 할. 그러면 이제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생각할 시간에 ‘내가 이걸 어떻게 느끼는가, 내가 뭘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는 데다가 시간을 다 써버리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대중을 읽는 감각은 둔해지겠죠. 대중을 읽는 감각이래야 다시 줄칼로 갈고 때 좀 벗겨내고 요즘 히트 친다는 노래 몇 곡 샘플 채집해서 들어보고 시장 흐름 죽 한번 분석해보고 이러면 나오겠지만, 됐다는 거거든요.”(웃음) - 318p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오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뮤지션이라면, 아티스트라면 대중의 평가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Queen)에 대한 평가가 기억난다.

“그들은 대중에게 끌려 다닌 것이 아니라 대중을 이끌었다”고.

- 나부터 변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책을 통해 신해철은 대한민국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한다. 아이들을 단순한 대입기계로 만드는 교육 체계, 그는 교육부를 사육부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독교의 오만함. 언론의 무책임함. 문화 산업에 대한 정부의 무식한 마인드 등. 그가 내뱉는 말들은 찬반의 여지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신해철의 온전한 생각이기에,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진심이 느껴지는 비판이다. 

과거 신정아 씨 누드 사진 언론 공개 부분에서 그는 “미친 거죠. 이건 정말 경악이에요. 다 잡아넣어야 합니다. 문화일보 새끼들, 사장까지 싹 다 잡아넣어야 돼요”라고 흥분하기도 하고, “비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누릴 자유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을 비기독교인이라고 보지 않고 반기독교인이라고 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정치가 무능하다는 것은 국민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한류에 열광하는 동안 정작 자국 문화 시장이 붕괴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국가와 국민들을 질타한다.

 

“지금 상황이 어떤 건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정치의 논리로 ‘한류’하면서 워~하고 몰려가는 거기에 호응을 해줘야 될 것 같고, 한 마디 해주면 세련된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자국 시장이 얼마나 개판인지는 지나치면서 아주 아작을 낸 거죠. 실제로 한류, 한류 하는데 그 한류가 거품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미류라는 말은 안 쓰잖아요. 그런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류가 존재한다면 한류가 센가요? 미류가 센가요? 그 다음에 일류가 센가요, 한류가 센가요. 문화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진 않기 때문에 수십 년을 우리나라에 일류가 크게 작게 끊임없이 침투를 해왔잖아요. 심지어 닫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랬는데 잠깐 한류가 빛을 봤다고 해서 호호닥닥 날뛰는 것이 웃기고, 이제 슬슬 한류가 꺾이잖아요.” - 61p

지승호는 신해철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신해철은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어야 하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같이 바꿔나가자’고 끊임없이 말한다며,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이미지 실추에 신경을 쓸 겨를 없이 발언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의 행동과 발언으로 충분히 우리에게 진실되게 다가왔다. 

노예의 자세와 너무 흡사해서 구두닦이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신해철. 하지만 우리는 그가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 편하게 살다가 음악도 편하게 하는 ‘억세게 운 좋은 놈’으로 알고 있다. 이제 신해철 자신도 이런 오해를 “그저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인다고 한다. 끊임없이 한국 음악계를 업그레이드 해 온 신해철. 동시에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그는 천상 싸움꾼이자, 광대다. 하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말처럼 그가 최소한 비겁하지는 않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어가며 느낀 신해철은 그의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최소한 잘 살기 위해 구라까는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럽고 추악한 세상,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서슴없이 구라를 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들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신해철은 독종이고, 희귀종이고, 암튼 연구와 관찰의 대상이다. 
 

 

동시대에 이런 인간이 같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직까지 무식한 인간들이 너무 많아 넥스트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나 평가가 전무한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그의 저주받은 걸작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날이 오리라 믿으며 우리의 대마왕이(참고로 난 신도는 아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좋은 음악과 가슴 후련한 욕설과 분노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변두리 인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 어차피 상관도 안 하겠지만, 파이팅이다.^^

“거국적으로 봐서 나부터 변하고 온 세상이 변해야 편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사실 제가 사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악플다는 새끼들이 웃긴 새끼들인 게 저는 제가 가진 다른 카드를 안 쓰고 있다는 거거든요. 신해철이 가진 다른 카드는 뭐냐, 나 혼자 좋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싶은 거였다면 이런 멘트 안 하고, 대중들 비위에 맞는 멘트나 찍찍 날리고 평소 소신과는 달리 남이 원하는 대답이나 하고 그러다가 이민 가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조건이 되어 있는 나라로. 내숭 떨고 계속 돈 모은 다음에 이민 가면 되는 건데, 남들한테 욕먹어가면서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고 이런 얘기 뭐 할라고 하겠어요?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거 아닙니까? 기왕이면 여럿이 잘살아보자는데.”(웃음) - 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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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드림 8.15 해방공간 시리즈 4
박헌영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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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공산당) 인민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를 요구하며, 일부 소수 특권계급의 이익만 옹호되고, 인민의 절대다수의 근로대중의 물질적 생활이 보장되지 못하며, 도시 소시민, 인텔리겐치아 등의 불안한 생활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정치는 절대로 배척합니다.

