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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ㅣ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서울역에서 용산참사 추모집회가 끝나고 시위대 일부가 경찰과 충돌해 경찰 10여 명이 폭행당하는 일이 있었다. 전후좌우, 지붕과 마루 밑까지 살펴볼 생각은 안하고 정부와 여당, 그리고 냄새나는 주요 언론들은 다짜고짜 집회 참가자들을 공권력에 도전한 불법 폭력 세력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경찰이 매 맞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한탄한다. 하지만 난 경찰이 매 맞는 나라가 국민들이 맞아죽고 불타죽는 나라보다는 나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죽는 것보다는 매 맞는 것이 낫고, 적어도 경찰은 국민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있던 그날, 경찰은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시위대를 가로 막고 연행하려 했다. 이른 바 비폭력적, 평화적으로 끝난 집회에서 뒤늦게 경찰이 제지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난 그 자리에 없었기에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이른 바 공권력이 행해온 행동을 돌이켜볼 때,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유족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부당한 공권력으로 죽어 간 가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다. 하지만 부당하게 공권력을 휘둘러 국민을 살인한 정권은 오히려 죽어간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불법 폭력”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고 있다.
검찰이 보여준 행동도 역시 꼴 같지 않았다. 최근 신영철 대법관의 삽질을 보면 더욱 잘 알겠지만, “권력의 개”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님을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경찰과 검찰이 이미 3살 때부터 신용을 잃은 지 오래인 나라.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왜 책 이야기는 하지 않고 딴 소리만 지껄이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책이 내게 전해준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정부가 혹은 공권력이 “부당한 폭력”이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폭력”이 정말 “부당한” 폭력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혹은 모른 척 할 수도 이고, 때로는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폭력이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솔직히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저자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폭력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은 어떠한 행위를 “정당한 폭력” 혹은 “부당한 권력”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주체는 바로 그 사회,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한낱 썩어빠진 정부 따위가,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대통령 한 명이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을 때려잡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다만 공권력 행사라고 떠든다. 하지만 힘없는 국민이 부당한 권력에 맞서 작은 몸부림이라도 칠라치면 그건 한 순간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가보네”라고 생각해버린다. 사실 생각도 안 한다. 그냥 외면한다고 할까. 물론 폭력이 폭력인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띨띨한 남정네들이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와, 몸살나게 생겼네~!”라고 지껄인다면, 남자들끼리는 전혀 폭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여성이나 다른 모든 여성에겐 엄연한 폭력이다. 이처럼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가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때문에 정부가 아무리 공권력 행사라고 떠들어도 당하고, 죽어가는 국민들이 그것을 폭력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폭력.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미친 소가 먹기 싫다고, 온 나라를 삽질로 아작 내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한국을 고스란히 미국에 바칠 수 없다고 촛불을 들고 일어난 국민들은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하는 정부는 그것이 가공할 폭력으로 느껴졌다. 광화문 한 복판에 산성까지 쌓아올리고 국민들을 무서워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느꼈다.
민주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을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고 동의에 근거해서 유지하는 체제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이 되지 않고 끊임없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권력이 되고자 하는 체제”다. 또한 “폭력 여부는 여전히 국가의 법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그 법은 더 이상 고정적이지 않으며 언제든지 법적인 절차에 의해서 수정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이 과연 이러한 설명에 부합하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갖 악법으로 국민들을 강제하고 하고, 국민들의 삶과 직결된 법보다는 재벌 보호와 1% 특권층을 위한 법 만들기에 올인하고 있는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민주주의 국가는 폭력의 독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이른 바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바로 상징적 권력/폭력이다. 비정치적이고 비물질적, 비경제적인 모습으로 둔갑하여 사람들 스스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게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최근 이명박 정부의 국제중 설립추진, 유명 사립대학의 ‘내맘대로’ 선발 등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한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교육 행위는 자의적인 권력을 통해서 문화적 자의성을 주입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징적 폭력이다.”
하지만 워낙 솔직하고 속도를 좋아하는 이명박 정부는 그런 겉치레를 사양한다. 그냥 무식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정부의 부당한 폭력이 “폭력”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규정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가 일어난다.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국민들과 처절한 전쟁을 한 것을 제외하면 이명박 정부의 한 일은 제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공진성의 “폭력”은 폭력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에 수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책 한 권으로 인간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폭력의 이미지가 순간 바뀔 순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준다. 과연 우리가 당하는 것이 폭력인지, 우리가 대항하는 것이 폭력인지, 그리고 그 규정을 누가 하는지 말이다.
저자는 2008년 촛불집회의 폭력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폭력 규정으로 시작해 근대 국가와 관련하여 폭력의 개념을 정치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선동가, 혹은 혁명가가 아닌 학자이기에 판단은 물론 독자에게 맡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똥을 똥이라고 하면 잡혀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이 빌려준 권력을 잠시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국민들에게 똥을 금이라고 강요한다. 법을 수호하는 사법부가 나서서 범죄자를 국가 경제를 지키는 영웅으로 떠받들고, 경찰은 국민들을 짓밟으며 공권력 수호라고 외친다. 그야말로 폭력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히 느껴야 할 시기다.
끝으로 나의 잡문이 일선에서 그야말로 개고생하며 제대 날짜를 꼽고 있는 전투경찰이나, 악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오늘도 운동화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강철중 형사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언제나 그랬지만….
항상 문제는 대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