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9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김양순 엮음 / 일신서적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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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규는 소설 [25시] 내에서 몇번 25시라는 주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의견을 적어보겠습니다. 52페이지에서 사제의 아들이면서 시인인 트라이안 코루가가 친구 조르주 다미앙 검사에게 자신의 새로운 소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우리 개인은 기술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채 죽을 거야. 내 소설은 그러한 에필로그를 실은 작품이 될 거고"
 "제목은 뭐라고 붙이나?"
 "<25시>"하고 트라이안이 말했다.
 " 이것은 모든 구제(救濟)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야.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고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 후니까. 이것은 서구 사회의 정확한 시간, 다시 말하면 현재의 시간이며 정확한 시간을 뜻하고 있지."

 그리고 100여 페이지 뒤에서 헝가리 정보국 국장인  바르토리 백작이 그의 아들 루시안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지금 25시다!"
 "무슨 말씀이세요?" 루시안이 물었다.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유럽 문명의 시간이야."

 동시에 작가는 바르토리 백작의 입을 통하여 인류가 가진(전해 받은) 3가지 유산(인간, 미, 법) 중 가장 중요한 인간을 상실하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상실로 말미암아 나머지 둘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 루시안의 입을 통하여는 희망을 남겨 둡니다. '과거에는 현재보다 더한 시대가 있었다고.'

 모리츠의 인생유전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1938년에 저는 루마니아의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1940년에는 헝가리의 루마니아인 수용소에, 1941년에는 독일에 있는 헝가리인 수용소에, 1945년에는 미국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에 다하우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수용소 생활 13년이 끝난 나는 열여덟 시간 동안 자유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이는 작가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말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간들의 평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길을 쓴 시점(발표한 때)은 1949년이므로 아직 미래가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츠 일가가 사진을 찍으면서 이야기는 중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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