……(중략)
정치가라고 자칭하면서도 정치를 다만 자기의 특권을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하며, 정치를 민중생활의 보장을 위하여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권세를 그대로 자기 수중에 넘겨 맡아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압박착취의 방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근로대중을 압박하려 하는 것입니다.
……(중략)
반동분자는 듣기 좋은 말로 민중에게 아첨하며, 음흉한 계획안을 민중 앞에 내세워 민중을 자기 앞으로 끌어 그 원조를 받아 정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하여 정권을 잡는다면, 그 음흉한 계획안과 듣기 좋은 말씨는 집어치우고 자기네 한 계급과 한 층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민중을 착취, 압박할 것입니다. 
 

- 42~44pp

윗글은 1946년 2월15일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의 직함으로 발표한 “민생을 보장하는 정치”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역사의 공산당이 과연 박헌영이 꿈꾸었던 사회를 만들었는지는 우선 제쳐두더라도 50년이 더 지난 지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본다면, 아직 박헌영의 말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뼈저리게 말이다.

박헌영은 불세출의 혁명가였다. 20세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조선공산당을 만든 주역이었고, 몇 차례에 걸친 투옥과 석방의 와중에도 모스크바 유학에 올라 호치민 등 세계의 청년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의 천재성과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어 그는 해방 후 공산주의 세력의 박멸을 꾀하던 미군정과 남한 내 민족주의 및 보수 세력의 공세로 북으로 넘어가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수상과 외상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직후 전쟁 패배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야 했던 김일성에 의해 미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55년 사형 당한다. 북한의 역사에선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에서는 지독한 골수 빨갱이로, 그렇게 박헌영은 우리 역사의 경계 밖에서 지금껏 서성이고 있었다.

이 책은 1946년 8월15일 광복1주년을 맞아 박헌영이 월북하기 한 달 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광복 63주년을 맞은 2008년 8월15일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긴 시간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박헌영은 여전히 너무 먼 존재이고, 또한 금기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그가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긴 이 책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희귀하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혁명가,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대한 정당한 역사의 평가는 계속 시도되리라 기대한다.

지금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리라 생각하지만, 가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박헌영을 소재로 했다는 어느 교수의 주장이 있었다. 그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과 인간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겹쳐지는 부분은 상당하다.

최근에 와서야 우리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또는 최근까지 국가라는 폭력에 어이없이 희생된 이들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생각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덮으려고만 하지 말고, 다시 꺼내야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무조건 외면으로만 일관해왔던 국가 권력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또한 역사의 정당한 흐름이었다. 이러한 노력들로 제주의 눈물이, 수많은 조작 사건들이, 의문사들이, 하나 하나 그 진실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제주도민들에게 비록 반세기가 지난 후였지만 국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고, 과거 일방적으로 빨갱이라는 오명 하나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 투쟁의 노력들이 가려졌던 이들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민족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독립을 위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잡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은 안 그럴까 생각 들지만, 이러한 느리지만 소중한 전진도 이제 다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지금 정부는 오직 경제만이 살 길이라며, 은근슬쩍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 지금 현재의 남북관계도 그야말로 “깽판”치는 정부가 과거 다시 돌아보기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인권도 “개소리 말라”며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폭 축소한 정부가 과거 이미 죽은 이들의 “인권”이 중요할리 없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서민, 인민들의 삶도 “닥치고 찌그러지라”고 하는 정부가 과거 죽은 서민, 인민들의 삶이 대단할리 없는 것이다.

