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크놀프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49
헤르만 헤세 지음 / 일신서적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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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중편(본문 151면)이고 [크눌프]는 3부작(합하면 역시 중편 - 본문 80면)이며 [매르헨]은 동화집(아우구스투스, 시인, 피리의 꿈, 이상한 별 이야기, 험한 길, 파르듐(연시와 산), 붓꽃 등 7편을 수록, 본문 99면)입니다.

 
저가 출판답게 3편을 묶어 출간했습니다.
 
[데미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느낌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서 동기를 얻은 작품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거창한 해석은 지나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크눌프]는 여러 분들이 방랑자적 기질을 잘 설명하였다든지 시초와 돌아감 드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모순되는 게 많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매르헨]은 위에서 언급한 단편 7개를 묶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화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그냥 읽혀지는 내용들이므로 잘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일까하는 차원으로 간다면 개개인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다 보니 지난 달에 본 것을 포함하여 헤세의 작품 여러개를 짧은 시간 안에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제 관점으로서는 특이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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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9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김양순 엮음 / 일신서적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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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규는 소설 [25시] 내에서 몇번 25시라는 주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의견을 적어보겠습니다. 52페이지에서 사제의 아들이면서 시인인 트라이안 코루가가 친구 조르주 다미앙 검사에게 자신의 새로운 소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우리 개인은 기술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채 죽을 거야. 내 소설은 그러한 에필로그를 실은 작품이 될 거고"
 "제목은 뭐라고 붙이나?"
 "<25시>"하고 트라이안이 말했다.
 " 이것은 모든 구제(救濟)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야.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고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 후니까. 이것은 서구 사회의 정확한 시간, 다시 말하면 현재의 시간이며 정확한 시간을 뜻하고 있지."

 그리고 100여 페이지 뒤에서 헝가리 정보국 국장인  바르토리 백작이 그의 아들 루시안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지금 25시다!"
 "무슨 말씀이세요?" 루시안이 물었다.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유럽 문명의 시간이야."

 동시에 작가는 바르토리 백작의 입을 통하여 인류가 가진(전해 받은) 3가지 유산(인간, 미, 법) 중 가장 중요한 인간을 상실하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상실로 말미암아 나머지 둘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 루시안의 입을 통하여는 희망을 남겨 둡니다. '과거에는 현재보다 더한 시대가 있었다고.'

 모리츠의 인생유전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1938년에 저는 루마니아의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1940년에는 헝가리의 루마니아인 수용소에, 1941년에는 독일에 있는 헝가리인 수용소에, 1945년에는 미국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에 다하우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수용소 생활 13년이 끝난 나는 열여덟 시간 동안 자유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이는 작가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말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간들의 평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길을 쓴 시점(발표한 때)은 1949년이므로 아직 미래가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츠 일가가 사진을 찍으면서 이야기는 중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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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여행이다.
 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너무나 바쁘게 지내고, 눈앞의 관심사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그래서 한 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일 뿐이다. 원하는 것을 전부 가졌지만 만족을 모르며 늘 공허한 사람들도 있다.
 삶이란 염주알처럼 한 줄에 꿰여 있는 서로 무관한 사건들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흔들려 급류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다. 자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이곳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삶이 이렇게 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 분이 계획하신 우리 삶은 기쁨과 목적으로 가득하다. 가장 평범한 사건들도 그분이 세우신 계획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를 인도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기 원하신다.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하기 원하신다. (pp13-4)

 때로 사람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강요하느냐고 묻는다.
 "너무 편협하지 않나요?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까? 종교는 다 똑같지 않나요?"
 나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교들이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 설명한다. 이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종교는 유일신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수많은 신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우리를 돌본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믿지 않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시간을 초월하며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라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나 동물이나 별을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인자하고 사랑스럽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는 신이 거칠고 심판하길 좋아한다고 본다. (pp24-5)

 내가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나에 관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다.(당신은 최소한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나에 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려면 나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분은 정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p27)

 우리가 정교한 동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교한 동물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영혼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동물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를 특별한 인간이 되게 하며, 모든 인간의 생명에 존엄과 가치를 부여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5)" 인간의 생명이 결코 멸시를 받거나 학대를 받거나 무자비하게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이가 어리든 많든 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p38)

 하나님이 주신 일곱가지 선물
1. 우리 삶을 그리스도께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새로운 관계이다. 그분은 이제 사랑이시며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이며, 당신은 이제 그분의 자녀, 영적으로 그분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자녀이다.
2. 두 번째 선물은 새로운 시민권이다.
3. 세 번째 선물은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다. 성경은 이러한 영적 가족을 '교회'라고 부른다.
4. 네 번째 선물은 새로운 목적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에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여 하심이니라"(엡2:10)
5. 다섯 번째 선물은 새로운 능력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목적을 주셨다. 하지만 새로운 능력이 없이는 결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6. 여섯 번째 선물은 새로운 운명이다. '회심'은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을 주신다. 영생은 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것을 오해한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이 선행을 통해 구원을 따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자격을 얻을 만큼 선할 수 없다.
7. 마지막 선물은 새로운 여정, 즉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따라갈 전혀 새로운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pp72-81)

 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의심할까? 왜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가?
 첫째, 여전히 죄를 짓고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거절하실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냉정을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면서 이런저런 짓들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을 대라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145:8)고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감정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된 겸손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편지했다. "교만한 사람만이 천국에 갈 만큼 선하다고 말할 거예요. 교만은 죄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국에 갈지 안 갈지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겁니다."
 한 가지 면에서 그는 옳다. 교만은 죄이며,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거나 얼마나 선한가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pp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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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그녀의 손이 가슴의 따뜻함을 가지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큰 풍랑이 일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푸른 하늘은, 폭풍이 검은 구름을 쫓아내고 있는 지금처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은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건가요?"
 그녀는 이 결정적인 순간은 좀더 지연시키려는 듯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왜냐구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어째서 태어났는지 물어보십시오. 꽃에게 왜 피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답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여기 있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 책이 대신하여 말해 줄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 속에는 유용성이나 무용성, 이익이나 손해, 얻음이나 상실, 명예나 불명예, 칭찬이나 비난, 그밖에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을 고려해 넣어서는 안 된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선한 것은 다만 그 고귀함과 선함 때문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이에 따라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그 삶을 규제할 수 있다. 외면적이라고 함은, 모든 피조물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어 영원한 선은 다른 것보다 더 반짝인다. 그리하여 영원한 선이 가장 빛난고 반짝이고 활동하고 알려지고 또한 사랑받는 것은, 이것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가장 적은 것은 가장 악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다루고 이와 사귐에 있어 이러한 구별을 알고 있으면 가장 선한 피조물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니, 그와 사귀고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pp14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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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 2008-07-27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앞에 놓인 푸른 하늘은(이), 폭풍이 검은 구름을 쫓아내고 있는 지금처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왜냐구(고)요? == 괄호 안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절 중 밑에서 세 번째 줄의 '가장 악한 선'은 혹시 '가장 악한 것'의 오자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