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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11월
평점 :
오랜만에 이영도의 소설을 읽었다.
<피마새>, <눈마새> 같은 장편은 솔직히 손길이 가지 않는다.
<눈마새>는 사 놓고 너무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다.
한번 들면 단숨에 읽어야 하는데 체력도, 시간도 부족하다.
그러고 보니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 <그림자 자국>이었다.
그 이전에 나온 소설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다.
그래도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눈길이 가고, 위시리스트에 올려놓는다.
이번 책도 약간은 초기작의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좀더 묵직하고, 연극적 요소가 더 많이 가미되었다.
이번 소설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죽은 자가 글을 쓴다는 것이다.
살해당한 어스탐 경은 자신의 피로 글을 썼고, 펜이 주어지자 소설로 이어졌다.
무려 4년 동안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아주 긴 글을 쓴 것이다.
말 그대로 대하장편 소설인데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그 속에 녹여내었다.
귀족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오소리 옷장은 다른 귀족의 관리 아래 들어간다.
죽은 자가 쓴 글을 임사전언이라고 하고, 어스탐 경이 언데드인지 질문이 들어온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온 만신전의 전령 사란디테.
어스탐 로우의 유산관리인으로 임뎡된 카쉬냅의 백작 더스번 칼파랑.
임사전언에서 밝혀질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온 엔파 백작 스벤터 날바이.
이들이 살인 용의자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오소리 옷장이란 한정된 공간, 마무리되어가는 어스탐 경의 소설.
기존에 쓴 소설에서 알려주는 주요 용의자 4명.
작가는 이 네 사람의 사연과 왜 용의자가 되었는지 하나씩 풀어낸다.
이 과정은 결코 빠르지 않고, 낯선 모습이고, 조금은 답답함도 있다.
이런 순간에 변화의 바람을 가져오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결코 평범하지 않는 모습과 특별한 존재인 도서관의 사서들이다.
이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어스탐 경의 원본을 자신들의 도서관에 가져가기 위해서다.
이 사서들과 나누는 문답은 고루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고루하고 의식적인 말투는 그렇게 낯설기만 하지는 않다.
기존의 판타지나 역사소설에서 자주 봤던 것이다.
단단한 설정을 기반으로 한 모험과 액션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창작과 독자와의 관계, 저작물 검열 등의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에 어스탐 경을 죽인 범인을 찾는 추리까지 곁들여져 있다.
사실 추리 부분은 읽으면서 ‘혹시’ 했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전 같은 경쾌하고 유쾌한 부분은 거의 사라졌지만 생각할 거리는 더 늘었다.
아직도 생각나는 <퓨처 워커>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곱씹을 부분이 많다.
판타지적 재미가 가득한 후반부로 가면 기대한 장면의 연속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약간은 취향을 타는 부분이 있다.
물론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은 이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보다 읽은 데 시간이 더 걸렸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읽다가 마지막에 크게 달렸다.
낯선 종교, 낯선 이름, 기발한 상상력 등이 빠르게 나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하지만 이 저지도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무너진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영도 특유의 치밀하게 쌓아 올린 세계관 설정.
웹 판타지 소설의 즉각적인 재미는 없지만 그 묵직하고 치밀한 구성이 주는 재미는 크다.
곱씹을 때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재미의 요소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읽을 때도 좋았지만 다시 그 소설을 복기하는 지금 더 많은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올해가 가기 전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소설 한 권은 더 읽어야겠다.