박헌영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것이다. 그가 결국은 레닌식 엘리트주의에 빠져 스스로 몰락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불꽃처럼 살다간 비운의 혁명가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떻다는 평가는 그야말로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알든 모르든 간에 그의 남겨진 글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 적지 않은 듯하다.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발전해 왔는지, 진보해 왔는지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정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인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진보와 발전, 삶은 무엇인가.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런 것은 아닐까.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그의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충분히 살펴본 후에야 그나마 가능하다. 이 책 한 권으로 그를 설명할 수는 없다. 소련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 또한 김일성 못지않은 개인숭배 등 박헌영의 어쩔 수 없는 한계들이 이 책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동시에 이념과 사상을 차치하고 바라본다면 그의 국제 정세를 보는 뛰어난 감각과 국내 정세의 전망 등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문장 자체로서도 뛰어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오른쪽을 지향하는 피플 들이 모여 영차 영차 힘을 모아 현 대통령을 당선케 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때문인지 그들이 소위 바른 역사라고 당당히, 거침없이 들이댄 책들을 보면 그야말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다 무식의 소치인가, 아님 영혼을 팔았기 때문인가. 어차피 대학 입학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에 건성건성 만든 것인가. 국정교과서라는 설정 자체가 썰렁한 개그라 다 없애야 한다는 수준까지 발전해야 할 판에.

그래서 더욱 “조선 인민에게 드림”과 같은 책들이 반갑고 소중하다. 욕을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지껄여야 한다. 상식이요, 그게 예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들은 죽어 마땅하다. 천륜을 배반하는 것이기에.
이런 책들이 더욱 많이 나와 적어도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만큼은 최소한의 객관성이라도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건 사족이다.

지난 3월20일 행정안전부는 국가인권위원회 정원과 조직을 21.2% 축소하는 개편안을 확정했다.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개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용산 참사 피해자 유족들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장례를 못 치르고 있다. 사형제도를 다시 실시하자는 광기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중동에 가면 미국의 하수인, 심하게 말하자면 개로 취급당해 테러의 대상이 된다. 올 해 1월 취업애로 인구가 330만 8천 명이었다. 강압적인 주입식 교육, 대학만을 위한 교육에 더 이상 못 견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억지로 군대 끌려간 우리 아들, 동생들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처먹으라고 던져준다. 이런 나라에서 인권위원회를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축소한단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악”의 평범성을 “보편성을 가장한 광역성”으로 표현한 바 있다.

 

도대체 훗날 역사가들은, 아니 귀찮게 훗날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 바로 다음 세대들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그때 넌 뭐했냐 이 새꺄! 하고 물어보면 당당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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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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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역에서 용산참사 추모집회가 끝나고 시위대 일부가 경찰과 충돌해 경찰 10여 명이 폭행당하는 일이 있었다. 전후좌우, 지붕과 마루 밑까지 살펴볼 생각은 안하고 정부와 여당, 그리고 냄새나는 주요 언론들은 다짜고짜 집회 참가자들을 공권력에 도전한 불법 폭력 세력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경찰이 매 맞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한탄한다. 하지만 난 경찰이 매 맞는 나라가 국민들이 맞아죽고 불타죽는 나라보다는 나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죽는 것보다는 매 맞는 것이 낫고, 적어도 경찰은 국민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있던 그날, 경찰은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시위대를 가로 막고 연행하려 했다. 이른 바 비폭력적, 평화적으로 끝난 집회에서 뒤늦게 경찰이 제지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난 그 자리에 없었기에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이른 바 공권력이 행해온 행동을 돌이켜볼 때,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유족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부당한 공권력으로 죽어 간 가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다. 하지만 부당하게 공권력을 휘둘러 국민을 살인한 정권은 오히려 죽어간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불법 폭력”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고 있다. 

검찰이 보여준 행동도 역시 꼴 같지 않았다. 최근 신영철 대법관의 삽질을 보면 더욱 잘 알겠지만, “권력의 개”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님을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경찰과 검찰이 이미 3살 때부터 신용을 잃은 지 오래인 나라.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왜 책 이야기는 하지 않고 딴 소리만 지껄이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책이 내게 전해준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정부가 혹은 공권력이 “부당한 폭력”이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폭력”이 정말 “부당한” 폭력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혹은 모른 척 할 수도 이고, 때로는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폭력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솔직히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저자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폭력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은 어떠한 행위를 “정당한 폭력” 혹은 “부당한 권력”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주체는 바로 그 사회,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한낱 썩어빠진 정부 따위가,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대통령 한 명이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을 때려잡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다만 공권력 행사라고 떠든다. 하지만 힘없는 국민이 부당한 권력에 맞서 작은 몸부림이라도 칠라치면 그건 한 순간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가보네”라고 생각해버린다. 사실 생각도 안 한다. 그냥 외면한다고 할까. 물론 폭력이 폭력인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띨띨한 남정네들이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와, 몸살나게 생겼네~!”라고 지껄인다면, 남자들끼리는 전혀 폭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여성이나 다른 모든 여성에겐 엄연한 폭력이다. 이처럼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가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때문에 정부가 아무리 공권력 행사라고 떠들어도 당하고, 죽어가는 국민들이 그것을 폭력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폭력.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미친 소가 먹기 싫다고, 온 나라를 삽질로 아작 내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한국을 고스란히 미국에 바칠 수 없다고 촛불을 들고 일어난 국민들은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하는 정부는 그것이 가공할 폭력으로 느껴졌다. 광화문 한 복판에 산성까지 쌓아올리고 국민들을 무서워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느꼈다. 

민주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을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고 동의에 근거해서 유지하는 체제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이 되지 않고 끊임없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권력이 되고자 하는 체제”다. 또한 “폭력 여부는 여전히 국가의 법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그 법은 더 이상 고정적이지 않으며 언제든지 법적인 절차에 의해서 수정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이 과연 이러한 설명에 부합하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갖 악법으로 국민들을 강제하고 하고, 국민들의 삶과 직결된 법보다는 재벌 보호와 1% 특권층을 위한 법 만들기에 올인하고 있는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민주주의 국가는 폭력의 독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이른 바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바로 상징적 권력/폭력이다. 비정치적이고 비물질적, 비경제적인 모습으로 둔갑하여 사람들 스스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게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최근 이명박 정부의 국제중 설립추진, 유명 사립대학의 ‘내맘대로’ 선발 등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한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교육 행위는 자의적인 권력을 통해서 문화적 자의성을 주입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징적 폭력이다.”

하지만 워낙 솔직하고 속도를 좋아하는 이명박 정부는 그런 겉치레를 사양한다. 그냥 무식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정부의 부당한 폭력이 “폭력”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규정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가 일어난다.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국민들과 처절한 전쟁을 한 것을 제외하면 이명박 정부의 한 일은 제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공진성의 “폭력”은 폭력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에 수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책 한 권으로 인간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폭력의 이미지가 순간 바뀔 순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준다. 과연 우리가 당하는 것이 폭력인지, 우리가 대항하는 것이 폭력인지, 그리고 그 규정을 누가 하는지 말이다. 

저자는 2008년 촛불집회의 폭력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폭력 규정으로 시작해 근대 국가와 관련하여 폭력의 개념을 정치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선동가, 혹은 혁명가가 아닌 학자이기에 판단은 물론 독자에게 맡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똥을 똥이라고 하면 잡혀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이 빌려준 권력을 잠시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국민들에게 똥을 금이라고 강요한다. 법을 수호하는 사법부가 나서서 범죄자를 국가 경제를 지키는 영웅으로 떠받들고, 경찰은 국민들을 짓밟으며 공권력 수호라고 외친다. 그야말로 폭력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히 느껴야 할 시기다.

끝으로 나의 잡문이 일선에서 그야말로 개고생하며 제대 날짜를 꼽고 있는 전투경찰이나, 악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오늘도 운동화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강철중 형사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언제나 그랬지만….

항상 문제는 대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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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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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마하르 카스트 출신이다. 내 아버지는 간신히 문맹을 면했고 변변찮은 막일로 가족을 먹여 살린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다. 내 조상들은 불가촉 천민이었다. 그들은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오지항아리를 목에 걸고 다녔고 발자국을 즉시 지울 수 있게 엉덩이에 비를 매달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의 하인이 되어 이글거리는 태양 밑을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이 끊어지도록 달려서 관리들의 행차를 알려야 했다.” -296p

저자 나렌드라 자다브의 아버지인 다무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을 규정지어버린 달리트란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야말로 눈물겨운 투쟁을 전개한다. 물론 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하더라도 그가 달리트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달리트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투쟁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전해주기 위해 헌신했다. 다무의 이러한 투쟁, 헌신은 결국 자식들의 인생을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나렌드라 자다브를 비롯하여 다무의 자식들은 다무와 어머니 소누의 헌신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결국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달리트로서는 꿈꿀 수 조차 없었던 위치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책을 넘겨가며 다무와 소누의 깨어남의 과정과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식들까지 자신의 신분을 저주하고, 결국 체념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자마저 부끄러워해야 하는 달리트. 그런 영겁의 굴레에서 자식들만큼은 벗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나에게 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자식들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그로 인한 자녀들의 성공이 아니었다. 보다 눈물겨운 것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바꾸려는 치열한 투쟁 그 자체였다. 자신의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달리트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통이란 이름으로 강요되어왔던 모든 구속과 억압을 깨뜨리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 모든 고통과 억압에 맞서 싸운 그들의 용기 그 자체가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게 그들 속에 잠자고 있던 백조를 깨울 수 있었고, 결국 자식들에게 전혀 다른 삶을 전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2007년에 나온 직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 있다. 전에 구입했던 책을 어디에선가 어느 순간 잃어버린 후 친한 사람이 다시 선물로 사주었는데, 1판68쇄였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팔렸다는 소리다. 이렇게 책이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각종 언론과 매스컴에서 이 책을 다루며 많은 홍보를 해준 덕도 있을 것이고, 출판사 자체의 영향력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인도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던 어떠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이 부분에 있어서는 류시화 님의 책임이 적지 않다.^^)이 책을 통해 상당 부분 깨진다는 신선함도 작용했다고 본다. 사실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방법은 일정한 매뉴얼이 있을 정도로 획일화, 규정화되지 않았는가. 그 매뉴얼을 충실히 따른 책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받던 천민이 차세대 인도의 지도자가 되어버린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주된 원인이 바로 교육에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을까. 물론 한 사람의 성공 과정을 보면 그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 미운 오리새끼도 백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화. 바로 거기에 한국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았을까. 이는 지금 불고 있는 오바마 신드롬과도 다르지 않다. 어찌되었든 그가 미국의 평범한 흑인이 아님을 잊고, 그가 선택받은 이라는 사실을 잊고, 다만 그의 성공만을 바라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 다무는 분명 특출한 재능도 그렇다고 재력이 넘치는 이도 아니었다. 평범한 달리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도의 모든 달리트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교육과 자각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바바사헤브(암베드카르), 토 마스터 등과 같은 정신적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이는 분명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려, 자식들의 인생을 바꾸려 했다. 그 결과는 물론 성공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기득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결국 그 기득권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은연중에, 아니 적나라하게 책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독자들을 편안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이 기득권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 있다. 일단 기득권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기른 후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은 후 느낀 씁쓸함은 무엇일까. 국가가 자신의 생존과 국민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위해 만들어놓은 교육 시스템 안에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 과연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무의 노력과 그 자식들의 성공을 보며 만족해하면서도, 과연 다무와 같은 이가, 자다브와 같은 이들이 인도에서 얼마나 될까를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오버일까.

한국의 교육열이야 새삼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우리는 자신은 굶어도 좋지만, 자식만은 온전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발전해왔다. 그것이 지금은 대학생 자녀의 수강신청까지 어머니가 대신 관리해주는 수준까지 왔다.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칭찬할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롤 모델을 제시하고 그 모델에 모든 국민들이 몰입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지금 처지를 비관하거나, 국가에 대해 반항심을 가지지 말고 일단 롤 모델과 같은 정도의 실력을 키우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모든 여학생들이 김연아가 될 수 없고, 모든 남자들이 박태환, 박지성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을 뺀 나머지 한국의 학생들이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교육이라는 통로를 통해 한국의 천민들은 신분 상승을 꾀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다. 하지만 이제 기득권은 그러한 통로를 조금씩 닫고 있다. 엄청난 교육비와 기형적인 교육 시스템으로 더 이상 한국의 개천에서는 용이 나올 수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소수의 용들은 남겨둘 것이다. 그래야 나머지 수많은 이무기들이 군소리 없이 따라올 테니. 대학은 자율화라는 개 같은 구호아래 교육의 불평등을 아무 제약 없이 추구하고, 노골적으로 교육 장사를 시작하려 한다. 소위 스카이라는 곳부터 지르고 있다. 돈은 가장 많은 것들이 항상 먼저 돈에 눈이 머는 법. 서민들은 더 이상 돈 많은 엘리트 집단과의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교육에 생명을 건다.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들이 이 시대에 과연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보았는가. 그런 피눈물 나는 일들이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비단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점차 더욱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돈”이라는 신에게 버림받고 있다. 점차 권력은 소수에게 쏠리고, 나머지 달리트들은 로또와 같은 인생의 역전을 꿈꾸다 죽는다. 그리고 한두 명의 성공 케이스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또 그렇게 죽는다.

교육으로 인생의 역전을 노리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다무와 소누 같은 부모들은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교육을 사업으로 인식하고, 그 사업의 흑자를 내기 위해서 기득권은 더욱 더 교육을 더럽힐 것이다. 그렇게 더러운 교육의 수혜를 받은 이들은 역시 사회에 나가 또 다른 이익 창출을 위해 활약할 것이다.

희망은 있을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시대이지만, 나는 다무의 한 마디를 가슴 속에 품어본다. 그래도 꿈은 꾸어야 하기에.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도 길거리의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면 전부 낭비일 뿐이다.” - 3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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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행복해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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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인 중에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박성광이란 이가 있다. 예쁜 박지선과 함께 커플로 웃음을 주다 최근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보다는 박영진이란 희극인에게 점수를 훨씬 더 준다. 박성광은 내가 보기엔 박영진 덕을 너무 봤다. 박지선 덕도 많이 봤지만, 내가 보기엔 박영진의 아이디어로 묻어 간 케이스다. 물론 그의 능력을 완전히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술 마시고 조는 연기야 과거 전설의 희극인 백남봉 선생이 원조이고, 사실 백 선생의 연기가 더욱 자지러지게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박영진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웃게 만든다. 이건 요즘 희극인 답지 않은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이다. 모든 희극인들이 한 번 웃기기 위해 일주일을 피터지게 고민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중 박영진이 단연 돋보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성석제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웃음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 우선 그의 소설은 그가 의도적으로 궁리 끝에 그렇게 썼건 아님 그냥 펜 가는 데로 썼던 간에 무지하게 웃기다. 단순한 문장 하나가 사람을 뒤집어지게 만든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키득거린 적이 얼마였던가.  
이런 능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사람이 말로,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웃음을 유발토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한 분이라면, 글로 사람을 웃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지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의 글은 대단한 힘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달라지고 있다. 확실히 그러나 은밀하게.

마르쿠제였나. “예술은 다른 어떠한 언어로도 전달할 수 없는 진실을 전달하며,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반박한다”고 말한 이가. 하지만 강철중은 말했다.
“지금 형이 피곤하거든, 좋은 기회 잖냐. 그니까 조용히 가라~”고. 
 

 

사람들은 이제 “타락한 세상을 가로질러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드러낸다”는 소설적 명제를 믿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이 명제 안에서 자신의 열정을 태우고 있지만, 점차 소설은 그 역할과 위상에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성석제의 소설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웃음이라 할 수 없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찌질이”였다. 건달, 전과자, 술꾼, 깡패, 노름꾼, 바보, 탐서가 등등. 그들의 하나같이 어설픈 삶, 행동에서 우리는 웃음을 얻었지만, 그 웃음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회 밖에 내던져 진 인간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그가 이제는 점차 사회적인 시선에 집중하고 있다. 절대 풀어낼 수 없는 갈등, 파탄의 끝, 그리고 그 속에서 어리석게 희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독자들을 작가는 조금씩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석제의 글에는 분명 입으로는 웃고 있는데,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주인공들이 내뱉는 말들은 그야말로 “죽음”인데, 정작 그이의 삶 자체는 그보다 더욱 처절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소설에서는 웃음보다는 미소가 더욱 어울리는 듯하다. 키득키득은 아니지만 독자 스스로 소설의 끝 이후를 생각하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지. 그게 달라진 성석제의 모습처럼 보인다.

소설집의 제목과 같은 소설 지금 행복해를 읽다보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뒤늦은 자각과 처절한 반성에 따른 인간 변화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도박 중독자, 알콜 중독자에서 결국 남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 중독자,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눈물 중독자가 되기까지,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과정은 고스란히 우리네 모습과 겹쳐진다. 사회에서 소외된 특별한 분류가 되어진 이들이 기실 우리의 가족이라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충격과 묘한 동질감, 그리고 연대의식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곳에서 상처받고 썩어가는 사회에 대한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최근 워낭소리를 관람했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먼저 봤다. 나는 영화를 본 후 이런 영화를 왜 대형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싸였고, 이명박 대통령은 “만화영화와 독립영화를 함께 상영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말씀을 했다.
성석제 소설을 읽으며 최원균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 그리고 소가 떠올랐다. 청명한 워낭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우리네 삶이 점차 삶이 아닌 삶으로 되어가는 순간. 그런 우리들에게 헛웃음이 아닌 진한 미소를 줄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성석제가 앞으로 그러한 모습을 계속 우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심각한 우리네 삶을 가지고 노는 “삶장난”을 계속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삶이 장난이냐고? 예술이, 문학이 장난이냐고? 그렇담 삶은 계란이냐?

아 춥구나, 보일러 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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